• 어린이를 예수님에게로(마가복음 10:13-16)
  • 조회 수: 191, 2013.02.06 18:33:55
  •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외교관의 직업을 가진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일에 쫓겨서 외국에 출장을 가고, 업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 가정과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침 휴일이 되어서 그는 생각하기를 "오늘은 낮잠이나 싫건 자고 미루었던 책이나 읽으면서 휴일을 보내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지 말고 아이들과 함께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속된 말로 닦달합니다. 
    "오늘 편히 쉴 줄 알아요" 이러니 집에 있다가는 아내 등쌀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부득이 아이들과 같이 낚시질을 나갔답니다.    아이들은 정말 좋다고 한껏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일기장에 그날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오늘은 아이들과 낚시를 다녀왔다.  소중한 하루를 낭비해 버렸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중에 하나는 후에 유명한 역사가가 되었는데, 그의 어린 시절의 일기가 공개되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갔다. 나의 일생에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 우리 어른들에게는 하찮은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일생을 좌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영향을 주기고 하고, 아주 나쁜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어린이날만 하루 놀아준 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어릴 때 자주 놀아주세요, 크니까 어린이날도 소용이 없는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들이 더 바쁘고, 우리가 다 컸는데, 어디 어린이냐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교육을 말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의 휴일은 자녀 교육을 위해 매우 중요한 날이다"라고 합니다.    휴일은 자녀 교육에 힘써야 하는 날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행복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나는 물질이 많아서 행복하다, 나는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서 행복하다, 나는 아는 것이 많아서 행복하다, 그런 것이 많으면 불행하지는 않지만, 결코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좋은 집이 있어서 행복합니까?  좋은 차를 굴리니 행복합니까?  좋은 음식을 먹어서 행복합니까?  사람이 그런 것을 가지고 행복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언제나 상대적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행복은 언제나 좋은 인간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면 언제나 행복하고요, 부교역자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면 언제나 행복한 것입니다.
    영국에서 한 신문사에서 독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런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 빠르다', '아니다. 기차를 타야 한다',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대답이 주를 이루었지만,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하는 대답이 뽑혔습니다.   참으로 좋은 친구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가족들, 좋은 친구들, 좋은 교인들, 좋은 이웃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는데도 문제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흔히 나는 문제가 없고, 당신이나 잘 하라는 식으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보고 좋은 아내 되라고 하지말고 내가 먼저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면 아내는 저절로 좋은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남편보고 좋은 남편이 되라고 싸우지 말고, 내가 먼저 좋은 아내가 되려고 힘쓰고 애쓰면 남편은 어느 사이인가 좋은 남편, 일등 신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보고 좋은 아이들이 되라고 하지말고, 먼저 우리들이 좋은 부모님이 되려고 힘쓰고 애쓰면 아이들은 훌륭한 인격을 가진 모범생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다른 사람도 변하는 것입니다. 
    슈바이쳐 박사가 아프리카 콩고의 람바레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여 보았는데, 밖에서 한 노인이 보리를 밟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병원 원장이었습니다.  보리를 타작하는데 하루 종일 그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박사님은 왜 고생을 사서하십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상가요, 의학박사요, 오르간 연주자요, 목사인 그가 무엇 때문에 그 고생을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박사님을 이곳에 와서 고생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했습니다.  "말로는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에", 말로는 누구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에 행동으로 보이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살아가는데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변화되어야 상대도 변화됩니다. 
    우리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의 가치관에 맞으면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자기의 가치관에 맞지 아니하면 아무리 다른 사람이 좋아하고 행복해도 나는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이 언제인 줄 아십니까?  자기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는 청소년기에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성격이나 인격이 형성이 형성되는 것은 언제인 줄 아십니까?   그것도 어릴 때부터 신앙과 교육을 통하여, 가정에서부터 자리잡는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무엇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모방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교육을 말할 때 "배운다는 것은 배우는 자세를 흉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라고 합니다.  
    누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면 잘 부르는 사람을 따라하다 보면 배우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 살다보면 그는 어느 사이에 어엿한 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먹어라, 저것을 먹어라 할 것 없습니다.   부모님이 잘 먹으면 자식도 잘 먹고, 부모님이 잘 믿으면 그도 잘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로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들어서 배우는 것보다는 보면서 배우고, 더욱 현재 학생들은 느낌으로 배우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은 앉아서 텔레비전 보시면서 아이들에게는 가서 공부하라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더욱 부모님은 나가서 춤추러 다니면서 아이들에게는 공부하라고 하니, 부모가 계시지 않은 동안 아이들은 나쁜 비디오를 보고 탈선하는 것입니다.    말로 가르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의 인생 철학이 형성되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 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지존파 사건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지존파의 대부가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법정에서 죄를 짓게 된 동기를 따졌습니다.  그는 옛날을 회고하였습니다.   17년 전에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의 선생님께 호되게 그를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너는 왜 오늘도 그림 그리는 것을 알면서 크레용을 가져오지 않았느냐?    왜 번번이 가져오지 않는 거야?"  그러나 이 학생은 너무 가정 형편이 어려워 크레용을 살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아이가 집중력이 없고, 주의력이 약해서 그러는지, 반항심이 생겨서 이런 행동을 하는가 생각하여 기분이 상하신 선생님이 좀 때렸습니다.     그리고 "이 자식아 훔쳐서라도 가져와야지 왜 준비물을 안 가지고 오는 거야"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아이는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형장에서 그때 선생님의 한마디가 자기의 인생을 망쳐놓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된 사람 같으면 그런 말도 새겨서 들을 터인데, 그때부터 훔쳐서라도 준비물을 가져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도둑질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기성 세대는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의 장래에 아주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선생님들이 다 사랑이 많고, 훌륭하신 분들이지만, 어쩌다 그런 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분도 홧김에 자기도 원하지 않은 말이 입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에게 대한 아주 귀한 말씀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사람들, 자기 출세를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라도 되신다면 장관 자리 하나는 맡아놓은 당상이라고 착각한 사람들입니다.     주의 나라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이 될 것인가?  이 문제가 관심사로 떠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길에서 다투는 것을 들으신 적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때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제자들 한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에게 대하여 많은 교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누구든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정성을 다하여 최선을 다할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따뜻하게 영접하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따뜻하게 영접하는 것이 되고, 어린 아이를 성대하게 영접하면 예수님을 성대하게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어린 아이들이 뛰놀고, 교회 다니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하고 돌아볼 때에 그 상급은 하늘에서 결단코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말, 창조적인 말, 감동적인 말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선진 문명 국가일수록 자기가 태어난 것은 젊은이들의 무분별한 사랑 노름의 결과로 던져진 존재, 태어나서는 안된 사람인데, 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태어난 존재라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책임성 있게 살아가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외면하고, 누가 뭐라고 하여도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책임을 망각하고, 그 막중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입니다.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에 책임 있는 사람이라고 해주어야 합니다.  이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아주 중요합니다.   자식을 가졌을 때 두 사람이 사랑하며, 하나님은 어떻게 생긴 아이를 허락하여 주실까 하는 설렘과 수많은 기도가 있었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아이를 선물로 받았노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기도의 응답으로 허락하신 자녀라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 부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귀한 선물은 너희 자녀들이라고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말이 그들의 심중에 깊이 새겨지면 탈선하려야 할 수 없는 귀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아세례를 주는 날입니다.   유아세례를 받는 중요한 결단의 하나는 이 아이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채워져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자식은 반드시 구원받아야 하며,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위한 중보자라도 되겠다는 심정이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 주님이 중보자가 되십니다만, 내 자식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나의 구원까지도 그에게 양보라도 하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각오로 믿어야 본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는 우리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아이를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릴 때부터 교회로 인도하고,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유대의 많은 어머니들은 예수님의 안수해주시고, 만져주시고, 기도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동네에서나 해변에서 말씀하신다고 하면 수많은 어린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어린이들이 주님 앞에 왔을 때 조용히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도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고 물으면 거의 다 알아들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어린아이들이 울거나 떠드는 것은 좀 성가신 일이고, 말씀을 효과적으로 증거하는데 방해되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도와드리려는 제자들에게는 어린이는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시끄럽게 한다고 책망도 하고, 멀리 가서 놀라고 야단도 쳤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주님께서 대단히 진노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노하시고"라고 했는데, 화를 내시면서 진노하신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보면 예수님이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힘쓰고 애써서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나머지는 우리 주님이 다 책임져 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어린아이들을 만져주심 정도 바라고 왔지만, 우리 주님은 그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시면서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넘치도록 능히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프린스턴 대학 총장도 지냈던  믿음의 사람이요 목사인 죠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족보는 직계 후손 873 명중  대학 총장이 12명, 교수가 65명,의사 60명,목사를 비롯한 성직자 100명,직업 군인 75명, 저술가 85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공무원 80명, 하원의원 3명, 상원의원  2명, 미국 부통령 1명, 그리고 260명은 평범한 신앙인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한편 죠나단 에드워즈의 어린 시절 친구요 함께 주일학교에 다녔든 맥스 쥬크가 어느 날 교회를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 신앙이 없는 여자와 결혼해서 자녀들을 두었습니다. 그의 후손은 1,292명을 조사하여 보았는데 그 가운데 유아로 사망한 자가 309명, 직업 거지가 310명, 불구자 440명, 매춘부가 50명, 도둑이 60명, 살인자가 70명, 별 볼일 없이 산 사람이 53명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두 가문의 대조는 자녀에게 미치는 부모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두 부부가 사랑하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은 자녀들에게 무한한 꿈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부모가 경건한 삶을 살 때에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가정에는 자녀가 있습니다. 아무리 잘 사는 가정에도 자녀가 없으면 허전해 보입니다. 어느 집이든지 아이들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화사한 웃음소리가 있어야 희망이 보입니다.  부유하지만 자녀가 없는 집과 가난하지만 자녀가 있는 집이 있습니다. 우리가 둘 중에 어떤 가정이 행복한 집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자녀가 없는 집은 부유해도 장래에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있는 가정은 비록 가난해도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가 열려 있기에 행복합니다. 제가 가정 이야기나 하려고 꺼낸 것은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나 가정이나 어린이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과 교회가 밝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눈으로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학원과 도장에는 아이들이 넘쳐나는데 교회에서 어린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이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무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교회의 형태는 삼각형의 모습이었습니다.  장년들은 적었고, 순진하고 깨끗한 어린 아이들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장년은 상대적으로 많으나 어린이는 어떤 교회를 막론하고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과거에는  제일 재미있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재미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다양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성세대들이 어린이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한 영혼으로 바라보지 못했고 관심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어떻게 어린이들을 가르칠 것인가를 말씀을 통해 같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로 나오시는 부모님들과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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