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담도 덕 되고 악담도 덕되는 설말을(마태복음 10:12-13)
  • 조회 수: 134, 2013.05.19 13:26:20
  • 오늘이 까치 설이지요? 그러니까 원래 설날은 내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하니까 오늘은 까치 설날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까치는 우리 나라 국민들이 생각하기를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기왕에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그런 새로서 까치 소리가 들려지면 '반가운 소식이 올 것인가 보다, 반가운 사람 올 것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오늘 까치 설에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반가운 메시지를 드려야 할 부담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드릴까 생각합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 평안을 빌어서 손해볼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주의 이름으로 가셔서 어디든지 평안을 빌고, 또 평안을 빌어 오는 그 말을 여러분께서 받으시면 도움이 될 것 같고, 또 평안을 빌었으나 그 대상이 평안을 받기에 합당치 아니하면 그 빈 평안이 소리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했으니까 특히 설을 맞아서 많은 평안을 빌어주는 그런 일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여기에 "네 그 빈 평안이 그가 받기에 합당하면 그 빈 평안이 그 집에 머물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풀어본다면 평안을 빌어주는데 평안을 받기에 합당한 가정 같으면 어떤 가정이 합당한 가정 같겠습니까? 평안한 가정이겠습니까, 평안치 못한 가정이겠습니까? 평안치 못한 가정이 합당한 가정이지요.

    그러니까 평안치 못한 가정에 평안을 빌어 주라 그것입니다. 그러면 평안이 필요한 집이면 그 평안이 거기 머물 것이요. 또 우리가 건강을 빌어주어야겠는데 이 건강을 빌어주려면 건강한 사람이 건강을 받기에 합당합니까, 아니면 건강치 못한 사람이 이 말 이루어져 도움이 되겠습니까? 건강치 못한 사람이 이 건강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지요. 또 위로 받을 필요가 없이 기쁨이 넘치고 나는 이 세상에 나서 부러울 것이 없다라고 하는 즐거운 그 순간에 가서 위로를 받으세요 하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를 받기에 합당한 가정은 어떤 가정이냐? 위로가 필요한 가정. 그러니까 기쁨을 잃은 가정 문제가 있는 가정, 웃을래야 웃음이 얼굴에 오지 않는 그런 가정 그런 개인에게 위로를 빌라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제자들을 내어보내실 때 초청장을 받아서 심방을 오라 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각 고을로 들어가서 그냥 무작위로 들어가고 싶은 집에 들어가라 했습니다.

    그래서 들어가면서 일단 "평안 할지어다." 이 평안은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 평안 속에는 건강도 있고 위로도 있고 부요도 있고 여러가지 내용이 있겠습니다. 이것을 그냥 빌게 되는데 그 가정에 그런 것이 이미 다 있어서 필요 없는 경우에 너희가 말했을 때 그것은 '아이구, 안 할말 했구나 여기는 다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빈 평안이 그 집에 필요하지 아니하면, 그 건강이 그 집이 모두 건강해서 네가 빈 건강이 필요가 없다면, 그리고 그 집은 기쁨이 넘쳐서 위로 필요 없다면, 네가 빈 그 위로와 네가 빈 그 평안이 네게로 돌아오리라'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이 제자들을 내어보내시면서 뭘 강조하려고 하느냐?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안이 필요한 사람에게 평안을 빌면 그 집에 머물러서 평안을 이루어낼 것인데, 그 집이 이미 평안해서 네가 빈 평안 필요 없다면, 그런데 그집 사정을 몰라서 들어가서 평안 할지어다 라고 했으면 그러면 그것 필요 없으니까 사라져버리느냐? 아니다. 너의 입으로 나간 말은 반드시 남아 있어서 그 집이 필요 없으면 그것이 되돌아 와서 네게 나타날 것이고, 네게 오늘 필요 없으면 네게 내일 혹시 평안 필요할 때가 오면 그것이 작동을 해서 평안케 해줄 것이다 바로 그런 뜻이 되는 것이지요.

    "만약에 합당치 아니하면…" 합당한 가정은 어떠한 가정입니까? 합당한 가정은 필요한 가정입니다. 빌어주는 말이 필요한 개인 필요한 가정이 되고, '합당치 아니하면'이란 말은 빌어주는 평안이 빌어주는 위로가 빌어주는 건강이 필요 없는 가정의 것은 네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그 뒤에 보면 "영접하면 그 집에 머물 것이요 영접하지 아니하면 또 돌아올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평안이 필요한데 건강이 필요한데 위로가 필요한데 그것을 영접하지 아니할 때에는 "또 나오라, 거기에 머물지 말고 나오라. 그리고 발에 먼지까지도 떨어버리고 나오라. 그러면 네가 빈 평안이 네게 올 것이고, 그 집으로 흘러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흘러들어 갈까바 다 떨어버리라." 하면서 나오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이 제자들이 가서 전하여주는 것은 어떤 이런 물품이 아닙니다. 이런 물품이 아니고 말로만 가서 전해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병든 자가 있는데, 유명한 의사가 와서 청진기를 갖다 대고 그리고 특수한 진료 기구를 갖고 와서 치료를 하게 되면 소문대로 유명한 의사가 와서 이제 살았다 이렇게 즐거워하고 "의사 선생님 살려만 주십시오. 치료비는 얼마든지 요구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환영을 하게 되는데 주의 종들이 갈 때에는 "건강하기를 축원한다. 이 병에서 놓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말만 갖다 하는 것이지요.

    또 주의 종들 중에서도 때로는 안수를 갖고 가면 좀 더 실감이 나지요. 안수 받을 때 좀 뜨끈뜨끈하기도 하고 뭔가 접촉이 되니까 좀 실질적인 감을 갖게 됩니다. 또 이제 아픈 곳에다 어루만지기도 하는데 예수님도 그런 일 많이 하셨는데, 어루만질 때에는 그 부분에 굉장한 어떤 감각이 오게 될 때에는 "할렐루야! 믿습니다. 내가 낳을 줄 믿습니다." 이렇게 참 환영하고 받아들이는데 말로만 했을 때에는 그것이 그렇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아멘도 하지 않고 말로만 전해주는 일에 대해서는 의사가 온 것처럼 대접도 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안수한 사람이나 그리고 어루만져서 무슨 감각이 올 때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신경을 써주지 아니하면 나오다가 발에 먼지까지 떨어버려라 그럽니다.

    이 얘기는 말만 갖다주어도 대접 잘하라는 뜻이 아니고, 말이 의사보다 더 위에 있다 그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안수보다 말씀이 더 위에 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 이 뜻을 잘 아셔야지, 오늘 이 얘기 듣고 '아이구, 안수 그것 필요 없다 하네' 그런 것이 아니고 말씀 내용에 따라서 안수도 하고, 말씀 내용에 따라서 어루만지기도 하고 다 하는 것이니까 결국은 비는 말을 해 주었을 때 그 말에 대해서 아멘 하지 아니하고 어떤 의사의 의술보다 약하게 여긴다든지 또 어루만지는 사람의 그 접촉보다 이 말에 대해서 약하게 여긴다면 "나는 그 말이 그 집에 있기를 원치 아니한다. 너희와 함께 그 말이 그 집으로부터 그 사람으로부터 되나오기를 원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무엇을 주어서 보내시는 것입니까? 말씀을 주어서 보낸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힘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위력, 이 말씀의 위력을 여기서 나타내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목회생활을 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 강조를 많이 해 옵니다. 그리고 말씀보다 더 위력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를 흔드는 것도 무기가 아닙니다.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를 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 세계를 뒤바꾸고 복잡하게 돌아가는데 내심(內心)이 아닙니다.

    그 집권자들의 속마음에 '이리 하리라' 하는 마음먹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 나타낸 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 말도 사석에서 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변인을 통해서 공식으로 말한 말에 의해서 세상은 움직여지게 되고, 화도 나게 되고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지요. 말(言) 말(言) 이 말이지요. 요즘 독도 때문에 한참 말 많은데 독도에 무슨 전쟁이 붙었습니까? 무슨 총알이 왔다 갔다 했습니까? 어선이 부딪히거나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나라의 앞뒤 잴 줄 모르는 사람이 말 한마디해서 얼마나 복잡하게 만듭니까. 이 말 한마디가 세상을 흔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을 내어보내실 때 그 어떤 다른 모든 것도 좋지만 말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느냐 그겁니다. 그래서 이 말을 중요시 여기라 하는 것인데,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로서 확신하는 것은 너무나 이 말의 위력이 크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은 오늘 늘 이처럼 건강할 그런 형편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제 자신을 제가 잘 압니다. 그런데 건강했습니다. 요즘 흰 머리가 가끔 많이 보태어지니까 답답해하는 분이 많고, 물들이라는 분이 굉장히 많은데 물들이라는 분들이 칼라를 하도 여러 가지를 말해서 어느 분의 말을 들어야 될지 몰라서 지금 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머리는 이래도 제가 건강은 아주 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젊을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가만히 생각합니다. 저는 중보의 기도를 많이 하지요. 목사니까 건강을 막 빕니다. 그 건강을 비는데 이미 건강해서 건강이 필요 없는 분도 계시고, 또 어떤 분들은 건강을 받아들이어야 될 분인데 그렇게 기도정도는 우습게 여기고 안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데, 주의 이름으로 말한 것은 땅에 떨어져 썩는 법이 없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이 건강이 되돌아와서 참 좋습니다.

    그리고 또 축도 하지요. 그리고 마치고 나갈 때 성도님 들에게 그냥 어느 분이 건강하고 아니한지, 어느 분이 위로를 받아야 할지 아니할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저 요즘 인사가 "주 임마누엘 기원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이렇게 늘 얘기합니다. 그런데 저보다 팔팔하게 건강한 사람에게도 그냥 막 하다보니까 갔지요? 그러니까 뭡니까? 그 말한 것이 되돌아와서 참으로 건강치 않나 생각해 봅니다. 참 의료보험 같은 제도가 제게는 필요가 없지요. 보험금만 항상 내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주 임마누엘 주께서 함께하신 것도 그러한 뜻이 아닌가…. 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 병자년(丙子年) 설을 맞으신 여러분께서 많이 모이게 될텐데, 건강과 부요와 장수를 말로서 해주기 바랍니다. 말로서 말해줄 때에 이것이 실물보다 낫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말하고, 받아들이는 분들도 이것은 실물보다 훨씬 나은 말씀이고, 필요한 때에 언제나 내게 있어서 나타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셔야 될 줄 압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키시기를 원하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또 여러분께서 건강하시기를 바라시고, 그리고 하나님을 여러분을 사랑하심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또 여러분 자신도 그렇지만 여러분의 부모님을, 혹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여러분 형제들을 여전히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하나님께서 은혜 은총 베푸시기를 원하시나 그 원하는 자에게 은혜가 나타나고, 보호를 받고 정말 평안하고 행복해지는데는 중간에 꼭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조건이 없으면 하나님도 못하시고, 받고 싶은 사람 받아야 될 사람도 받을 수 없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우리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여러 곳에서 찾을 수가 있으나 가장 핵심적인 하나님의 축복. 그래서 구약의 축도라고 말하는 민수기 6장으로 가서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민수기 제6장 22절부터 27절까지 제가 봉독하는 가운데 특히 24절부터 26절까지는 오늘 목사가 주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전하여 드리는 좋은 소식으로 아멘으로 받으시면 참으로 유익할 줄로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2-27)

    그러니까 모세를 불러서 한 지시를 내리시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를 내리실 때에 이미 마음에 두신 내용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평강 주시기를 이미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평강이 필요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지켜주지 아니하면 광야에서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백성에게는 큰 복이 큰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하고 하나님께서도 주셔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실 수 있는 힘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필요하냐? 중간에 소리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영적세계의 축복이 가고 이루어지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부릅니다. 그리고 가만히 하나님이 계산을 해보니까 모세가 나이 많고 이때는 이미 늙었어요. 그래서 온 동네방네 다니면서 이스라엘 집집마다 가서 문 두들기고 "여보시오, 들으시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하라고 하니까 하룻밤 사이에 다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니다가 모세가 먼저 쓰러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래 모세를 종으로 세우셨는데, 선지자로 지도자로 세우셨는데, 인도자로 세우셨는데 모세 혼자로서 되지 아니하니까 아론과 그 아들들을 불러 댑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을 불러서 여러 명을 불러서 이 정도면 다 돌지 않겠느냐 해서 "너희는 가서 뭘 전하느냐 하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그랬어요. 그렇게 하라고 그랬어요. 그렇게 하면 그 집에서 문을 열고 아멘 하면, 할렐루야 하면, 나는 복을 이제 시작할 것이라 그랬어요. 그것이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중간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참 중요합니다. 물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족이기도 합니다. 좀 구별된 백성이지요. 또 모세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구별된 백성 아론과 그 아들들이기에 중요합니까? 모세니까 중요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전하는 자의 소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우리의 연약한 한 가족을 일으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집안에 있는 문제들을 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하나님이 참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기대고 살아야지요.

    그리고 또 하나님이 보시는 바 그 백성은 복이 필요합니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냥 있다는 안될 형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급하니, 모세 혼자로서 다 해결할 수 없으니 사람을 불러다 댑니다. 여기 모세가 중요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 물론 제사장 족이니까 중요하고 권위가 있지요. 일반 백성보다 낫지요. 물론 낫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필요했던 것은 목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줄 소리가 필요했더라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갖다 들이대면 그 듣게 될 때 그 듣는 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복을 받게 될 것이라.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이것은 모세에게 한 말입니다. 원하노라 라고 외우게 해서 나가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이 아무리 원하셔도 하나님의 복을 전해줄 자가 없으면, 그리고 듣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복을 이루실 수가 없으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말씀으로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마저도 말씀하시고 말씀으로 이루셨으니 말씀할 자가 없을 때에는 하나님이 만든 천사들로 말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할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져서 선지자가 나타났을 때에는 천사를 쓰지 아니하고 사람만을 더 강하게 썼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말할 사람이 없으니 천사를 만들어서 말하게 하고 이루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복을 빌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3장 4절-6절을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그럽니다. 누가복음 3장에, 여러분이 찾으시니까 함께 찾아볼까요? 누가복음 3장 4절-6절에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는데 여러분께서 옛날 국어 공부하던 때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신다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했는데 여기에 광야에 '외치는 자'가 중요합니까? '외는 자의 소리'가 중요합니까?

    이 내용에 있어서 주어가 광야의 외치는 자입니까? 아니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까? 소리입니다. "소리여 가로되…" 그러니까 외치는 자도 참 중요하지만 우리가 이 글을 써 갈 때 언제든지 사람이 주인이 됩니다. 주어가 되는데, 광야에 외치는 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그 소리여, 너는 소리를 발하면 뭐가 된다고요? 주님께서 오시는 길이 병든 자에게 고치러 오시는 길이 평탄케 될 것이요, 첩경이 될 것이다 그것입니다.

    주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시기를 원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부요를 주시기 원하시고, 위로 받을 자에게 참 평강이신 주께서 그리스도의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고, 가려고 하니까 계곡이 많고 산이 많아서 넘어가려면 그 사람 이미 다 늙어버리겠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늙거나 말거나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갈 수가 있느냐?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여 발하라. 그러면 그 구원을 받을 사람은 구원을 보리라" 무엇 다음에 주님이 나타납니까? 소리 다음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말씀 다음에 주님이 바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기를 가리켜서 "나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다" 그랬어요. "나 요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소리다" 그랬어요. 누구를 가깝게 오게 하기 위해서? 나는 예수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는 사람이라 하지 않았어요. 소리라고 했어요.

    오늘날 여러분께서 목사에게 기대할 것은 소리를 기대하십시오. 주의 말씀을 기대하는 겁니다. 목사가 여러분에게 구원과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거듭나서 세례 받게 되었는데, 어느 목사가 한 것이 아니라 목사의 입에 담긴 소리가 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영혼이 거듭나는 것은 말씀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그래서 실제 중요한 것은 '광야의 외치는 자여'가 아닙니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자여 가로되'가 아니라 "소리여 가로되…" 이런 내용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와 여러분의 형제와 여러분의 부모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면 이번에 말하기를 감추지 마시고 이런 복을 말할 때에는 말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말은 더디해야 되겠지만 복을 비는 말은 그저 많이 말을 해 주어서 그 덕담이 하나님께서 오시는 덕담으로 이용하는 덕담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가시기를 원하는데 중간에 계곡이 있고 산이 있어서 못 가는 이유 하나는 무엇이냐? 그런데 그 계곡과 산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을 뚫을 수 있고 바로 사다리를 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말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뜻과 받을 자의 형편과 중간에 말하는 자의 말이 딱 일치될 때에는 바로 말씀의 빛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그 말씀이 역사를 여러분에게 이룰 줄로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으로 다시 가서 요한복음 11장 한 군데 찾아봅시다. 설에는 덕담하는 날이지요. 설에는 다 덕담하는 날인데 여러분이 가서 만나서 대화를 하다보면 덕담만 오고가는 것이 아니라 윷놀이를 하다가도 악담이 나오고, 또 덕담을 해 주어야 되는 날이니까 다른 골치 아픈 얘기를 안 해야 되는데, 사람이 다 그렇게 살펴가면서 사는 사람만 사는 현실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악담도 나올 수가 있고, 특히 여러분께서 찾아가시면 예수 믿는 이유로 해서 안 믿는 가족들이 의외로 공격을 해 오게 될 것인데 좋은 말로 해 오지 않고 악담으로 해 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성경의 한 사례를 찾아서 여러분을 향하여 악담을 한다 하더라도 그 악담도 덕담되는 그런 내용, 그 악담도 덕담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오늘 지금 찾고자 요한복음 11장 47절에서부터 나오는 말씀을 소개해 드리고, 이번에는 덕담 받아도 덕되고 악담을 들어도 덕되고 하는 설 말(言)을 주고받아서 설 말(言)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설 하루 전 메시지로 이 말씀을 드리게 되는데 요한복음 11장 47절이하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에 한 사람 그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을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11:47-53)

    이 내용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할 때 온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여겼는고 하니 유대인의 왕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호산나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옷을 깔아서 나귀 밑에 깔아드렸고, 그리고 또 종려수를 꺾어서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대 환영을 했지요.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는 자는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라고 예언이 있습니다. 그 예언을 따라서 나귀 새끼를 탔는데도 나귀 새끼가 예수님을 떨어뜨리지 아니하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또 소문도 좋았고 그렇고 하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새 왕이 왔으니 우리는 자유하고 세계 제일의 민족으로 살 것이다." 하고서 대환영을 했습니다. 했는데 그때 그 나라 예루살렘은 어떻게 되어 있었는고 하니 로마에 점령을 당해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집정관이 총독으로 와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옛날 총독부 하듯이 그래서 빌라도가 그 당시 와 있고 등등 할 때이지요.

    그러할 때에 대제사장들과 또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 즉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지도자들이 가만히 모여서 걱정을 합니다. "자, 예수라는 자의 인기가 저리 높으니, 온 백성이 예수를 중심으로 모여드니 로마가 가만있겠느냐? 로마가 우리를 더 공격할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점령당해 있다 하더라도 상당히 자치권(自治權)을 주었는데, 우리에게 재량권을 많이 주었는데 예수가 와서 저렇게 설치고 온 백성이 예수, 예수 하면서 따르게 되면 이제 로마가 완전히 장악해버리면 땅도 소유권이전 명의이전을 해 가버릴 것이고 저희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고 그리고 민족도 다 잡아 죽일 것이 아니냐?" 해서 이제 큰 걱정을 했습니다.

    뭐 예수 개인이 꼭 미워서보다도 이제 우리 죽게 되었다 해서 걱정을 해서 공회로 모입니다. 그래서 염려해서 이 의논 저 의논 한참 하는데, 그 해의 제사장, 그 해의 제사장이라는 말은 돌아가면서 하게 되는데 그 해 시무를 하는 제사장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그해 제사장이 큰 의미가 있지요. 그 해 제사장이 복잡하게 얼키고 설키고 해서 말하는 사람들에게 탁 나타나서 "참 그대들은 뭘 모르는도다. 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에게 유익이 있다면, 한 사람이 죽어서 이 나라가 괜찮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는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민족이 다 살고 한 사람이 죽어서 나라가 이상 없고 빼앗기지 않게 된다면 어느 것이 유익한 줄 그것을 몰라서 그렇게 복잡하게 회의를 하느냐?"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가야바라고 하는 그의 제사장의 입에 담긴 이 말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 그때 이스라엘 민족과 그 나라가 로마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뜻에서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 하나 죽이면 로마로부터 우리는 공격을 받지 않는다 그 뜻에서 말했던 겁니다. 그래서 가야바의 말하는 뜻은 그 뜻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야바의 그 말을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하여 죽어서…"라는 말이 나오니까 "옳거니 말 났다. 말 생겼다. 그렇다.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민족을 위하여 죽고, 흩어진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죽는다" 하면서 십자가에 올라가게 하는 바로 그 길을 바로 가야바가 열었다는데, 하나님이 생각하는 뜻하고 가야바의 뜻하고 전혀 다릅니다. 말의 글자는 같은데 뜻이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백성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고, 가야바의 예수 하나 죽으면 이 민족 육신이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한 가야바와 해석을 바꾸어 말한 하나님이 다른데 하나님이 오해를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요. 다른 뜻이라고 분명히 말해 줍니다. 50절부터 볼까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해에 대 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11:50-52) 해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 가야바가 스스로 함이 아니에요. 본인이 함이 아니에요. 본의(本意)가 아니오 그 뜻입니다. 가야바가 앞에 한 말은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하여 죽으면 민족도 살고 나라도 된다 그 뜻으로 말했습니다. 말 내용은 똑같아요. 글자로 쓰면 말은 똑같아요.

    그런데 이 성경은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뒤에 말하는 것은 한 사람이 죽어서 만 백성의 영혼을 건져내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모을 것이다 라고 하니까 말의 글자는 같은데 뜻은 하나님이 붙잡은 뜻하고 가야바가 붙잡은 뜻하고 같은 겁니까, 다른 겁니까? 성경에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붙잡은 뜻은 가야바의 스스로의 뜻이 아니라 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바꾸어 말하면 가야바의 본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얼마나 말이 필요했으면 예수님을 예루살렘에까지 오게 했으나 십자가에 올릴 수 있는 말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누가 했어요? 그해의 제사장 가야바가 말을 했는데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하여 죽는다 했어요. 그런데 가야바는 무슨 뜻입니까? '우리 유대민족이 살고 예수를 죽이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믿는 백성을 살리고 예수의 이름을 믿는 천국 나라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전혀 내용은 다른데 글자만 똑같이 빼어와서도 사용하셨다 그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가야바의 한 말은 말은 같아도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붙잡은 뜻은 같다고 했습니까, 다르다고 했습니까? 다르다고 했지요. 가야바의 뜻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랬지요. 그 스스로 함이 아니라는 말은 자기가 정신이 없어서 자다가 헛소리하듯 했다는 뜻이 아니고 지금 회의 중에 하는 말입니다. 회의 중에 하는 말인데 이것은 스스로 함이 아니오, 자기 말이 아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붙잡은 것은 말만 뽑았지 뜻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야바와 그 제사장들은 예수 하나 없애버리고 우리 살자 라는 뜻으로 말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말을 붙잡아 왔습니다. 왔지만 그의 악한 뜻은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만큼 소리가 필요하다 그것입니다. 이만큼 말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야바나 혹은 다른 훌륭한 가야바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와서 진정한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은" 이사야서 53장에 말한 대로 "모든 민족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민족을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죽으심이로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다" 했으면 그 제사장들이 예수 잡아죽이려고 하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는다는데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제발 저 빌라도가 죽여주었으면, 제발 저 로마 군대가 와서 죽여주었으면 이렇게 하겠지요. 그런데 가야바의 말을 듣고 저들은 뭡니까? "예수를 죽이기 시작하니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가야바가 말한 그 말의 뜻과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 올라가는 예수님을 올리시는 그 뜻은 전혀 다른데 소리와 말만 뽑아서라도 사용해야하는 하나님의 세계는 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명을 제대로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을 하루 앞두고 여러분에게 목사로서 정말 여러분이 복 받기를 원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은 덕담(德談)을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덕담이 덕될 줄로 믿습니다.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고 부모님들에게 공경하는 말씀들을 드리고 그저 "오래 사십시오, 건강하게 오래 사십시오." 몸 약한 자 있으면 "이번 설을 맞아서 병 대신에 건강으로 바꾸십시오." "염려 마십시오." 하는 말들을 할 때 주께서 절실히 필요한 합당한 자라면, 건강이 합당한 자라면, 위로가 합당한 분이라면, 문제 해결을 위해 염려를 내어보내어야 될 그런 분이라면, 지나치면서 하는 말도 하나님이 가야바의 말 소리까지 뽑아다가 사용하신 것처럼 이웃이 전해주는 덕담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는 놀라운 복이, 오늘 이 메시지를 아멘 하는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오고 가고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를 만나는 가운데 좋은 축복의 말과 덕담만 주고받으면 좋겠으나 그리하지 못할지라도, 여러분이 예수 믿는 연고로 해서 제사지내는데 협조하지 아니하고 바깥에 돈다고 해서 죽일놈 살릴놈 하고 나오거든 그들의 악담이 여러분의 영육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병을 죽이고 내게 있는 가난을 죽이고 내게 역사 하는 귀신을 쫓아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부모에게 찾아갔는데 예수 믿었다고 "저것 내 집에 들여놓지 마라 쫓아내라." 해도 "아버님 안녕하십니까? 오래 사십시오." 하고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쫓아내어라 하거든 속으로 '그 말도 하나님께서 이루실텐데…' 쫓아낸다고 여러분이 그래 쫓겨갑니다 하고 나오지 말고, 그냥 여러분이 들어가면 뭐가 나가겠어요? 내게 역사하는 귀신이 떠나가고 암 덩어리가 쫓겨가고 가난이 쫓겨가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지켜주시기를 원하니 복담도 복되고, 덕담도 덕되고, 악담도 그 말 내용만 뽑아서 많은 사람의 뜻과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하는 뜻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설말 들이 오고가게 되기를, 그리고 그 말들이 행복으로 여러분에게 가득 역사되도록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 많이 하십시오. 말 많이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들 가운데서 좋은 뜻의 말들만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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