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에게 남겨 줄 것(수 4:1-14)
  • 조회 수: 139, 2013.11.10 19:56:54
  • 유대인의 탈무드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세 시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살면서 삶의 성숙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 시기의 삶에 대해 흥미 있게 말했습니다. “소년기에 우리는 부모를 위해 살고, 청년기에는 자신을 위해 살다가, 장년기에는 자식을 위해 산다”고 했습니다.

    “소년기에 부모를 위해 산다”는 말이 얼른 납득이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녀들의 사는 모습을 한 번 잘 살펴보세요. 우리 자녀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하나 해 놓고도 부모를 위해서 큰 공로를 세운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은 쉴새없이 부모의 관심을 끌려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끊임없이 그들의 시선을 던집니다. 소년기에 우리는 부모를 위해 살다가, 청년기에는 그 초점이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다가 장년기가 되면 우리는 모두가 자식을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을 긍정하면서도 막상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부딪치면 철학의 빈곤을 느낍니다. 불행한 것은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녀교육 문제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놀랍게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원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녀교육에 있어서 세계 어느 민족보다 놀라운 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도 많이 했고, 나쁜 일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상급을 주시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때리시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다른 민족들은 소외시키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지내던 역사적 경험들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그 사건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역사라고 넘겨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 선택받은 백성들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전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세계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경이요, 기적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많이 잔인할 정도의 역경에 시달려 왔습니까? 
    이와 같은 역사적인 비극에도 불구하고 끈질지게 버티면서 그들의 자녀를 훌륭하게 길러내서 지금도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인물을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 배출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떤 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렇게 놀라운 민족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한 역사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핏줄 속에는 어떤 다른 민족이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하나의 무서운 정열이 흐르고 있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민족사에 나타난 이 정열을 두 개의 수레바퀴로 비유했는데, 한 수레바퀴는 교육이고 또 한 수레바퀴는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육에 대한 정열과 신앙에 대한 정열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교육에 대한 정열과 신앙에 대한 정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어떠했습니까?
    한 교육학자는 교육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교육받을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상징적 도구의 활용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일관성 있게 반복하여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 주신 말씀에 교육에 필요한 효과적인 요소 세 가지가 다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기회를 사용해서 자녀를 교육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모든 기회를 활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면에서 천재적인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모든 삶이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육의 기회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명절이 되면 좀 편히 쉬면서 늦게까지 잠을 자고, 그렇지 아니면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명절을 소중한 자녀 교육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가령 장막절 같은 명절에는 자녀들을 데리고 나가서 들판에 천막을 쳤습니다. 이것은 물론 귀찮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무엇 때문에 이 좋은 명절에 이런 괴로운 일을 해야 합니까?”하며 부모에게 항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얘들아, 옛날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이런 천막을 치고 이 천막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단다” 했습니다.

    또 유월절이 되면 한밤중에 곤히 잠들어 있는 자녀를 깨웁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을 깨우면 얼마나 짜증이 납니까? 그러면 잠자던 자녀들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서 짜증스럽게 말합니다. “아버지, 왜 이렇게 잠을 깨우면서 괴롭히세요?”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얘들아, 옛날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오랜 세월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 땅을 떠날 때 급하게 한밤중에 온 백성을 깨워 허리띠를 띠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유를 얻기 위해서 애굽을 떠났단다”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명절은 늦잠 자고 놀러 다니는 날이 아니라 가르침의 기회였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적으로 요단을 건너갔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 여호수아는 아주 중대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예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서.”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람을 뽑아서 열두 개의 돌로 기념비를 세우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이렇게 대답하라” 했습니다.

    이제 9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고생스럽게, 그러면서도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후에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내쉰 것이 아니라 이런 고생 속에서의 그들의 소중한 경험을 나중에 그 자녀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19~20절 말씀을 보세요.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 치매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는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제사장들의 발이 섰던 그 장소에 세웠고, 다른 하나는 길갈이라는 안전지대에 도착해서 열두 돌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21절 이하를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하라”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과거에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난날에 고생한 것을 자녀들에게 알리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이 고생스러운 일들을 통해서 얻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소중한 교훈을 자녀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안전지대에 도착해서 이제 살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교훈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기념비 하나를 세우고 “후일에 네 자손이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삶의 모든 기회를 자녀들을 교육하는 기회로 활용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거든.” 
    이 말씀은 출애굽기 12장 25~27절에도 나타납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그들은 유월절 예식을 단순히 의식을 위한 예식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자손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느 순간도 교육의 기회로 삼지 않고 그냥 넘기는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육은 학교에서 시키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부모가 교육열이 높은 것까지는 좋은데, 여기서 오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많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닙니까? 
    우리 자녀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곳은 가정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자녀의 최고의 교사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교실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부모가 자녀와 함께 삶을 나누는 이 모든 기회를 통해서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부모의 행동, 부모의 삶의 모습, 부모의 삶에 대한 태도가 아들과 딸에게 어떤 교육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열에서 다시 배워야겠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기회가 교육이었습니다. 명절도, 예식도, 행사도, 프로그램도, 자녀들과 즐기는 시간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바로 교육의 기회였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민족은 상징을 사용하여 자녀들을 교육했습니다. 
    우리는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이 더 분명하게 그 인상을 마음속에 새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교육기재를 활용했습니까? 그들은 요단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귀로만 전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후일에 자녀들이 “아버지, 이게 무슨 뜻이에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징적인 교육의 기재를 활용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자녀교육에 대해서 “내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돈을 주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라고 말씀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가 바로 자녀의 교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들과 얼마나 시간을 보내고,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관성 있게 자녀를 교육했습니다. 
    교육은 그 가르침이 일관성이 있을 때 효과가 증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학자들은 교육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반복의 원리’라고 합니다. 중요한 교훈은 계속 반복되어야 합니다.
    설교자들도 설교의 중요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반복 교육의 원리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 중에 듣던 말씀이 또 나오면 ‘목사님이 설교 재료가 떨어져서 또 그 말씀을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 부분이 중요한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도 선생님이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부분에 밑줄을 그어 놓았다가 시험 공부할 때 그 부분을 잘 기억해두면 시험에 대개 나옵니다. ‘반복의 원리’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민족이 열두 돌을 가지고 기념비를 세울 때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하나를 세우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길갈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 또 다시 한 번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을 방문해 보면 이스라엘 도처에 기념비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이 경험한 일들을 눈으로 보게 하고, 그들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로 가르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실 교육에 대한 정열과 신앙에 대한 정열은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교육의 내용이 바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전달 방법이 바로 교육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6절을 보세요.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줍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상징하는 그 언약궤를 메고 나갔더니 우리로서는 도저히 건널 수 없게 보이던 요단강의 물이 우리 앞에서 갈라졌단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그렇게 넘쳐흐르던 요단강 물이 복종하더구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과, 고난과 파도를 이기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전달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4장 21절 이하를 보면 그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1~24) 하셨습니다.

    “아버지, 여기 이 돌을 왜 이렇게 세웠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 같으면 이렇게 대답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내가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탁 내디뎠더니 요단강 물이 쫙 갈라지는 게 아니겠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기 이렇게 돌을 세운 거야. 그때 일을 생각하면 이 아버지가 참 대단했지.”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영광을 돌렸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22~24절).
    이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주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우리 자신이 능력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능하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 자녀들이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 된 우리가 자녀에게 아무리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해도, 우리가 그들에게 영원한 도움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그들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더 이상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는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들에게 누구의 도움이 필요합니까? 더 이상 부모가 자녀를 도울 수 없을 때, 인생의 한풍이 불어닥칠 때,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삶의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쳐 어쩔 줄 모르고 헤매일 때, 그들은 누구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지혜로웠습니다. 그들은 그때에도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부모의 도움이 자녀에게 더 이상 미치지 못할 때 그들을 더 강하게, 더 능력 있게, 더 지혜롭게 지킬 수 있는 놀라우신 그 하나님을 그 자녀들에게 전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지혜 있는 일입니까? 이스라엘 부모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남기기를 원한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겨준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신앙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에게 재산을 남겨 보세요. 그 재산 때문에 자녀들은 오히려 더 비극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부자들의 자녀들이 불과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몰락해 가는 광경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 모두의 삶의 교훈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양식 있는 사람은 자녀들에게 지식을 남기고, 지혜로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남긴다.”
    여러분, 자녀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습니까? 잠언 14장 26절 말씀은 모든 믿는 부모들이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우리의 자녀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폭풍우를 만나게 될 것을 아십니까? 인생 항해는 폭풍우 없이는 항해할 수가 없습니다. 삶의 폭풍우에 직면했을 때, 나를 도울 수 있는 힘이 어디에도 없다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보라고 가르쳐야 합니까?

    다윗 왕의 유언은 감동적입니다. 역대상 28장 9절을 보세요.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누구를 알라고요? 아비를 알라는 게 아닙니다. 물론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단순히 아버지인 자기를 자녀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으로 자기의 의무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력하고 보잘 것 없는 부모, 많은 잘못을 자녀에게 보일 수밖에 없던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자녀에게 남겨야만 했습니다. 다윗이 아들에게 남긴 유산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무엇을 남기기를 원하십니까? 맥아더 장군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특별히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 자녀에게 하나님을 유산으로 남겨 주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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