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요 19:25-27)
  • 조회 수: 250, 2013.06.20 10:57:59
  • 이 세상에서 위대하게 살다간 사람들이 죽으면서 남긴 말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말들을 들어보면 대개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죽으면서 "프랑스, 군
    대, 조세핀"이라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조세핀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의 
    이혼한 아내였습니다. 시인 괴테는 "창문을 열어다오. 빛을, 빛을 . . ." 하면
    서 죽었고, 베토벤은 "친구여 희극은 끝났다, 박수를!" 이라고 말하며 죽었다
    고 합니다.

    인간이란 세상을 떠날 때 평소 그가 생각하고 관심을 가졌던 것을 말
    하고 죽습니다. 역사를 움직여 간 위인들은 세상을 떠나면서 위대한 말과 사
    상을 남기고, 평범한 사람들은 가족에 대한 유언을 남겨놓고 떠나기도 합니
    다. 그러기에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세상의 위인들의 죽음을 감히 흉내
    낼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마지막 장면은 어떠했는지가 궁금합니다. 
    아마 성경의 내용을 잘 모르시는 분은 그 마지막 순간이 매우 심오했을 것
    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시는 장면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운명하시면서 자기의 모친에 대한 인간적인 사
    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크고 위대하신 분이 우주의 대 진리를 설
    파하고 세상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모친의 노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시는 말씀을 남기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진리 가
    운데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부모공경의 도를 깨닫게 됩니다.

    본래 우리 나라는 동방예의지국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인간의 도
    리요 나라의 자랑으로 삼아왔습니다만 오늘날은 이 미풍양속이 무너져 내리
    는 것 같아 안타깝기가 짝이 없습니다. 아들이 늙으신 부모님을 학대하고 때
    리고 심지어는 살해하는가 하면 부모 또한 자식을 원수처럼 때려죽이거나 
    굶겨 죽였다는 보도를 때때로 접하게 됩니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
    의 마음이 얼마나 섬짓해 지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도덕과 윤리
    가 무섭게 붕괴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이제는 이 나라가 폐륜국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변해 가는 사회풍조 속에서 부모공경의 도를 가르치는 기독교
    라도 제 역할을 감당하면서 가정의 도덕적 해이현상을 바로 잡아나가야 할
    텐데 우리의 사회적 영향력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아쉽기만 합
    니다. 복음과 함께 서구사회의 개인주의 문화가 무분별하게 뒤섞여 들어옴으
    로써 부모공경의 도가 약화되고 훼손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예수님의 부모공경의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가 
    폐륜화 되어 가는 우리 가정에 복음적 효사상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
    니다.

    1. 예수는 모친을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겼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열두 제자를 택하셔서 그들과 함께 다
    니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제자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예수의 주변에는 많은 무리들이 따랐지만 주님께서 선택하신 제자는 열두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
    보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도, 최후의 시간
    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들을 데려가심으로 그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이 세 명의 제자들은 후에 그 사랑에 
    보응하듯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후에도 눈부신 활동을 
    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야고보는 일찍이 순
    교의 잔을 마셨으며 요한은 마지막까지 남아 네로 황제의 무서운 박해 속에
    서도 교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 위대한 제자요 사도들이 되었습니
    다.

    그런데 이들 셋 중에 누가 주님으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받았는지를 
    살펴보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수제자 베드로가 
    가장 큰 사랑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는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
    음 13장 21절 이하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께서 제
    자들을 향하여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절)고 하시니까 제자들이 깜
    짝 놀랐습니다. 혹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가 두려워하면서 감히 주께 그가 
    누구인지 묻지도 못하고 무거운 적막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들의 직업과 가족
    을 다 버리고 3년 동안이나 함께 동거동락했던 스승 예수를 자기들 중 한 
    사람이 돈 때문에 배반을 하게 된다니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혹시 자신이 그 사람은 아닌지 근심하면서 선뜻 그 말씀을 
    받아 자신있게 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의 품에 의지하고 누워있던 
    제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특별히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
    다. 그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 
    13:23)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다 큰 사
    람이 예수의 품에 누워 있었겠습니까? 그때 베드로가 예수의 품에 누워서 
    총애를 받던 그 제자에게 머릿짓을 하며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했습니
    다. 수제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베드로도 감히 예수께 묻지 못한 그것을 이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는 물어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주님께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있었고 그의 권위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서 이 품에 누워있는 제
    자를 가장 사랑하셨음이 분명한데 그가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
    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시면서 장차 그
    가 어떠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인지를 암시하셨는데 그 때 베드로는 예수의 
    품에 누워 사랑을 받던 그 제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를 물었습니다(요 
    21:21).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
    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주
    님의 말씀대로 요한은 자기의 동생 야고보나 수제자 베드로보다 더 오래 살
    면서 초대교회를 이끌게 되었고 말세의 환상을 보며 계시록을 기록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의 사도로 알려진 요한은 자신이 쓴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주님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던 제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밝히지 않고 그냥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라는 익명을 사용함
    으로써 극도로 겸손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그 사랑받
    는 제자가 바로 요한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듯 어느 누구보다도 요한을 사랑하셨던 예수는 십자가에서 운명
    하시기 직전, 자기의 어머니를 그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예수에게는 일곱 명
    이나 되는 동생들이 있었고 그의 수제자 베드로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어머
    니 마리아를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가장 신뢰할만한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요한은 주님께 왜 이렇게 두터운 신임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마치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것처럼 요한도 주님의 마음에 꼭 든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요한이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제나 주님의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현장에 다른 제자들은 아
    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들 따르던 여인들마저 "멀
    리서 바라보고"(마 27:55) 있었는데 요한은 십자가 옆에 서 있었습니다. 이렇
    게 예수의 곁에 있는 사람! 그를 주님은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곁에 있어야 합니다. 항상 주님의 곁에 있으면서 주님
    이 원하시는 바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 해도 주
    님의 곁에 있지 않고서는 주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 요한처럼 주님의 곁에 있으면서 사랑과 인정을 받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예수의 죽음 앞에 서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25절)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짧은 표
    현 속에서 마리아의 담대한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아들이 그 무서운 
    십자가의 형틀에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어머니가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그 순간에 억장이 무너지는 
    비통함 가운데 정신을 잃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대범한 어머니라 할지라도 
    아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여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십자가 곁에 서서 자기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예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과 아
    울러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어느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
    문입니다.

    사실 어머니의 사랑처럼 숭고한 사랑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어머
    니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자식의 곁에 있습니다. 잘 나갈 때는 들끓
    던 친구들도 어려움이 닥치면 모두가 다 떠나가고 맙니다. 아내도 남편도 극
    한 상황에서는 다 달아나고 맙니다. 그러나 자식의 주변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머니만큼은 끝까지 곁에 계시는 법입니다. 어머니들은 정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한 분들입니다.

    제가 군목으로 있을 때 지뢰밭에 잘못 들어갔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
    는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님들이 장례식에 와서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게 되면 실신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기 자식의 시체 앞에서 넋
    을 잃지 않는 여인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십자가 밑에 쓰러져 있지도 않았고 정
    신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위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았던 
    그 의연한 아들의 죽음을 그녀는 굳굳이 서서 지켜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녀
    가 유난히 강한 심장의 소유자였다든지 배짱이 있어서가 아니라 왜 예수께
    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하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녀는 예수가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슬픔에 휩싸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
    면서 예수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
    님의 명령을 따라 십자가의 고통을 다 짊어지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최후까지 굳굳하게 서서 응원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과연 예수의 모친이 될
    만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어머니들도 자식들의 기쁨과 슬픔의 현장에 함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자녀들이 고난과 절망의 자리에 처하게 되면 어머니들
    은 그 누구보다도 더욱 처절한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어머니들은 자녀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자녀들이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고 격려할 수 있
    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 부모들은 자식들이 고통하는 현장에서 용기와 
    희망을 주는 자리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 어머니는 정말 공경을 
    받을만한 어머니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모두가 다 공경을 받을 수 있는 믿음
    의 어머니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의 최후는 부모공경으로 마쳤습니다.

    험악한 십자가의 죽음의 현장에서 예수의 모자(母子)가 보여주는 최
    후의 장면은 너무나 인간적인 감동이 넘칩니다.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
    면서 통곡하고 절규하므로 고통을 배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연하게 거룩한 
    사명의 길을 가는 아들을 성원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의 노후를 자기
    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가장 숭고하
    고 절제된 형태의 모자간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머니로서의 인간적인 
    슬픔을 믿음으로 억제하고 있는 모친을 보면서 예수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
    이니이다"(26절)라고 위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모든 고통을 
    이겨나가는 자랑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슬픔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그
    리고 사랑하는 제자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27절)고 하였습니다. 그냥 운
    명하셨더라면 동생들이 모셨을텐데 아들을 잃은 슬픔은 오직 믿음으로만 치
    유될 수 있기에 예수는 동생들보다 더 믿음이 돈독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
    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예수의 부모공
    경의 효심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거룩
    한 영적인 사명을 완수하면서도 인간적인 효의 도리를 잊지 않고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요한은 그때부터 예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27절).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요한은 예수의 부탁을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 노
    인을 집에 모시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의 부모라 할지라도 공양
    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는 스승의 노모를 모신다
    는 것은 보통 정성으로는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는 제자 
    요한을 신임하였고 요한 또한 사제간의 절개를 굳게 지키었습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주님이 신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가장 중요한 
    일까지도 우리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에 우리는 예수의 효행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임종을 맞으시면서 어떤 거창한 사상이나 종교강론을 하시지 않고 부모공경
    의 도를 몸소 보여주시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노부모님들을 잘 모셔야 합니다. 자기 집에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즐겁고 편안한 노후가 되시도록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
    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바른 신앙의 모습이자 효의 도리입니
    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 신앙인들이 솔선수범하므로 
    무너져 가는 이 나라의 가정윤리를 바로 세워나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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