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난당한 욥의 감사(욥기42: 1- 6, 마태복음 6:31-34)
  • 조회 수: 315, 2013.02.27 21:44:50
  • 오늘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가 비록 농사는 짓지 않아서 추수는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것은 추수(秋收)가 상징하는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추수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하며, 동시에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불사르는 마지막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과 거기에 따른 풍성한 은총을 감사하면서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풍성한 알곡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채워가는 기회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년간 IMF 관리 체제 아래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평안하던 욥에게 갑자기 닥친 시련처럼 우리 사회도 갑자기 닥친 경제적 한파로 인하여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직도 그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지금 서서히 경제가 회복되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더욱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감사절을 맞이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물론 빠른 시간 안에 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서게 하신 것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치솟던 주가가 폭락하는 것처럼 우리 경제는 늘 불안하여 그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직도 큰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거대한 기업이 하루아침에 넘어지면서 그 파문이 우리 사회 전체에 미치고 있는 상태이기에 우리가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아니 경제가 회복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감사해야 할 조건이 될 것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냄비물 끓듯 금방 끓었다 금방 식는 얄팍한 사회 구조이기에 경제가 조금 회복된다고 하여 다시 과소비 경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우려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난을 겪은 보람도 없이 아무런 각성과 변화 없이 옛날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또다시 더 큰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할지도 모른 것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욥기 말씀은 큰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새롭게 자신을 발견한 욥의 회개의 기도입니다. 욥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고난으로 큰 번민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는 본래 신앙심이 깊었고, 평소에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대하여 늘 감사하면서 두려움으로 자기의 삶을 바르게 지켜가려고 노력한 의인이었습니다. 이렇게 경건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그를 끝까지 평탄한 길로 인도하실 줄 믿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고난이 그의 가정에 밀어 닥쳤던 것입니다. 그가 가졌던 많은 재산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10남매나 되는 많은 자녀들이 함께 모여 잔치를 하다가 모두 죽음을 당하고, 욥 자신에게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내조차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욥의 고통은 재산이 없어진 것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그의 몸에 난 종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재산에 대해서는 별 애착이 없었습니다. 재산이 모두 없어졌다고 하였을 때 그는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번민과 고통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면서 그가 몹시도 불안해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재앙을 내리신다는 신명기에 나타난 이 믿음을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이 아니라 그 시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신념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욥을 위로하려고 온 그의 친구들과 논쟁을 하게 된 문제도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네가 고난 당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 없이 고난 당하는 사람은 없다는 일관된 주장입니다. 그런데 반해 막상 죄 없이 고난 당하고 있는 욥은 그 친구들의 주장을 반대하였습니다. 자기가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죄를 지은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고, 충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왔다는 것입니다. 욥은 결코 죄 때문에 자기에게 고난이 왔다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셨다"(19:6)고 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제까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신념과는 상반된 것입니다.

    그는 친구들과 이 문제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하면서 끝까지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나는 결코 너희가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죽기까지 내 결백을 주장하겠다"(욥 27:5)고 하였습니다. 욥은 이 고난을 통하여 자기가 이제까지 확고하게 가져왔던 신앙과 사상을 바꿀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가졌던 신앙의 폭을 크게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주장하였던 그의 신학을 대폭 수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제까지 가졌던 사상을 바꾼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과 치열한 논쟁을 하면서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 확신은 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 바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이루어진 천지창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심으로 비로소 욥은 이제까지 그가 갇혀있던 사상의 틀을 깨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는 먼저 자기가 이제까지 자기 신념을 너무 고집해 왔음을 고백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무한하고 그 신비는 오묘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이념으로 혹은 교리로써 제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제부터 마음 문을 열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어느 한 이념에 붙잡히지 않고 하나님이 새롭게 열어 보이시는 세계를 받아들이겠노라고 다짐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대하여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님을 뵈옵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귀로만 듣는 하나님은 이념화된 하나님, 교리화된 하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는 질문에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 무한하신 분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낸 분'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아는 하나님은 귀로만 들은 하나님일 뿐입니다. 반면에 눈으로 뵙는 하나님이란 민족의 역사 속에서 혹은 나의 삶 속에서 직접 체험하고 만난 하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매일 다르게 이루어지는 나의 삶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늘 새로운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정된 하나의 틀에 담을 수 없는 하나님, 언제나 우리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오늘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미래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새삼스럽게 이런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조아려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그는 기꺼이 고난 당하기 전에 가졌던 생각과 친구들과 논쟁하면서 폈던 자기의 논리를 이제는 모두 철회하겠다면서,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를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욥의 친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사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욥기는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지켜온 교리의 틀을 깨고 보다 넓은 세계로 그들을 이끌어 내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욥은 큰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뵙는 놀라운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깨달음에 대하여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가 가졌던 물질과 가족과 그의 신앙까지도 한꺼번에 다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그것을 보상하고도 남을 큰 깨달음을 얻었기에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렇게 감사하는 욥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욥에게 전보다 갑절이나 되는 복을 내려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드리는 이유가 어떤 물질적으로 풍성하게 복받은 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물질적인 복에 우리의 감사가 머문다면 그것은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물질에 매어 막상 감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기에 그것은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절 예배가 우리 사회의 경제가 조금 회복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감사를 드리는 예배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가 되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지난날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일깨워주셔서 우리가 검소한 삶, 절제하며 아끼는 삶,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를 보면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큰 것, 많은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던 지난날을 회개하면서 이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사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제까지 가져왔던 부자에 대한 꿈을 접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 되기를 바라는 산소망을 우리 속에 지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경제적 어려움은 바로 우리에게 생각의 변화를 이룩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금년에 우리가 물질적으로 얼마나 복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감사의 척도가 아닙니다. 얼마나 내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으며, 그 뜻을 따라 얼마나 노력하였느냐 하는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것을 나의 삶의 기쁨이며 목표로 정하게 하신 일로 말미암아 감사를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지난날의 어리석었던 욕망을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며 힘쓰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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