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위에서도(요19:25)
  • 조회 수: 210, 2013.06.20 10:56:25
  • 먼 옛날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무에게로 와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주워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는 숲 속의 왕자가 되어 놀았습니다.
    소년은 나무에 기어올라가서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그리고 사과도 따먹고는 했습니다.
    나무와 소년은 가끔 숨바꼭질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소년은 나무 그늘에서 단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를 너무나 사랑했고…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차차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나무를 찾아갔을 때 나무가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기어올라가서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사과도 따먹고 그늘에서 놀면서 즐겁게 지내자."
    "나는 이제 나무에 올라가 놀기에는 너무 커버렸는걸.
    나는 물건을 사고 싶고 신나게 놀고 싶단 말야. 그리고 돈도 필요해. 나에게 돈을 좀 줄 수 없겠니?" 하고 소년이 말했습니다.
     
    나무가 말했습니다.
    "미안해. 나에겐 돈이 없어."
    "내겐 나뭇잎과 사과밖엔 없어. 얘야, 내 사과를 따다가 도회지에서 팔지 그래. 그러면 돈이 생길 거고, 너는 행복해질 거야."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가 사과를 따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나무는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너무나 기뻐서 몸을 흔들며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기어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즐겁게 지내자."
    "나는 나무에 올라가 놀 수 있을 만큼 한가롭지 않단 말야." 하고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소년은 또 말하기를 "내게는 나를 따뜻하게 해 줄 집이 필요해.
    아내도 있어야겠고 어린애들도 있어야겠어.
    그래서 집이 필요하단 말야. 너 나에게 집 하나 마련해 줄 수 없겠니?"
     
    나무가 대답했습니다.
    "나에겐 집이 없단다. 이 숲이 나의 집이야.
    하지만 내 가지들을 베어다가 집을 짓지 그래.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 가지들을 베어서는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해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돌아오자 나무는 말할 수 없이 기뻐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얘야, 이리 와 놀자."
    "나는 이젠 나이가 너무 들고 비참해서 놀 수 가 없어." 소년이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갈 수 있는 배 한 척이 있었으면 좋겠어.
    너 내게 배 한 척 마련해 줄 수 없겠니?
    그럼 내 줄기를 베어다가 배를 만들려무나." 하고 나무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멀리 떠나갈 수 있고…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지만…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소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사과도 없고."
    "이빨이 나빠져서 사과를 먹을 수가 없어." 소년이 말했습니다.
    "내게는 이제 가지도 없으니 네가 그네를 뛸 수도 없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뛰기에는 나는 이제 너무 늙었어." 소년이 말했습니다.
    "내게는 줄기마저 없으니 네가 기어오를 수도 없고…."
    "나는 힘이 없어서 기어오를 수도 없어." 소년이 말했습니다.
    나무가 한숨을 지으며 대답하기를 "미안해, 무언가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이제 내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어. 다만 늙어버린 나무 밑둥 뿐이야. 미안해…."
    "이제 내게 필요한 건 별로 없어. 그냥 앉아서 쉴 조용한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몹시 피곤해…." 소년이 말했습니다.
    "아, 그래" 하며 굽은 몸뚱이를 애써 펴면서 나무가 말했습니다.
    "자, 앉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야. 이리로 와서 앉아. 앉아서 편히 쉬도록 해."
    소년은 나무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내용입니다.
     
    오늘 사람된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는 한 나무가 계시다면 바로 우리의 어버이십니다.
    그분들은 자녀 된 우리에게 주고 또 주어 모든 것을 내어 주어서 이제 당신은 아무 것도 없어도 오히려 행복해 하십니다.
    자식인 내가 행복하고, 자식인 내가 잘되는 일이라면 부모는 그것으로 행복하고 기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사랑 가운데 가장 큰사랑을 찾으라면 그것은 당연히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천사가 땅에 내려와서 찾기를 시작하여 세 가지를 찾았습니다.
    첫째는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쁜 아기의 해맑은 웃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이 세 가지를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께로 가는 사이에 꽃은 시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다 자라서 그 해맑은 웃음은 더 이상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다만 어머니의 그 큰사랑만은 시들거나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말로 표현할 수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의 말대로 '생각의 속도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바로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자식을 위해 아낌없이, 남김없이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고 또 주어 당신의 손에는 아무 것이 없어도 오히려 행복하십니다.
     
     그러나 자식된 우리는 그 사랑을 제대로 알지도, 또 인정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주었기에 이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부모를 거북해 하고, 짐스러워 합니다.
     
    오늘 이러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네 부모를 사랑하라,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 길을 걸어갈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지도자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올리십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된 삶을 위하여 꼭 지켜야 될 것, 열 가지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열 가지 계명을 두 돌판에 새겨서 주셨습니다.
    결코 잊지 말고 꼭 지키라고 이 계명의 말씀만은 돌판에다 새겨 주셨습니다.
    한 편의 돌판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지켜야 할 계명이었고, 또 한편의 돌판은 사람들을 향하여 지켜야 할 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향하여 지켜야 될 첫 번째 계명의 자리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첫 번째 일은 다름 아닌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혜의 책인 잠언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하여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하여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로 하여금,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실까요?
     
    첫째는 부모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권위자이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는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했습니다.
    부모에 의해서 자녀인 나의 육체가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부분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한다고 할 때, 나의 부모에게 문제가 많기 때문에 나는 순종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아닙니다.
    나의 부모가 내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분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 부모가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내 부모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부모를 내 부모 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오늘 내가 여기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부모를 존경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권위들을 통하여 우리를 성숙시키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부모나 그 밖의 모든 권위들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시켜 주시고 있습니다.
    벧전 2:18 이하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복종하되..." 그리고 나서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직장에서 보면 까다로운 분들이 있습니다.
    또 부모나 시부모가 정말 까다로울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까다로운 분들에까지도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왜요?
    그 다음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애매한 고난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는 것이 우리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정말 까다로운 부모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부모님을 통하여 나의 인격을 성숙시켜 가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망치와 어머니라는 못을 사용해서 자녀인 나를 깎아내고 계십니다.
    이 아픔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없습니다.
    내게 부모를 주셔서 나를 만드시는 하나님, 나를 하나의 보배로운 인격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 까다로운 부모의 손길과 음성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부모를 잘 섬겨야 하는 이유는 우리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4:1은 "아이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 같은 장 3절로 내려가 보면 솔로몬은 감상에 젖어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나도 내 어머니의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고 고백합니다.
    "나도 한 때는 아들이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나는 부모에게 자식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나 역시 또 부모가 되어 자녀를 기르게 됩니다.
    내가 부모를 대하며 행하는 일거수 일투족, 우리 삶의 행동, 우리의 태도는 그대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본보기로 남기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나의 부모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가는 바로 내 자녀들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고려장이 한창일 때의 일이었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니를 산 속에 내다 버리는데 어린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 나섰습니다.
    깊은 산중에 어머니를 내려다 놓고 돌아서려는데 따라간 어린 아들이 남겨 둔 지게를 챙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얘야, 그 지게는 왜 챙기니?"
    "아버지, 저도 나중에 아버지를 내다 버릴 때, 이 지게가 필요할 것 같았어요!"
    여러분, 자식은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닮습니다.
    여러분이 노부모에게 한 것을 자식은 그대로 보고 그대로 따라 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삶을 통하여 몇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누가복음 2:51에 보면, 소년 예수에서 청년 예수로 성장해 가는 주님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나사렛에서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했습니다.
    본래 원문에는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여 받드셨다"는 의미로 쓰여져 있습니다.
    소년 예수, 청년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에게 스스로 순종하시고 받들어 모셨습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아버지 요셉은 일찍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가 시작될 때까지 목수의 일을 하시면서 육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봉양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의 효의 모습은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쓴잔을 마십니다.
    죄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주시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런데 마지막 그 고통의 순간에 더욱 주님의 마음에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주님은 그 고통의 순간에 어머니 마리아의 노후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
    "요한아 보아라, 어머니시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신 주님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우리의 부모님에게 어떻게 해 드려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먼저,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할 수 있는 첫 번째 효도는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왜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육신의 동생들에게 부탁하시지 않고 제자 요한에게 부탁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영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제자 요한이 가장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 있었지만 아직 그들은 신앙적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어머니를 가장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와 마리아는 좋은 친구 관계였습니다.
    그랬기에 노후의 어머니께서 가장 마음 편하게 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23: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중에 가장 첫째가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살과 뼈를 깎아서 낳은 자식을  손발이 다 닳도록 키워주었는데 부모들이 왜 그 자식과  같이 살기를 싫어합니까?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 나이 많은 노모를 둔 형제가 살았습니다. 형은 생활이  넉넉했으나 동생은 가난했습니다.
    형은 어머니를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항상 어머니를 극진히 잘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작은 아들네만 가시면 큰아들 집으로 오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아들이 그 까닭은 어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하시는 말이「옷과 음식이야 너희네 만 할까마는 작은 아들네만 가면 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언제나 등을 긁어주는데 그게 어찌나 시원한지 그래서 오기가 싫구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어머니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은 큰 아들네의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보다도 작은 아들네의 사랑과 정성이었습니다.
    늙은  어머니에게 좋은 옷도, 맛있는 음식도, 풍성한 용돈도, 선물도 필요하시지만 더  좋은 것은 몸에와 닿는 자식의 손길에서 따사로운 정감을 더 느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모님의 실수를 용납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부모님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실수도 있고 허물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 효도는 부모님의 실수를 이해하고 허물을 덮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부모님이 평생동안 살아온 그 문화적인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창20:9절 이하에는 노아가 어느 날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취하여서 하체를 드러내는 실수를 하였습니다.  
    노아의 아들 중에 함은 아버지의 실수를 그냥 넘기지 아니하고 흉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을 가지고 뒷걸음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드렸습니다.
    그들의 행동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으려는 깊은 배려가 담겨 있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들 가운데 누구를 축복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셈과 야벳을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를 향한 최고의 존칭어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
    아니 어떻게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희랍어는 우리가 흔히 가벼이 부르는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희랍어 '그나일'이라고 하는 이 말은 본래 아랍어 '그낭'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 높고 귀한 지체의 귀부인을 향해 사용되던 존칭어였습니다.
    고대 문서를 읽어보면 왕후에게 사용되던 존칭이 바로 이 단어였습니다.
    유명한 황제 안토니우스가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한 첫마디가 '여인(구나이)이시여'였습니다.
     
    지금 주님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부모님에게 구체적인 필요를 공급해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위해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는 네 어머니로 모셔달라는 뜻입니다.
    자기 어머니의 노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심으로써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의 필요를 채워주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얼마나 신실하게 우리 부모들이 필요로 하는 의식주를 공급하고 있습니까?
    의식주만 아니라 정서적 필요도 공급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부모들은 늙어가면서 자녀들의 손길과 자녀들의 음성을 기다리게 됩니다.
    자주 찾아 뵙고 안아드리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지 모릅니다.
    로스엔젤레스에 사는 어떤 노인이 몇 년 전에 이런 광고 하나를 냈습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시는 분에게는 1불을?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고독한 요청입니까?
    이렇게 늙어 가는 우리 부모들의 노후에 육적인 정서적인 필요를 공급하는 일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입니까?
     
    자녀된 우리는 우리의 부모들이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를 잘 보살펴 드려서 불편함이 없게 해 드려야 합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부모님을 생각하고 애굽으로 모셨습니다.
     
    세상 만사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곧 떠나갈 몸입니다.
    우리의 부모님도 때가 되면 떠나시게 되니 생존해 계실 때에 효도를 잘해야 합니다.
    효도는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부모님은 기다려 주시지 않습니다.
    철들어 보니 벌써 부모님은 떠나고 계시지 않아 그때는 가슴 쳐 후회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살아 계실 때 잘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럼, 지금 효도를 하고는 싶은데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신 분은 어떻게 합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변의 외롭고 쓸쓸한 분들을 내 부모님처럼 존경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연세 드신 어른들을 귀히 여기고, 저들의 필요를 채워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비젼 가운데는 이 꿈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를 잘 섬기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바로 서는 것, 그것이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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