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탄생의 진정한 의미(누가복음 9장 58절)
  • 조회 수: 200, 2012.12.21 21:58:01
  • 새 천년의 첫 성탄절에 성탄의 기쁨이 온누리에 가득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나 마냥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 기원하기에는 너무나 어수선한 난국이다. 새천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떠들썩하던 새해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온통 위기의 징후 뿐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실의, 냉소와 비관이 우리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고통분담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통하여 구조조정을 이루어내고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야 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 대신에 고질적인 집단이기주의로 인해 경제상황은 다시 악화되고 사회적 신뢰체계는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제 2의 경제위기론이 더 무성하게 난무하고 있는 형편이다. 국민의 60% 이상이 경제위기의 재발에 대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고, 경제불황으로 내년에는 실업자가 100만명 이상 될 것이라는 반갑지 않은 예측도 들린다.

     

    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할 사회적 동기부여를 발견하기는커녕 저마다 자기 몫 챙기기에 혈안인 형국이다. 저마다 책임과 의무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생활현장에서 강제로 내몰린 희생자들에게는 사회의 보살핌과 든든한 유대, 그리고 회복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사회적 신뢰체계의 구축은 더욱 요원하게 보인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서로 돕는 공동체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경쟁이념만이 대안인양 호도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진정한 위기는 만연된 불신에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성탄과 교회의 존재의미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를 향한 교회의 사명과 역할을 물어야 한다. 교회는 성탄의 기쁨에 들떠 축하하기 전에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신 참된 의미를 되새기며 교회의 본질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포로 되고 눌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소외된 삶의 현장 한가운데로 오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들을 회복시키셨다. 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모범을 따라 우리 사회의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경제가 무너져 내리고 사회적 신뢰체계가 허물어지는 가운데 고통당할 이웃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교회에는 희망이다. 그들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흑암의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웃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치유하는 회복의 보루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무너지고 있는 교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고 우리 사회에 희망을 주는 길이다. 지금 사회가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경쟁에 살아남기 위한 비범한 능력이 아니다. 겸허히 이웃의 고난 가운데 동참하는 교회이다. 거기에 신뢰회복이 있고 사랑이 있고 소망이 있다. 구조조정으로 소외당한 이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섬기며 보살피자! 이것이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뜻이고 교회가 감당할 몫이다. 이것이 새천년 첫해의 예수 탄생의 진정한 의미이다.

     

    방은 많은데…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진보를 추구해 왔지만 특히 생활의 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영상과 음향 기술의 발전일 것이다.거기다가 정보 통신의 기술까지 결합되어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TV, VTR, 컴퓨터 등의 화면을 들여다보며 살고 있다.늘 화면만을 들여다보며 살다보니 실제로 사람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간이 줄어들게 마련이다.즉 집안의 가족 관계에서부터 사회의 친구나 동료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다 

    군중 속에서의 고독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동창회 모임을 자주 갖고 군대나 단체의 동기생 모임 또는 등산이나 낚시의 동호인 모임도 만들어 모이지만 이미 영상 문화 속에서 살게 된 21세기의 인류는 점점 개인으로 흩어져서 밀실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그래서 오히려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밀실 문화가 등장했다.게임방 토크방 노래방 등... “방의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방의 문화”는 있었다.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떠나서 보이는 신들을 섬기던 사람들은 인간을 어둡고 무서운 신전 속으로 몰아넣었다.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하던 예루살렘 사람들까지도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전을 장사꾼들의 거래소로 만들고 있었다.예수께서는 장사하는 사람

    들의 상을 엎으시고 너희가 이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모든 밀실로부터 끌어내셨다.그분은 갈릴리의 바닷가에서 또는 들판이나 거리에서 또는 산에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다.그분은 사람을 가두는 모든 밀실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거리에서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즉 사람은 하나님을 조용히 모셔들여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골방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인류가 마련한 모든 방에는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다.몸부림치는 영상과 떠들어대는 음향들로 가득한 그 방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2000년 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들어갈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이제 다시 그분이 세상에 오신다 해도 방의 이름을 가진 곳은 많으나 그분을 모실만한 방은 없을 것 같다.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들은 과연 그분을 모셔들일 만한 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지난날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다시 오신 예수께서 발을 들여놓으실 틈도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면밀하게 살펴볼 일이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누가복음 9:58)

     

    올해는 성탄절이 유난히 조용하다고 한다.캐럴도 들리지 않고 오가는 선물도 줄어든 채 조용하다 못해 썰렁하다는 푸념이 들린다.물론 어려운 경제사정의 반영일 것이다.그러나 올해야말로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기에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흥청망청 소란한 속에서 산타와 크리스마스 트리, 선물꾸러미를 바라보느라 잊어버렸던 성탄의 뜻을 마음에 다시 새기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어려운 경제사정만 빼고 성탄절은 이렇게 조용했으면 좋겠다.로이 스미스의 말처럼 “자기의 마음속에 크리스마스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그것을 나무 밑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언제나 문제가 많고 어려움이 많고 고통이 많기 마련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올 겨울이야말로 가장 추운 겨울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다 터져 나온 것과 같다.

     

    경제부흥의 뒤안길에서 육신의 생명을 위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정신적으로 핍박을 받고 고민하는 사람들, 영적으로 참 빛을 받지 못하고 어둠의 그늘에서 헤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에서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 위해 주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21세기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우리 민족은 분단의 아픔을 치료하는 일들을 하나씩 전개해 나가는 이 시점에서 구주 성탄을 맞게 되었으니 올해의 성탄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그 의미가 다른 때보다 더 크다고 하겠다.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을 갖추고 가장 화려하게 오실 수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가장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 이는 가장 비천한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시고, 그들에게 새 힘을 주시기 위함이다. 오셔서 사실 때에 당시 가장 멸시를 받는 갈릴리 지역에서 사셨고, 스스로 갈릴리 사람이 되셨고, 처음 일꾼들을 갈릴리 사람들 가운데서 선발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이 있었기에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할 수가 있었고, 그 결과 부자로 행세할 수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자원하여 바치는 헌금으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이는 성실하게 사는 사람을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이해하셨기 때문이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들을 이해하였고, 회개하기를 원했다. 갈릴리에서 조용히 비치기 시작한 이 빛은 점점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로마제국에 이 빛을 가득히 채웠으며, 온 세계로 향해 비쳐나가고 있다. 오늘 우리도 그 빛을 받고 있다.

     

    최초의 성탄에 천군 천사들의 축하 찬양이 하늘에서 있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는 노래였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성탄은 그 의미를 올바로 되새길 줄 아는 사람들에게 기쁨이요 평화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탄을 의미 있게 맞는다면 새로운 세기를 맞이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둠에 비추는 빛으로 오셨고, 그 빛을 받는 사람의 마음은 감동을 받았고, 그 밝은 빛은 지금도 계속해서 비추고 있다. 구주 성탄에 전국 교회와 온 성도들에게 성탄을 통해서 주시는 바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미국의 소설가 오 헨리의 작품 “크리스마스 선물”이 생각난다.한 도시에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부부 짐과 델라가 살았다.성탄절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각각 걱정이 되었다.서로에게 선물은 하고 싶은데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다.그러나 남편 짐은 아내의 긴 머리에 꽂을 머리핀을 사기로 마음먹고 갖고 있던 시계를 팔기로 결정했다.아내 델라는 남편에게 시계줄을 선물하기로 하고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팔았다.

    두 사람은 시장으로 나가 선물을 구입했다.짐과 델라는 서로를 기쁘게 할 마음으로 거의 같은 시간 집에 도착했다.짐은 머리핀을 들고 아내의 머리에 꽂아 주려고 했으나 아내의 머리는 이미 짧게 깎여 있었다.델라 역시 시계줄을 들고 있었으나 남편에겐 이미 그 시계가 없었다.준비된 선물은 쓸모없게 됐지만 둘은 곧 부둥켜 안고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사랑은 추위를 녹인다.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넘치게 나누는 성탄절이 되길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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