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기의 의미 (출23:14-17)
  • 조회 수: 199, 2013.01.22 21:38:49
  •   오늘은 맥추 감사절을 지키는 귀한 주일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간혹 절기의 귀 한 의미를 잊어 버리고, 자꾸만 외적인 현상을 가지고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도시 교회들 중에 맥추 감사절을 지키지 않는 교회들이 있다고 합니 다.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맥추절의 참된 의미를 바로 깨달으면 매주일 지키고 싶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절기에 대한 바른 의미를 깨달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집니다.
    본문말씀 14절에 보면'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 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년에 3번 절기를 지키는데, 이 절기가 구체적 으로 소개되어졌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스라엘의 3대 절기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유월절이라고 말하고 있는 '무교절'입니다. 두 번째는 '맥추절'입니다. 세 번째는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실제적으로는 하루입니다. 말씀에 보면 '아빕 월'이라고 했는데 우리의 절기로 보면 3월달쯤 됩니다. 유대절기는 1월14일입니다. 그 하루 유월절 사건 이후에 15일부터 일주일동안 '무교절'을 지킵니다. 유월절 절 기는 실제로 무교절을 지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이나 무교절은 같다고 보시면 좋 을 것 같습니다.


     

      본문은 무교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 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다시 말하면 애굽에서 나올 때 빈손으 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아무 불편없이 살도록 하셨는데, 이처럼 살게 되어진 모든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되어졌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나올 때 급히 나오면서 빵속에 누룩을 넣지 못했기 때문에 누룩없는 빵을 먹습니다. 무교절이라는 것은 효 소가 없는 빵을 먹는 절기입니다. 효소없이 그냥 떡을 쪄서 맛이 떨어지는 떡을 먹 어라. 사실은 맛이 없는 떡을 먹는 그 자체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 님의 구원의 은총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맥추절을 다른말로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신명기 16장 9절에서 12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칠칠절 이라고 하는 것은 무교절 둘째날부터 칠주간이 지난 다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와서 '오순절'로 이어져 왔습니다.
      칠칠절은 농사와 관계된 절기입니다만 농사의 수확물보다도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되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번째는 16절에 '수장절'이라고 되어져 있습니다. 수장절 대신에 '초막절', 혹은 '장막절'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수장절은 추수해서 저장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 엘 농사 절기에 비추어 보면 마지막 절기이기도 하고 우리의 추수때와도 비슷합니 다. 그런데 이들은 추수할 때 들판에 나가서 장막을 치고 추수가 끝날 때 까지 야 영을 했습니다.


     

      룻기서를 읽어보면 룻이 예루살렘에 가서 보아스를 만날 때 밭으로 갑니다. 밭에 쳐진 장막속에서 보아스를 만나는 사건을 읽어볼 때 수장절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이절기를 지키라고 하셨는가 라는 것입니다. 절기를 지 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일을 지킵니다. 지키지 않을 수도 있고 지킬수도 있습니다. 그러 나 하나님은 언제나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안식 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깨닫고 안식일의 주인이며, 부활하 신 예수님을 기념하여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일을 지키라고 하는 이유를 잘 알아야 합니다, 결석하신 분들 은 목회자를 보면 참 미안해 합니다. 구역장들을 보아도 미안해 합니다. 성가대를 잘 나오다가 결석을 하면 성가대 지휘자에게 미안해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더 미안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왜 주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까? 단순히 출석율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닙 니다. 맥추감사절을 도시교회에서 지키다가 왜 지키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보지 못하고 물질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보리 추수를 하는가? 혹 밀 추수를 하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그것을 지킬 이유가 없다는 것입 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보리나 밀을 받기 위해서, 혹은 물질을 받기 위해 서 절기를 지키라고 하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 오는 것, 헌금하는 것 은 출석율을 높이거나 헌금을 거두기 위함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 해서 희생을 해야 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너희들이 삼차 내게 나오라' '절기를 지 키라'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백성된 원인이 어디 에 있습니까? 전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질 때문 에 종이 되고 사막에서 고달픈 인생을 이루어 가는 그들의 삶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불행한 인생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시려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 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서 그 구원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와서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펴주 시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에 비추어진 우리의 모습, 곧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를 우리는 잘 압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무엇을 요구해서 부르시 는 것 아닙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절기를 정해 놓고 우리에게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매주일 정해놓고 '나오라. 내가 좀 보자'라고 말씀해도 우리는 잘나오지 않습니다. 절기를 지키라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좀 보자는 것입 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고 범사에 감격해서 항상 기뻐하면서 정말 생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보시려고 하겠습니까? 상처난 부분이 있으면 치료해 주시고 싸매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힘이 없는 자에 게 새로운 힘을 주시고, 길을 잃은 자에게 새로운 길을 가르쳐 주시고, 균형잃은 자를 새롭게 붙들어 주셔서 새로운 힘을 가지고 새롭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 를 보자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를 보면 공통적으로 출애굽과 관계가 되어졌습니다. 출애굽과 관계 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출애굽은 전적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 다.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구원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과 절기를 지키는 것도 다 구원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에 노예였던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늘을 땅에 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쫒아가면 세상은 사막으로 바뀌어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중심으로 한 지역들도 참 기름진 땅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포도송이를 두사람이 메고가도 힘이 들정도로 기름진 땅입니다. 그 런데 사막화가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무성한 숲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 사막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을 좆아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어떤 뜻을 두 고 동기를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가면 결국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멸망할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은 하늘을 땅에 심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서 찾고 불러주셨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토로하는 삶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은혜 에 감격해서 감사의 노래를 하고 기쁨의 노래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무엇을 드리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잘보여서 무엇을 받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상관하지 않고, 언제나 부르셔서 하나님의 것을 충만히 채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 신 목적이 그것입니다. 세상의 쓸데없는 것으로 꽉 차있는 우리를 불러서, 이러한 모든 것을 다 내어 놓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채워서 세상에 나가 한숨 쉬지 말고 사소한 일에 붙들려서 노예가 되지 말고, 참 진리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떳떳하게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고향을 왜 찾아갑니까? 명절이 되면 우리도 절기를 지키지 않습니까? 고향에 나를 괴롭히는 부모님이 있으면 고향에 가지 않습니다. 고향은 부모님들과 형제들을 만 나기 위해서 가지 않습니까?
      고향은 도시보다 모든 환경이 형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향을 찾아갑니다. 따뜻한 부모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모든 것이 편리한 것 같아도 인생의 메마름을 체험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메마름을 체험할 때마다 고향을 더 그리워 합니다. 그렇게 차가 밀리고 교통 체증 을 일으키면서도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그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 다.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 그 뜨거운 사랑을 받아들이면 그동안 메말랐던 감 정이 다 사라집니다. 삶에 지쳐 아무것도 못할 것 같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 굉 장한 힘이 생기고 돌아와서도 열심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주는 사랑과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큰 사랑앞에 나올 수 있는 절호의 기 회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의도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일을 지키라고 하신 의도 가 거기에 있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출애굽의 사건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십계'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십계하니까 무엇이 생각납니까? 모세가 생 각이 나고, 홍해 바다가 갈라진 것이 생각납니까? 바로보셨습니다. 기적이 보입니 다. 홍해가 갈라지고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 청난 기적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십계"입니 다. 기적이 중심이 아닙니다. 이 영화가 돈을 벌어들이는 흥행면에서는 성공을 했 습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면에서는 실패작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기적의 사건 들이 진정 십계를 가리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입니다. 두 돌판중 첫째 돌판은 뭐라고 기록되어졌습니까? '하나 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돌판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절기는 출애굽과 관계가 되어지는데 출애굽은 십계와 관계가 되어집니다.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 2절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 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 라"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이 계명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 계명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적은 것입니다. 더 큰것은 우리를 죄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목 적은 하나의 더 큰것을 주기 위한 수단입니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 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더 큰 것을 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과 무한한 은혜를 주시기 위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목적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어떤 기적보다도 더 큰 것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절기를 지키라는 것은, 세상 의 어떤 것에 붙들려서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큰 것이 바로 하나 님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출애굽의 목 적은 곧 하나님을 만남에 있습니다.
      절기의 목적은 출애굽과 관계되어져 있는데 곧 하나님과 관계되어져 있다는 것입니 다. 곧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와서 내 자신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드러난 우리의 모습은 형편없는 모습입니다. 세상의 사소한 일들에 붙들려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고 세상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다시 바꾸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면 감사의 생활을 하지 아 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잊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면 아무것도 나 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불평과 불만과 인생의 사막을 만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다시 불러서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억하고 사랑하라는 첫 번째 돌판은 진정한 행복의 본질이요,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절기와 주일을 지키면서 보다 큰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못 보면 교회 올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들이 절기를 통해서 내게 수없이 몰려 오지만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다' 이말은 하나님을 못보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예물을 드리지만 오히려 피비린 나고 냄새가 나니 쓸 데없다고 책망합니다.
      여러분!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외형적인 것이 아니 라, 하나님앞에 우리를 진솔하게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보기 를 원하시고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고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 사하노라. 풍요로운 그의 은혜를 통해서 나는 하나님앞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노 라' 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어떠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잊지 않습 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사를 잊고 불평불만속에 살아가는 이유는 여기 에 있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옥중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옥중에서도 기쁨의 삶을 살고 평안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어 떤 환경보다도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환경이 어렵게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 집니다. '하나님 내 환경을 바꾸어 주십 시오'가 아닙니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늘 바라보고도 깨닫지 못하므로 세상을 힘들게 살아 갑니다. 더 소중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항상 더 나쁜 것을 생각하고 사소 한 것에 붙들려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 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하나님앞에 나와서 큰 것을 생각하고 크신 하나 님을 생각하면 사소한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진리 입니다.


     

      리쳐드 칼슨은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책 내용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운전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끼어 들기를 합니다. 그러면 끼어들기를 못하도록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거리가 있어서 끼어들려고 하면 속력을 내어 거리를 좁힙니다. 옆사람이 속력을 내서 들어오려고 하면 더 속력을 냅니다. 절대로 못들어 오도록 합니다. 그러다가 혹시 들어 오면 화를 내고 불쾌하게 생각 합니다. 우리의 매사에 그렇습니다.
      어떤 부모님이 다섯살먹은 아이와 차를 타고 가는데 이 아이가 갑자기 아빠에게 고 함을 치면서 심한 욕을 했습니다. 부모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 아보았습니다. 한번은 아빠가 운전을 하는데 이 아들이 옆에 탔습니다. 운전중에 다른 사람이 끼어 들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목을 내밀고 끼어든 운전 기사에게 욕을 한 것입니다. 다른날 식구가 같이 차를 타고 가는데 아빠가 끼어 들 기를 한것입니다. 이것을 본 아이가 이전에 아빠가 다른 운전자에게 한 것처럼 아 빠에게 욕을 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따져보면 사소한 일로 인해서 큰 것을 놓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는 큰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내가 나를 붙들고 있는 모든 삶을 하나님께 다 맡기고 살아가면 느긋해 질 수가 있습니다.
      교회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서 때로는 부정적인 모습과 내 마음에 안드 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것 때문에 큰 것을 놓치고 교회를 떠난 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존재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보기 위해서 오는 곳이 아닙니다. 인간이 행하는 어떤 일들을 보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로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보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면 나의 관점이 바뀝 니다. 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관점은 넓은 것 같아도 너무나 좁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친구를 보니 좋은 목걸이를 하 고 있습니다. '참 행복하겠다. 저렇게 비싼 목걸이를 목에 걸고... 참 결혼 잘 했 어! 복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비관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악세 사리 한 것,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 등을 부러워 하면서 내자신에 불만을 품고 있습니까? 내 관점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걸이 보다 더 아름다운 목을 주셨습니다. 귀걸이보다 더 아름 다운 귀를 주셨습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정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차보다 더 좋고 튼튼한 것이 무엇입니까? 고장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발을 주셨습니다. 어디에 관점을 두고 보는가에 따라서 감사의 삶을 살수도 있고, 불평과 불만을 품 고 살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게되면 자꾸만 세상을 보게됩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주 일을 통해서 부르시고, 절기를 통해서 부르셔서 하나님을 보라, 그리고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라. 좀 더 큰 것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세상에 귀를 귀울이고 살면 겁이 나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지난주에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교육부와 문교부에서 어린이들의 캠프행 사를 중단하라고 합니다. 무엇을 보고 이러한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까? 아이들을 밖으로 캠프 보내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사건 하나를 보고 어른들이 잘못 판단 해서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더 큰 것을 무시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우리가 붙들리면 아무것도 해나갈 수가 없습니다. 어떤 교회는 여름에 수련회 갔다 가 사고가 나서 그 다음해 부터 수련회를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 교회가 어떻게 되 는지 아세요? 15년 전에 수백명이 모이던 주일학교 아이들이 10여명 모입니다.
      독일에서 공부하시고 장로회 신학대학 교수님으로 계시는 성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아이가 성유리라고 TV에 나옵니다. 핑클에 있답니다. 자기 딸보고 기도 좀 해달라 고 합니다. 정말 그분은 주님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딸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답니 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상하게 쓰신답니다. 그 딸이 아이들을 얼마나 많이 전도 하는지 모릅니다. 그분이 독일에 12년 동안에 계시다가 한국에 돌아오니 꽉찼던 교 회가 텅텅 비어 있더랍니다. 앞자리에 50명 정도 앉았는데 다 나이드신 분이더랍니 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뜻을 우리가 벗어 버리고 제도에 붙들려 서 옛날 옛날을 고수하니 젊은이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무엇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어떤 사건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쁜 사건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 님께서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믿음 을 가지고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당하는 사건들 때문에 하나님을 향 해서 나가는 길이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맥추절을 지키는 것도 물질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맥추절 절기의 의미가 상실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드리는 성미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을 보기 때문에 성미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미를 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볼 수가 있습니까? 때마다 이것을 베푸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볼수가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보면 끊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보면 중단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물질때문에 하 나님의 크신 은혜를 놓치고 사는 것밖에 안됩니다. 우리는 주일을 지키면서 분명히 세상을 보고 살지 않고 하나님을 보고 살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 니다. 세상을 보고 살면 나쁜 소식이 들릴 뿐만 아니라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보입니다.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망스러운 일들을 많이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한 습관에 부딪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되어집니 까?   짜증스러워집니다. 화가납니다. 그래서 불평이 생기고 불만이 생깁니다. 고민하게 됩니다. 뿐만아니라 더 심해질 때 과민반응을 보이고 평정을 잃고 지나치 게 긴장합니다. 삶의 부정적 측면에 압도되고 완전히 행복한 삶을 다 빼앗기고 맙 니다. 그런 우리들을 그대로 두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늘 부 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힘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던 관점을 하나님을 향하는 관점으로 바꾸고, 진정한 행복이 있는 그곳 으로 바꾸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어떤분이 인도에 가서 선교사로 25년동안 있었습니다. 25년동안 지내면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선교를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인도에서 25년동안 호랑이 사냥을 한 사냥꾼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 복음을 전하니까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당신이 이 땅에 와서 25년동안 예수를 전해도 나는 예수를 한번도 보지 못했소.그런데 내가 어떻게 믿겠소.' 그럴 때 선교사가 '나도 25년동안 인도에 있으면서, 당신이 25년 동안 호랑이 사냥을 한다던데 나는 25년동안 호랑이 한번도 못보았소.' 라고 했답 니다.
      관점을 하나님께 두면 우리는 크신 하나님을 늘 볼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고 깊은 감격과 감사가 넘칠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교회의 프로그램과 사람들을 통해서도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 다. 한계가 있습니다. 찬양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봉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물질을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 아니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은 오늘도 정한날을 통해서 사소한 것을 바라보고 사소한 것에 붙들려서 늘 절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에 의해서 부름받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면 풍성한 삶 을 우리가 누릴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사형틀입니다. 비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사랑과 이웃과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정 하나님을 못만 나기 때문입니다.
    후반기를 시작하는 첫주일에 맥추절을 지키면서, 절기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꼭 깨달으시고, 나올 때마다 정말 좋으신 하나님을 꼭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관점이 바뀌어서 세상을 좀더 느긋하게 바라보시고, 행복과 감사를 누리 면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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