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납되도록 드리라 (레 22:17-23)
  • 조회 수: 153, 2013.01.24 10:54:00
  • 추수감사주일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은 창4:4을 연상케 합니다.  거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각각 그들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 하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열납 하시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추수감사주일로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열납 되도록 드리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열납 되도록 … 드릴지니라" 또 21절에도 열납 되도록 드릴 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2절을 보면 열납 되지 않은 것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괴혈병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너희는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거든 열납 되도록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 찬송이 열납 되도록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열심, 봉사, 구제, 재물이 열납 되도록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흠 없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19절을 보면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라고 했고 레3:1을 보면 역시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께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첫째 조건이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짐승을 드릴 때에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괴혈병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드려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 흠 없는 제물은 흠 없으신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 번에 드려진 흠 없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허물 투성이 입니다.  흠이 너무 많습니다.  약점이 너무도 많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죄인을 그의 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은혜를 받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드리려거든 가장 귀하고, 가장 깨끗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쓰다 버린 찌꺼기나 잉여 농산물로 드려서는 안됩니다.  여기 "흠이 없다"는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21절에 보면 "열납 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령 십일조를 드릴 때도 이름만 십일조가 아니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뉴 래브라이즈 군도  원주민에게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원주민이 돼지를 잡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돼지 꼬리를 잘라서 한 곳에 쌓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고기는 우리들의 것이고 꼬리는 우리 신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까?  생각하면 은혜 받은 성도 중에도 이러한 모양으로 돼지 꼬리 예물을 드리는 성도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헌신예배 때 헌금 기도하는 청년이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쓰고 남은 보잘 것 없는 것을 이렇게 주님 앞에 바칩니다.  참으로 겸허한 기도인 것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예배 후에 담임 목사님께 책망을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 앞에 드릴 때에 흠 없는 것으로 선택해서 드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 정성껏 드려야 합니다.
    레2:1을 보면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고운 가루'는 상등품 밀가루를 뜻합니다.  또 고운 가루는 더 이상 방아를 찧을 필요가 없을 만큼 세미한 가루입니다.  그리고 밀이 가루가 된 것은 자기 자신의 희생을 뜻하기도 합니다.  밀이 고운 가루가 되게 하려면 섬세한 관리와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드리는 예배는 고운 가루 예배가 되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고운 가루 예배가 될까요?  예배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예배를 등한히 하는 성도를 보십시오.  그의 믿음이 소홀한 믿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에 정성껏 참석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말씀 들어야 은혜 받을 수 있고, 은혜를 받아야 깨달을 수 있고,  깨달아야 새 출발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주일 낮 예배만 아닙니다.  저녁예배 훌쩍 넘어가는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수요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서는 새벽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아 그 영혼이 영글고 은혜 충만하게 되면 오곡이 무르익은 가을에 추수를 하는 것 모양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 믿음생활을 할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또 정성껏 시간을 엄수해야 합니다.  음악회, 오페라 연주되는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은 시작시간이 지나면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거의 늦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예배에 있어서 예배는 좀 늦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부쩍 늘어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성도가 너무 많아 고민하다가 예배가 시작되면 정문에다 '오늘도 늦으셨습니다'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어느 주일 예배 후에 보니까 '오늘도 늦으셨습니다'그 글자 밑에 다음과 같이 글씨가 써 있었습니다.  '늦게라도 와 준 걸 고맙게 생각하시오'하나님께서 이 글을 보시고 무엇이라고 하실 까요?  오냐 고맙게 생각하겠다고 하실 까요?  그리고 네게 복이 있을 지어다 하실 까요?  아닙니다.  반대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예배를 위하여 정성껏 시간을 엄수하는 훈련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성껏 예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서 준비할 것은 많습니다.  주일 예배를 위해서 전날 목욕을 할 수 있으면 더 은혜가 됩니다.  의복도 단정히 준비하고, 핸드폰 스위치나, 삐삐 호출기 스위치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화장실도 미리 다녀오면 좋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정성껏 준비해야 합니다.  냄새나는 돼지꼬리 제물이 아니라, 인색한 마음 섞인 예물이 아니라, 과부의 두 렙돈 정신으로 그리고 옥합을 깨뜨린 죄 많은 여인의 믿음으로 드리는 예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를 드린 벳세다 소년 모습으로 예물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아이작 월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두 곳이다' 어디 어디 일까요?  하나는 천국이요, 또 하나는 감사하는 죄인들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이적을 만듭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가까이 오시도록 하는 비법입니다.  고등동물과 하등동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감사의 차이입니다.  인간의 언어가운데 가장 숭고한 두 마디가 있다면 하나는 믿는다, 또 하나는 감사하다는 말 일 것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신앙의 표현이고, 감사하다는 말은 그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사하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믿음으로 예배하고 또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 감사하므로 드려야 합니다.
    레7:12을 보면 "감사하므로 드리라"고 했고, 15절에도 "감사함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열납 되도록 하려면 감사, 감사, 감사가 철철 넘쳐야 합니다.  시편을 보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했고 "감사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조지 메길 박사가 말했습니다.  '감사라는 과목에는 졸업이 없다'의미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에는 끝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끝이 없는 그 은혜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다 가지고♬그래도 다 표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학생이 여행 중에 싸구려 여관에 투숙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누가 신발을 훔쳐갔습니다.  간밤에 분명히 '하나님 지켜 주세요, 보호해 주세요'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기 신발이 도적 맞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주인이 미안하다며 창고에서 헌 신발을 꺼내어 대신케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주일이니까 함께 교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학생은 마지못해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같은 의자에 앉은 어떤 성도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찬송하면서 '하나님 감사해요, 감사해요'감사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학생이 자세히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에게는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에 두 다리의 신을, 그깟 신발을 잃었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을 크게 뉘우쳤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생애를 감사하면서 살리라. 작정하고 변화 받은 믿음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는 훗날 독일의 재무장관이 된 마루티 비덴이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가 이적을 만들고, 새사람 되게도 합니다.  지옥에도 언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뜨겁다, 힘들다, 고통스럽다, 죽고만 싶다' 등의 언어 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있습니다.  믿는다. 또 감사하다.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구요?  믿었다면 지옥 갈 리가 없었을 것이고 감사생활을 했다면 믿음생활이 제대로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가 은혜 스럽고, 부흥되겠습니까?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이 많을수록 그 교회는 은혜 스럽고, 부흥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믿음과 감사는 분모와 분자와도 같습니다.  서로 비례가 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감사합니다.  감사하는 것 보면 믿음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믿음이 작게 감사하고 큰 믿음이 크게 감사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어떤 곳입니까? 네 가지가 많은 곳입니다. 
    ① 마귀가 많은 세상입니다.  마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심지어 예배드리는 교회당에도 마귀가 있습니다.  노회를 하고 총회를 하는 모임에도 마귀가 활동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마귀야 물러가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② 질병이 많은 세상입니다.  세상에 질병 없는 곳이 있습니까?  전염병, 고질병, 성인병, 문화병, 불 신병, 심지어는 고3병, 교만병 등 많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주님이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주린 자도 올 것이요 병든 자도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마우신 주님이십니다.
    ③ 실패가 많은 세상입니다.  십 년 동안 고생해서 세운 공든 탑이 하룻밤 사이에 와르르 무너질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권세가 많은 사람도 실패하고 재물이 많은 사람도 실패하는 것을 주변에서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실패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불가능은 없다 이렇게 제창한 나폴레옹이 불가능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전에서 뽑아버리라고 말했는데 그는 마지막 생애에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실패 했도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이 승자다'역사에 금언 같은 말을 남겼다는 이야기입니다. 
    ④ 죄악이 많은 세상입니다.  가는 곳마다 죄악 투성이 입니다.  그래서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죄 없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한 번 손을 들어 보세요.  만일 나는 죄가 없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요일1:10말씀과 같이 자기를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최악의 사기군일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은 땅 위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누가 우쭐댈 수 있습니까?  나는 의롭다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고개를 버쩍 들 수가 없습니다.  교만을 피울 수가 없습니다.  열 번, 백 번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라" 롬3:10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면 속죄가 생겨납니다.  죄 씻음 받은 그 것 때문에 기쁨이 생겨납니다.  ♬겁과 두려움 없어지리니♬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감사할 줄 아는 성도의 모습이 아닐까요?  왕상17장에 보면 사르밧 동네에 살고 있는 한 과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때는 흉년이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마지막 양식만 남았습니다.  가루 한 움큼, 기름 조금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찾아 온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어려운 중에 감사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 때문에 그가 받은 축복이 무엇입니까?  흉년이 다 끝날 때까지 가루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기름병에 바닥이 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위하여 나의 작은 정성을 나누어주고, 내가 먹을 것을 쪼개어 주고, 콩 하나 쪼개어 먹고 남은 것을 저수지에 던졌더니 풍덩 소리가 났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이렇게 살 수 있는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라고 하면 없었던 길이 열릴 것이고 막혔던 담이 무너질 것이 아닙니까?  영국의 어느 잡지사가 형제란 누구인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최우수 정답으로 뽑힌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내 곁을 떠날 때 내 곁으로 와 준 사람이 형제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눅10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제사장도 레위인도 떠나갔습니다.  물론 그들의 입술에는 감사의 나팔이 있었습니다. '안됐구나, 불쌍하구나' 그러나 그 어려운 사람 곁으로 와 주지를 아니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찾아가 주지 않았습니까?  찾아가서 어루만져 주고, 쓰다듬어 주고, 닦아주고, 붕대로 싸매 주고, 그리고는 짐승에 태워 주고, 데나리온을 주고, 시간을 주고 정성을 주고 그렇습니다.  주님을 그와 같은 성도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강도 만난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는데 '찾아가 주라'고 주님께서 그토록 목놓아 외치건만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지를 못합니다.  열 문둥 병자들이 똑 같이 은혜를 받았건만 한 사람 밖에 감사한 자가 없었습니다.  이 시대에 소금 노릇, 빛 노릇 하는 그리스도 인이 있어야 되겠는데 그 척도는 감사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 이야기를 드리므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낡고 오래된 건물을 가진 교회인지라 벽이 떨어지고 비가 샙니다.  젊은 집사 십 여명이 먼저 건축헌금을 작정하고 재산이 많다고 알려진 교회의 장로님을 찾아가 호소했습니다.  '장로님 생전에 교회를 신축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철없는 사람들이군. 교회를 지으려면 돈이 많아야 되잖아.  그건 저희도 압니다.  저희들도 최선을 다해서 헌금하려고 합니다.  장로님께서 이 번에 헌금 한 번하시지요.  허허 이 사람들아 내가 무슨 돈이 있다는 말인가?  장로님! 이 집도 있고요.  또 저쪽에 산도 있고 큰 빌딩도 있잖아요.  그것은 다 몫이 있다네.  무슨 말씀인지요.  이 집은 내 아내 몫이고 빌딩은 큰아들 몫이고 땅은 작은아들 몫이네.  찾아간 젊은 집사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리고는 일어서면서 한 집사가 내 뱉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몫만 없군요.'  그렇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어찌 하나님 몫이 없어야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있는 예물을 드리십시다.  감사의 반대는 불만입니다.  그런데 불만은 마귀의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불만을 토하는 시간은 마귀의 노예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시간이라고 여기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하늘에다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헛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날이 있습니다.  갚아 주실 때에 눌러서 흔들어서 넘치도록 내 가슴에 안겨다 주실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실이 주의 은혜입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고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열납 되도록 예물을 드리시되 우리의 몸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몸을 드릴 수 있다면 재물도 드릴 수 있습니다.  몸을 드릴 수 있다면 나의 청춘, 달란트, 시간,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릴수가 있습니다.  생각하면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내 자녀도 하나님이 주셨고, 나의 건강도 하나님이 주셨고,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주신 그 것을 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찌 인색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그 의미를 깨달아 감사하면서 더 많은 풍요로운 축복을 누리시는 우리 모두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40 admin 95 2013.01.24
39 admin 158 2013.01.24
38 admin 215 2013.01.24
admin 153 2013.01.24
36 admin 120 2013.01.23
35 admin 95 2013.01.23
34 admin 208 2013.01.23
33 admin 173 2013.01.23
32 admin 137 2013.01.23
31 admin 53 2013.01.23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