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손의 출생 (사사기 13:21-25)
  • 조회 수: 276, 2013.01.31 07:54:18
  •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많은 영웅호걸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역사 소설의 주인공들과 같은 가상적이고 과장된 인물이 아니라 너무나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홍해를 육지 같이 갈라지게 하여 이스라엘을 건너게 한 모세가 있는가 하면 맨손으로 곰을 이기고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이긴 다윗을 비롯하여 오늘 성경의 주인공 삼손을 빠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세상의 드라마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본질적인 차이는 성경에 인물은 역사 속에 실재하였던 인물이며 그들이 한 일이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면서 우리와 똑같지 아니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며 바로 우리의 소망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시시 때때로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입다가 암몬 족속을 물리친 후 사사 입산, 엘론, 압돈에 이어지면서 니리기 인장을 누리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짓을 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무슨 악을 범하였는지 알수 없지만 짐작하건대 또 다시 가나안 사람들의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범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삿 13: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는 말씀처럼 자그만치 사십 년 동안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압제를 받기 시작하였으며 이 후로 계속적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는데 다윗 왕이 저들을 정복하므로서
    (삼하 8:1) 마침내 블레셋의 압제는 끝이 날 정도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그같은 블레셋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을 끼고 해적 생활과 무역과 노예 매매를 하던 잔인한 족속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다는 것은 얼마나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하였을 것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죄를 즐겨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의 압제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연히 내리셔야 할 벌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도 인간들처럼 복수의 신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이스라엘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그처럼 하나님께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은 도리어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편하게 사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 때로는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도 은혜라고 하는 점이 바로 불신자와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난이 극도에 달하고 있을 때 모세를 준비하셨던 것처럼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에게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회개하기 전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한 영웅을 준비하고 계셨는데 그가 바로 오늘 성경의 삼손입니다. 
    아무리 가물어 메마른 한 여름이라고 할지라도 시원한 비가 나리기 전에는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와야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축복은 고난 뒤에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같은 고난으로 인해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되고 또 지난 닐 하나님께서 내게 베프신 은혜가 더욱 소중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 많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것도 은혜이며,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다시 회복되게 하여 주심이 바로 은혜이며 고된 삶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심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시 71:20)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그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계속되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1)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고자 하셨다면 벌써 망하였을 것인데 아직까지 살려 주신 것은 선대하심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면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시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2)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으며 축복된 삶을 살게하심이 바로 선대하심이며 미래의 천국의 소망이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3)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 더욱 멀어지게 만들며 죄를 범할수록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기 때문에 자신의 죄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죄를 깨닫고 돌이켜 새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선대하신 은혜임을 잊지말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4) 그것만이 아니라 더 놀라운 사실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은혜를 갈급 하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주만 바라보게 하시는 것은 더욱 큰 은혜입니다.

    (행 14: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행 14: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2.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사람을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친히 직접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백성들의 죄악을 꾸짖게하시고 고난받는 백성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의 압제를 오랜 세월동안 더욱 비참한 것은 이스라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능력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였으며 바로 삼손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사들 중에서도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군대를 거느리지도 않았고 보좌에 앉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단신으로 적진을 종횡 무진하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안겨줌으로 고난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시원케한 영웅이었습니다.

    1) 무자한 가정

    삼손은 다른 사사들과 출생 배경부터 달랐습니다. 다른 사사들은 장성하여 중도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동족의 부르심을 받아 사사가 되었지만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미리 예고된 가운데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삿 13: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삼손은 명문 유다 지파가 아니라 작은 단 지파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소라 땅은 단 지파와 유다 지파의 경계선에 있기 때문에 기업이 세력 여하에 따라 두 지파 간에 왔다 갔다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단 지파 자손인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나이가 많아 늙었다는 말은 없으나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자녀를 갖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노아 부부가 아이를 낳았다면 그것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그들 부부의 기도의 응답이라고 누구든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같은 마노아 부인에게 (삿 13: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이러한 수태 고지(受胎告知)는 삼손의 경우 외에 아브라함과 사라
    (창 17:19 ; 18:10,14), 한나(삼상1:17), 엘리사벳(눅 1:13),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눅 1:31)에게 주어졌으며 그 아들들은 다 이스라엘 역사의 특별한 인물들이었습니다

    2) 믿음의 부모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가정에 아들을 주시는 이유는 마노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삿 13: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는 말씀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부모 마음대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독주나 부정한 음식을 먹지말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고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 거룩히 키워야 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마노아 부인은 이 사실을 그의 남편에게 고하였을 때 마노아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을 보면 그 가정이 경건한 믿음의 가정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삿 13:8)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마노아가 이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은 의심 때문이 아니라 그 약속을 그대로 믿고 하나님이 아이를 주실 것이라는 전제하에 아기의 양육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는 마노아의 돈독한 신앙을 잘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이 같은 마노아 부부는 우상 숭배가 극심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흔치 아니한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3. 삼손의 출생과 성장

    하나님께서 삼손을 이처럼 믿음이 좋은 마노아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은 이처럼 우연이 아니라 과거 모세도 신앙이 돈독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신실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마노아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은 이처럼 우연이 아니라 과거 모세도 신앙이 돈독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신실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게 하였습니다

    (출 2:1-10).
    마노아의 부인은 그의 남편보다 더 좋은 믿음을 소유한 여성이었습니다. 번번이 여호와의 사자기 마노아가 아니라 그의 아내에게 나타나 수태고지를 하였을 때 마노아의 부인은 금방 알아볼 정도로 영적인 직관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론의 결과가 아니라 단번의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1) 두려워하는 마노아

    자식이 부모를 보고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범죄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영적으로 무지하여 전혀 무감각하거나 아니면 두려워 떨게 됩니다.

    죄악에 물들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경우에는 (출 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는 말씀처럼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출 33:20).
    이사야도 여호와의 영광을 뵈온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었으며(사 6:5)
    야곱과 기드온도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기 때문에 죽을 줄로 생각하였습니다(6:22, 23 ; 창 32:30).

    마노아는 자기가 기도하였을 때 자기에게 나타나신 이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자라는 것을 미쳐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가 음식을 대접받는 대신 (삿 13:20)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는 말씀처럼 제물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영광스럽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삿 13:21)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삿 13:22)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2) 위로하는 마노아 부인

    동일한 상황에서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죽음을 두려워하였으나 그의 부인은 도리어 소망을 갖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선대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묘라고 일컫는 여호와의 사자를 마노아만 본 것이 아니라 그의 부인도 보았으나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마노아와 달리 도리어 두려워하는 마노아를 위로하였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믿음이 큰 여인이었을 뿐 아니라 아주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그녀는 자기 남편이 공포심에 휩싸여 있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남편을 위로하였습니다.

    (삿 13:23)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 마노아 부인이 두려워 떠는 마노아를 위로한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제물을 열납 하셨으며,
    나) 이적까지 베풀어 보이셨으며,
    다) 친히 자신들과 대화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이미 기드온도 하나님을 뵈었으나 죽지 않았습니다(6:22 ; 23).

    믿음의 사람 마노아가 두려움과 낙망에 빠져 있을 때 그의 부인은 그를 믿음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현명한 배필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나약해졌을 때 우리 곁에서 신앙의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3) 삼손의 출생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되니 (삿 13:24)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라는 말씀처럼 삼손이 출생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삼손에게 (삿 13: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삼손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이 다음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준비하며 자란 사람입니다.  나폴레옹은 한 때 영국의 웰링톤 장군의 이름이 10,000명의 군인들과 맞먹는 가치가 있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삼손은 다른 사사들처럼 군대를 이끌거나 불레셋을 정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20년 동안 블레셋을 수 차례 강타함으로써 블레셋에게 두려움이 되어 그들의 침략을 막고 이스라엘의 고통을 크게 덜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삼손의 이름은 얼마나 더 크게 느껴졌겠는가 하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 론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블레셋에게 고난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삼손은 미래의 희망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삼손은 믿음의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그 부모들은 삼손을 나실인으로 키우기 위해 부모들이 먼저 독주나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아니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 가정의 자녀들은 이 민족을 구원해 내는데 있어서 삼손으로 길리움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기성세대의 죄악이 극심하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의 가정 가정에서 나실인을 키워내기만 한다면 내일에 이 민족과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이 마노아 부부와 같은 믿음의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믿음을 훼방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믿음을 갖도록 격려하고 위로하여 용기를 불어넣어 두려움이나 절망을 떨고 일어서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하나님이 이 시대의 구원을 위해 우리 가정에 맡기신 이 시대의 삼손으로 알고 그들을 나실인으로 구별하여 잘 키워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 삼손의 부모들처럼 자녀들 앞에서 독주나 부정한 음식을 삼가고 신앙의 본을 보여야만 합니다.
    삼손을 나실인으로 구별하게 하셨던 하나님은 그 시대의 이스라엘은 세계속에 나실인이 되기를 원하셨으나 구별된 민족의 삶을 포기헐 때 타락한 삼손처럼 민족의 운명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유한한 이 세상은 우리에게 나그네요, 거류자요, 우거하는 객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장차 예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완전히 구별하여 영생의 몸, 부활의 몸,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철두철미하게 그리스도인은 나실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신약적 나실인의 삶은 현실도피적이거나, 반(反) 역사적이거나, 반문화적이거나, 반지식적인 현실 도피주의자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세상에서 선도적인 존재로서 '빛으로 사는 것', 맛을 잃은 세상에 '소금'으로 사는 변화의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의 나실인입니다. 그 이름은 구별된 무리라는 '성도'라고 일컬으며 교회는 거룩한 무리들의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성도들과 교회의 힘은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이 시대의 나실인으로 거듭나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즐거이 헌신할 때 가장 강력한 백성들이 되어 세상을 정복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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