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시편 성도의 감사(시 116:1-14)
  • 조회 수: 312, 2013.03.12 20:19:45
  •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감사는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세상의 어떤 다른 종교도 기독교처럼 감사를 본질로 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이유는 모든 종교는 구원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에 있어 사람들은 지금 구원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 구원받지를 못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했으니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원받지 못했는데 무엇을 감사하겠습니까? 혹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그 구원은 전적으로 내가 노력해서 이룬 것입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었으니 구태여 감사할 것은 없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구원을 이루었는데 누구에게 감사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기독교는 내가 구원받았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자격 없는 자가 거저 받았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우리는 봉사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봉사의 동기가 감사에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해야 그것이 참된 봉사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이 사랑도 인간적인 차원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은 자로, 그 크신 사랑에 감격,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사랑이어야 참사랑이 됩니다. 우리의 생활에는 하나님께 대한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찬송할 때 마음에 감사가 우러나야 합니다. 감사와 감격이 없는 찬송은 아름다운 노래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은 되지 못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으례히 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을 달라고만 하지만,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그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됩니다. 헌금에도 오해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다른 종교에서 하는 적선과는 다릅니다. 헌금은 결코 공로가 아니요, 또 '내가 이것 하나님께 드리니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주세요'하는 거래가 아닙니다. 헌금은 받은 바 은혜가 고마워 감사의 표시로 정성을 모아 드리는 예물입니다. 감사의 마음 없이 드리는 헌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참으로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의 기초요, 동력이요, 근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감사를 빼버린다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한 시편성도의 감사의 찬송입니다. 내용을 보면 이 성도는 큰 환난을 만났습니다. 절 이하에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사망의 줄, 음부의 고통, 말하자면 지옥의 고통입니다.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 이상의 고통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신실하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를 그 무서운 고통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졌다고 했습니다. 이제 이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 앞에 감사의 찬송을 부릅니다. 1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17절에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구구절절 감사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성도의 간증이 우리의 간증입니다. 돌이켜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여기 살아있는 자체가 알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지켜주셨고, 그 극한 환난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수많은 위험과 어려움에서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이런 은혜를 입어놓고도 감사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입었는데도 그것이 은혜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셨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줄로 생각합니다. 아니면 그저 어쩌다가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사할 마음이 없습니다.

    남아메리카 주 멕시코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옆에서 가지런히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다고 합니다. 한쪽에는 부글부글 끊는 온천이 땅에서 솟아 오르고 그 옆에는 얼음물과 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 아낙네들은 빨래 광주리를 가지고 와서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구어 가지고 깨끗한 옷을 집으로 가져갔읍니다. 그 모습을 본 한 선교사가 안내하던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이곳 여자들은 참 좋겠읍니다. "왜요?" "아 찬 물과 더운 물을 마음대로 거저 쓸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곳 사람들에게는 온천과 냉천을 함께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군요?" 그랬더니 멕시코 안내원의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사하기보다는 불평이 더 많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비누가 나오지 않아 불평이라는 것입니다. 찬 물 뜨거운 물은 나오지만 비누가 거기서 거저 나오지 않아, 비누는 들고 오는 것이 귀찮아 불평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이렇게 감사할 줄 모릅니다. 마음에 죄가 가득하기 때문에 욕심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은혜로 깨닳아야 합니다. 은혜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목사였던 어느 가정의 이야기를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부자는 한 집에 살면서 주일에는 각자 맡은 교회로 가서 주일 설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어느 주일 오후 아들 목사가 좀 늦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아버지, 오늘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이 운전하던 자동차가 언덕 아래로 미끄려져 세 번이나 굴러 처박혔습니다. 자동차는 폐차를 해야 될 정도로 다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 다친 데 없이 무사히 차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다고 마구 외쳤습니다. 이 때 소파에 앉아 성경을 읽던 아버지 목사가 안경 너머로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오늘 더 감사하단다. 나는 너보다 더 감사하고 있단다" 이 말에 아들이 눈이 둥그래졌습니다. "아니, 그럼 아버지는 차가 네 번이나 굴러 내려갔습니까?" "구르기는 왜 굴러? 나는 아무 사고 없이 차를 운전하고 무사히 집에까지 왔단다. 자동차가 구르지도, 부서지지도 않았으니 너보다 훨씬 더 감사한 것 아니니"라고 했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고 당하지 않은 것 더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릅니다. 많은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하고서야 그보다 더 큰 어려움 당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성도들이 언제 건강에 대해 감사합니까? 대부분 경우 큰 병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고 난 다음입니다. 건강할 때 그 건강이 감사한 것인지를 모릅니다. 여러분, 아무 일도 없이 무사히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아야 합니다. 거기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문제는 깨닫는 것입니다. 이제 깊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금년 한 해도 하나님은 내게 무슨 은혜를 베푸셨으며 무엇을 주셨습니까? 이것을 바로 깨닫기만 하면 우리는 어떤 역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승리하며 기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감사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의 자비를 기억하고 주신 복을 세어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할 제목들을 정리해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신경쇠약에 걸렸습니다. 신경쇠약이 무서운 병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망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병원 치료를 받아도 아무 소용이 없던 중에 목사님과 삼담을 햇는데 목사님 감사생활 한 번 실천해 보라고 권면했습니다. 우선 "가만히 앉아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신세를 졌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기억해 보고 그 고마움을 마음에 되새겨 보십시요. 그리고 그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했는지 안 했는지를 살펴보십시요. 안 했다면 지금이라도 적은 선물이라도 마련하여 직접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십시요. 불가피하면 전화나 편지로라도 고마움을 전하시길 바랍니다"라고 권고했습니다. 한 가지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일일이 적어보고 감사하십시요.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십시요"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이것을 일일이 실천해보았습니다. 하나하나 헤아려보니 감사할 일이 너무 많은 데 먼저 놀랐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도 너무 많았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생활에 활기가 넘치고 행복이 넘쳤습니다. 삶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러는 중 신경쇠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꿈같이 다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다. 우리는 모두가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고, 오늘도 세상 사는 동안 이모저모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았습니다. 그가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바로 알아야겠습니다. 거기 참된 감사의 마음이 있게 될 것이고 그 마음이 오늘도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기 위해서는 그 깨닳은 바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변치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편으로 생각됩니다. 본문을 가민히 보면 다윗은 지금 받은 은혜를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웠던 때,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를 회고하며 찬송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에게 이 어려움들은 끝났습니다. 그는 지금 평안히 궁전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어려웠던 때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지난 날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 때의 서원을 갚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 103:2에도 보면 다윗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라고 외칩니다. 지난 날의 은혜를 잊지 아니했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그런데도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쉽게 그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한 번은 어느 시골마을에서 불쌍한 나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신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때 열 명이 모두 나병에서 깨끗함을 받았는데 주님 앞에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나환자들이 나병 고쳐달라고 애걸할 때 어떤 마음 가졌겠습니까? 아마 "이 병만 고쳐 주신다면 내 모든 것 다 드리겠다, 평생을 위하여 살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나았을 때 그 마음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모습이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부르짖을 때는 큰 목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응답 받은 후에는 그것 그만 잊어버립니다. 가난할 때 부르짖었는데 조금 부유해지고 나니 다 잊어버립니다. 눈물이 흐를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그 슬픔 벗겨주니 잊어버립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장마가 나서 물이 불은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강에는 외나무 다리가 놓여 있는데 목적지에 가려면 그 외나무다리를 건너야만 합니다. 다리 아래로는 홍수가 나서 시뻘겋게 불은 황토물이 빙빙 돌면서 흘러갑니다. 아래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조심조심 다리를 건넙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합니다. 겨우 중간쯤까지 왔는데 그만 아래를 쳐다보고 말았습니다. 보니 물살은 급히 흐르는데 정신이 그만 아찔합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데 겁이 나서 꼼짝을 못하겠습니다. 저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이 외나무 다리만 건널 수 있게 해주시면, 목숨만 구해주시면 전 재산을 다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감절히 기도하고 나니 다리도 떨리지 않고 무서움도 덜합니다. 조금씩 다시 건넙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무사히 건널 것 같습니다. 삼 분의 이쯤 왔습니다. 자신이 생깁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재산을 하나님꼐 다 바치고 나면 살길이 막막합니다. 다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반만 바치겠습니다." 몇 발작 더 가다보니 거의 다 왔습니다. 동시에 재산의 반을 바치는 것도 아깝게 생각됩니다. 하나님 삼 세 번 아닙니까? 한 번만 더 기도하십시다. "재산 1/4만 바치겠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강물에 풍덩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 빠지면서 하는 말이 "아이구 하나님 농담도 못합니까?"하더랍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죽을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을 하면 소원은 한 가지입니다. 살려만 달라는 것입니다. 아무 다른 소원이 없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모든 것 주님깨께 다 드리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은혜로 점점 병에서 회복됩니다. 회복과 비례해서 마음도 살살 변합니다. 퇴원할 때쯤 되면 벌써 처음 마음은 다 사라졌습니다. 살려주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합니다. 이러니 감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잊지 않는 마음 속에 참된 감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끝까지 자신은 포행자요, 핍박자라는 것을 잊지 아니했습니다. 끝까지 핍박자요, 포행자였는데 하나님이 사랑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에 살 수 있었습니다.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감사하는 마음은 드리는 마음입니다. 감사는 구체적이며, 또한 행동을 동반합니다. 이로써 무엇이라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행동이 없다면 감사는 거짓말일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무엇으로든지 이 사실을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시편 성도도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 앞에 갚으리로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이 은혜에 대해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드리는 마음입니다. 진실된 감사가 있을 때 마음을 드리게 되고 기쁨으로 희생하며 헌신하게 됩니다. .

    막달라 마리아는 죄인인 자기를 주님이 불러주시고 사랑하여 주심을 생각할 때,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주님을 발을 닦았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아니했습니다. 옥합의 귀한 향유를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많이 탕감 받았음을 생각할 때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드렸습니다.

    세상에서도 생명의 은인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심지어 미물인 개와 같은 짐승도 주인의 은혜를 보답할 줄 압니다. 진실로 우리도 은혜에 보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일랜드의 코-크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빌딩 4층 창문에서 몇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밑의 사람들이 모두 소리를 지르며 몸을 피하였습니다. 4층에서 일하던 한 사람이 발판에서 미끌어져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을 갔는데 한 사람 만은 피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떨어지는 사람을 향하여 두 팔을 벌려 있는 힘을 다해 받았습니다. 떨어진 사람은 안전히 살 수 있었습니다만, 받아 준 사람은 충격으로 심한 골절을 입어 평생에 불구가 되었습니다. 떨어진 사람이 불구된 은인의 일생을 돌봐 생활을 살펴 주었다고 합니다. 한 가지를 물어 봅시다. 만약에 떨어진 사람이 자기를 구해 준 사람에게 "땡큐"라고 한마디의 인사만 남기고 툭툭 털고 사라져 버렸다면 그것도 괜찮았겠는가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하겠습니까? 날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신 주님께 무엇을 드려야겠습니까? 결코 그 무엇, 즉 부분이 아니라 전체요, 마음이요, 내 자신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답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하는 마음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됨이 감사에 있습니다. 거기 또한 가장 큰 기쁨과 행복도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감사를 기뻐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 위에 더 큰 은혜를 더하십니다. 다음 주일은 감사주일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새롭게 하십시다. 받은 바 은혜, 주신 바 깊은 그 축복을 다시 한 번 헤아립시다.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감사의 헌신이 넘쳐야겠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감사가 우리 가운데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한 해의 감사절을 주셔서 감사를 다시 배우게 하심 감사합니다. 깨닫고 보면 감사할 것밖에 없고 나아가 감사야말로 능력의 삶의 원천이건만 미련한 저희들 깨닫지 못해 감사하지 못할 때 많았습니다. 이제 남은 생애 항상 주의 은혜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그 은혜를 잊지 말며 항상 그 은혜에 보답하여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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