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향을 찾는 사람들(히11:13-16)
  • 조회 수: 154, 2013.08.04 16:11:40
  •  20세기 미국 최고의 작가라고 불리우는 ‘토마스 울프’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가리」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이 책 속에서 그는 자기 고향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 고향은 이미 너무도 황폐해져 버려서 아예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어 버렸다. 이제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내 고향은 보이는 지도로도 찾아갈 수가 없고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탄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더 넓게 보자면, 과연 나 혼자만 고향을 잃은 자인가? 우리 모든 인간은 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게 묻고 있습니다. ‘존 밀턴’이라는 영국의 시인은 「실락원」이라고 하는 그의 책 속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된 이후로 모든 인간들의 마음 속에는 에덴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 다시 말해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명절을 맞이하면 고향가는 긴 행렬을 시작합니다. 수백만대의 차량들이 고향을 찾아 간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고속도로는 막히고 국도도 체증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을 해서 전용 차선제를 확대하고 카풀제를 이용해서 엄청나게 밀리는 고향길을 뚫어보겠다고 하는 시도를 합니다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가다 보니  그러한 조치들이 별 무신통인 것 같습니다. 고향가는 길이 고생길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밤잠을 설쳐가며 악착같이 찾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고향에 찾아가서 사랑하는 부모님들을 만나고 조상들을 뵙는 일이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그리던 고향에 도착하게 되면, 그 고향이란 우리가 객지에서 그리워하던 어릴 때의 고향이 아닙니다. 옛날의 그 시냇가, 그 아름다운 들판, 그 산은 이미 옛날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그렇게  커 보이고 좋았던 내 집도 조그마한 오두막일 뿐이요, 즐겁게 놀았던 골목길도 없어진지 오래고, 또 다정했던 친구도 온 데 간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아가는 자의 마음은 하나같이 실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하긴 이나마 부서진 고향이라도 갈 수 있으면 괜찮겠지만 그나마 고향도 못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실향민’이라고 말합니다. 저 북한 땅에 고향을 둔 사람은 찾아 갈 곳이 없습니다. 그저 휴전선의 망향탑에서 제사를 지내고 멍하니 이북을 쳐다보다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가 봐야 별 것 없는, 이미 옛 모습이 다 없어진 고향인데 사람들은 그 고향에 대해서 잊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많은 사람들이 연구 했습니다. 그 결과에 의하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맨 먼저는 ‘우리 조상들이 옛날부터 살아왔고, 그들의 무덤이 있고, 지금도 연로하신 부모님이 살아계시니까 그들을 만나기 위하여 찾아간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때문에 고향으로 몰려 갑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를 살펴보면 그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고향을 떠나서 정처없이 객지에서 살다가 이제 그 외로운 마음을 달래 보려고 간다는 것입니다. 고향에 가서야 내가 어디서 뚝 떨어져 나온 외로운 돌연변이가 아니고 나에게도 부모가 있고 조상이 있다고 하는, 자신이 역사적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고향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전문용어로는 ‘공동체적 정서의 도가니가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내게 공동체적 정서를 확인시켜 주고 내 뿌리를 인식하게 만들어 주기에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 수고를 아끼지 않고 달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연구해 보면 사실 고향찾는 마음은 과거에 내가 태어났던 고향을 찾는 그러한 마음이 아니고, 앞으로 내가 영원히 머물고자 하는 그러한 장소를 찾아 헤매는 마음이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투사되어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는 습관이란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공통된 현상이고 또한 이 고향을 찾는 마음은 하나의 신앙적인 양태를 띄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문화인류학의 결론입니다. 종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내가 마지막으로 가야할 종착지, 그 화이널 골(final goal)을 향한 마음이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내가 묻힐 곳을 찾는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나이가 들게 되면 ‘내 여생을 고향에서 마쳐야 되겠다’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젊을 때보다 나이를 먹어서 더욱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해서 고향을 찾는 마음은 ‘영원에 대한 nostalgia’입니다. 영원에 대한 동경, 영원에 대한 향수! 이것이 바로 고향을 찾는 마음의 본질적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면서 한 마디로 그것을 14절에 요약을 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우리 조상들은본향을 찾으며 살아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향 떠난 사람으로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일생을 살아온 것이 우리 선조들의 삶의 양태였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향을 떠난 후 아직 정착하지 못한 삶을 살아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고향을 떠났을까? 그 이유를 찾아 보면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떠나면 네게 후손과 땅을 주리라” 하는 약속을 믿고 떠납니다. 그런데 고향은 떠났지만 약속된 땅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정착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와중에서 그들은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떠한 고향을 그리워했는가 하면 본문에 고향의 종류를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먼저 15절 말씀에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나온 바 본향’이 있다. 출생지 본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말하자면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곳이 바로, 그의 나온 바 본향이 됩니다. 그의 어릴  때의 추억과 꿈이 묻어 있는 곳, 그가 태어난 곳, 바로 그러한 나온 바 본향이 있는데 그 본향의 성격을 다음 구절에 바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돌아가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랬습니다. 가고자 하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고향이다, 명절이 되면 생각나는 고향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고향, 그러한 고향을 믿음의 조상들이 그리워하고 사랑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한 고향이 아닌 또 다른 의미의 고향을 찾았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더 나은 본향, 내가 태어난 출생지, 과거적 의미의 고향보다 차원이 다른 새로운 의미의 본향! 그들은 그것을 찾아서 헤맸다는 말입니다. 과거적 의미의 고향이 아닌 미래적 의미의 고향! 내가 영원히 정착하여 편히 쉬고 싶은 그러한 의미의 고향을 그들은 찾았던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고향이 어디 있을까? 태어난 고향이 아닌 미래적 고향이 있다니... 오늘 본문은 그 미래적 고향의 위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하늘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하늘에 이러한 고향이 있다. 이 지상과는 다른, 하나님 아버지가 기다리시는 그 영원한 고향이 하늘나라에 있다. 그리고 조상들은 새로운 의미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이러한 차원높은 고향을 사모한 것은 아닙니다. 그도 처음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고향을 출발해 나올 때는 내가 버린 갈대아 우르보다 더 기름지고 넓은 초원을 사모하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랜동안 객지 생활을 하면서 하나하나 깨닫게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왜 나를 고향으로부터 떠나라 하셨는가? 왜 떠나라 하셨고, 땅은 왜 주시지 않는 것일까? 위로도 해 주시고, 응답도 주고 언제나 부르면 대답하는 하나님이 어째서 땅 문제에 관한 한 그렇게도 응답이 없을까?’ 수없이 묻고 또 묻는 가운데서 그는 몇 가지 대답을 도출해 냅니다. 먼저는 자기의 고향은 더럽고 우상숭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곳으로부터 자기를 격리시켜서 정결케 하고자 하여 고향을 떠나라 했고, 또한 고향이란 항상 의지할 곳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의지할 것을 다 끊고 객지에서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라 했고, 또한 이렇게 방랑하며 사는 동안에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라고 방랑의 생활을 허락하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렇게 처음에 얻기를 원했던 그러한 땅, 지상의 기름진 그 땅에 대한 소원을 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소원이 무의미한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디에 완전한 고향이 있을까? 내가 떠나온 고향은 더럽고 우상숭배하는 곳이었고 정 좀 붙여보려고 하는 모든 땅은 전부가 다 정 붙일 수 없는 곳이었다’ 하는 것을 확인 하면서 이제 그의 소원이 바뀌어집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내게 주려고 했던 땅은 이 지상의 어느 지점을 포함한 그런 의미의 땅일까?’ 그런 의미의 땅이 아니고 더 차원 높은, 바로 이 땅과 상관없는 영원한 고향을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것임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하늘 나라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의 고향이 내가 받아야 할, 가야 할 진정한 목표점인 것을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서울도 있고 경상도, 전라도.... 많을 줄로 압니다. 그 고향이란 오늘 본문 말씀대로 생각하면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요, 지금이라도 차 타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곳이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아님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그리워하는 고향, 내 영혼이 사모하는 고향, 영원히 안식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고향이란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우리 아버지가 기다려 주시고 우리에게 허락한 새로운 차원의 고향이 있임을 기억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럼 저 하늘 나라의, 내가 돌아갈 영원한 고향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자의 이 땅에서의 모습은 어떻해야 하는가 본문은 설명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이 땅에서 살았다고 말합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란 의미는 영원히 이곳에 살지 않는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이곳에 두지 않고 다른 곳에 둔 것이 외국인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은 분명하게 떠날 것이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 땅은 우리에게 낯선 땅이요, 우리는 외국인일 뿐입니다. 동시에 이 외국인이란 말의 의미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하는 그런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외국어를 잘한다고 해도 본토 사람하고 붙여 놓으면 아마 상대도 안 될 것입니다.

       국제 결혼한 어느 분이 제게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 분이 영어를 워낙 잘해서 외국인 남자하고 삽니다만, 남편의 옛날 동창들을 만나서 저희들끼리 떠드는 것을 들으면 한 마디도 못알아 듣겠다고 합니다. 전혀 못 알아듣겠더라고 말하면서 국제 결혼에 대한 한계를 느낀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위로를 한 적이 있는데 의사소통 정도는 된다지만 깊이 있게는 안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외국어가 아니라 같은 말을 쓰고 똑같이 한 솥밥을 먹고 살아도, 정신적인 고향이 다른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대화의 단절이 있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면 남편, 아내면 아내만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에게 제가 늘 마음을 주고 아파하고 있는데, 그런 분들에게 가끔 묻습니다.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십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렇게 물으면 “우리 부부요? 잘 지냅니다. 사이야 좋죠, 뭐! 그런데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는 벽이 느껴지는데 이럴 때는 도무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꽉 막힌 느낌이 들어요. 어느 순간엔가는 말이 안통합니다.” 그렇게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상한 것 같습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이 땅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과 저 하늘에 내가 가야 할 영원한 고향이 있다고 믿는 사람! 이 두 사람이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이 밥을 먹고 살아도 분명히 그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의 단절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이 복음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보십시요, 뭐라고 합니까? “그래? 너나 믿어!” 그럽니다. 왜 똑같은 언어를 쓰는 데 못 알아듣는 것입니까? 외국인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 권모술수와 불의와 약육강식의 철학 속에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진리를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러는 가운데서 ‘내 마음과 같지 않다, 진리대로 살면 손해 본다, 어찌 이렇게 세상이 험하냐?’ 하는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나그네의 마음이고, 나그네의 설움이고, 의미의 단절에 대한 절망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있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외국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단절을 세상에서 느껴보셨습니까? 이것을 느껴야 정상인데요. 신학적으로 말해서 중생한 사람들은 무엇이 바뀌는가 하면 소망이 바뀝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거듭나면 얼굴에 웃음이 생기고 성격이 바뀐다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성격이 바뀌는 것이 중생이 아닙니다. 소망이 바뀌는 것이요, 바라는 바가 바뀌는 것입니다. 중생하기 전에는 세상적인 것을 바랍니다. 말이야 고상하게 하지만 결국 캐보고 캐보고 또 캐보면 세상적인 그 무엇을 가지고 끙끙거리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다음에는 영원한 가치의 것, 하늘 나라에 있는 것, 내 본향에 있는 그 무엇을 사모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그리스도인, 예수 바르게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 대하여 어느 부분에서는 단절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삶 속에서 단절을 느끼고 인생이 고달플수록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했는가 13절에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세상이 힘들어지고 어려울수록 ‘세상으로 돌아가야 겠다, 뒤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러한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그 본향을 사모했고 멀리서 보고 환영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 내가 가야할 영원한 나라! 그 나라에 어서 갔으면 좋겠다며 미래의 고향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강렬하게 그들 가슴을 불태웠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태어난 고향에도 가지 말란 말이냐? 그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진리 위에 서서 거친 세상을 살아가게 될 때에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은 안된다 그런 얘기입니다. 오히려 그 과거적 생활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앞에 있는 고향, 가야할 그 곳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고 환영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다 보면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아예 예수를 몰랐었더라면!” 그러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과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인생의 자랑거리를 다 배설물로 여겼노라.’ 과거에 대해 미련이 많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과거를 정리해 보세요! 남은 것이 없습니다. 죄 지은 것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본향을 향해 나가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몇 번의 전환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 몇 번의 전환점의 마지막 점을 The Point of No  Return이라고 합니다. 포인트 오브 노 리턴! 돌아갈 수 없는 점, 불환지점이라고도 합니다. 이제 돌아가면 손해요, 앞으로 가는 것이 유익인 그 점이 인생에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기로 결정하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제는 세상,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앞에 있는 고향을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상한 결심을 가지고 ‘하나님만 믿고 나가면 만사형통 하겠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13절 상반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믿음 안에서 죽고 성취를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약속 대신에 형통과 축복이란 말을 넣어서 읽어보시면 그 뜻이 명백해지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축복과 형통함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고생하면서,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간절히 사모하고 나가는 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들의 삶의 형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들, 참 힘들게도 살았다. 그렇게 살아 뭐하나, 헛수고했구만!” 여러분, 그렇게 말할 것입니까? 결론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16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렇게 사모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영원한 하늘 나라를 허락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다 복을 바라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복을 좋아합니까? 이 세상의 형통함이 복이 아니란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형통함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떠나가야 할 곳입니다. 진정한 복이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 그 곳에서 받는 복, 그 복이 진짜 아니겠습니까? 한 평생 부귀와 영화와 모든 것을 다 누린다고 해도 돌아갈 영혼의 본향이 없는 자는 그야말로 비참한 생임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명절이면 또 고향가는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돌아갈 영원한 고향을 가지고 있을까요? 여러분, 그 행렬을 보면서 이것을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낮에 재미있게 놀다가 어두움이 깔리면 돌아갈 집이 없는 고아같은 인생이 많습니다. 낮에 소꿉 놀이 할 때 왕노릇하면 뭐합니까? 밤에 갈 데가 없는데요. 비록 낮에 소꿉장난하고 놀때는 거지 노릇을 했어도 저녁이 되고 불이 켜질 때 나를 부르는 곳이 있고 “아빠! 엄마!” 부르며 돌아갈 집이 있는 아이! 이 아이가 진정 행복한 아이입니다. 우리도 이제 명절을 맞으면 고향으로 갈 것입니다. 나아온 바 고향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깊은 의미에서 영원한 고향을 찾아가는 순례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향을 찾아 방문하게 될 때에 고향에서는 누군가가 우리를 맞아줄 것입니다. 아마 늙으신 부모님이나 초라하게 변해 버린 소수의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삶을 마치고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생을 마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천군천사와 함께, 많은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마음, 영원한 고향을 향해 달려가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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