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기에서 나온 싹 나사렛 예수(이사야 11:1-5)
  • 조회 수: 114, 2013.04.01 07:33:07
  •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오늘 사순절 시리즈로 네 번째가 되고 오늘 부활주일 메시지로서「줄기에서 나온 싹 나사렛 예수」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인용된 성경은 요한복음1장 45절로 51절에 있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이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하고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 대화를 시작합니다. 이에 빌립의 말을 들었던 나다나엘은 46절에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사렛은 거룩한 예루살렘도 아니요 또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탄생하기로 예언되어 있었던 베들레헴도 아닌, 그야말로 상업의 도시요 환락의 도시요 죄가 많고 허물 많기로 유명해서 종교적으로 특히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나타낼 만한 자랑할 만한 도시가 아니고 오히려 부끄러운 그런 저질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의 대답이 나사렛같은 곳에서는 의로운 자가 나실 수가 없다 라는 뜻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여러 선지자의 글을 빌립도 나다나엘도 읽기는 많이 읽었던 모양이지만, 오늘 본문으로 채택된 이사야서 11장 1절 이하에 있는 글에 대하여서는 읽기는 읽었어도 참뜻은 아마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가지가 나서 결실할 자라 라고 1절에 설명하고 있고, 그 2절부터는 그러한 자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설명했는데 그러한 자는 곧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바쁘게 그저 읽어가시면 무심코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마는 글은 글대로 읽을 수 있으나 이 글은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나무에 맞지 않다 그것입니다. 싹이 씨앗이나 뿌리에서 나와야지 줄기에서 싹 나오는 것 봤습니까? 그런 꽃나무도 없고 그런 어떤 과일 나무도 없습니다. 싹은 그 씨앗이나 혹은 뿌리에서 처음 싹이 나오는 것이지 다 자란 나무, 줄기에서 싹이 바로 나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또 가지라면 줄기에서 나무 둥치에서 가지가 나와야지 어찌 뿌리에서 가지가 바로 나오는 그런 나무가 있습니까? 뿌리에서 땅을 뚫고 나오는 것을 혹은 새싹, 혹은 새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가지가 바로 나올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세상의 창조된 여러 수목 가운데서 이런 일은 결코 없는데 그러나 선지자들의 글로 이러한 자가 탄생할 것이니 그는 곧 하나님의 아들일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글을 그냥 읽으면서 대강 넘어가 버렸으면 모를 것이로되 이 상식적이지 아니한, 다시 말씀드려서 줄기에서 싹이 나며 그리고 뿌리에서 바로 가지가 나버릴 사람, 그와 같이 나타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 예언을 따지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혹은 깨닫지 못하고 넘어갔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지금 나사렛에 오셔서 소개되는 이 분은 이미 나이 삼십이 되셔서 나타났습니다. 이 때에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싹으로 난 것도 아니고 가지로 바로 나오게 된 것이지요.
    이 상식적이지 않는 이 특별난 사람은 오늘 본문의 이사야서 11장 2절로 5절 사이에 살펴보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총명의 신이 그에게 임하였고 공의로 판단하시는 그야말로 우리의 주님인 것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 선지자들이 말한 사람이지요.
    나다나엘이 이 이사야의 글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나이 삼십 되어 불쑥 나타난 이 사람이 바로 그이인 줄 알았어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로서 나타나지 아니하고 출생으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삼십 되어 나타난 이 사람이 바로 그인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 줄기에서 날 수 있다 라고 하는 싹, 줄기에서 싹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줄기에서 혹은 순은 나올 수 있겠습니다마는 줄기에서 싹 나려고 한다면 그 줄기는 어떤 상태여야 합니까? 깨끗한 줄기는 싹을 낼 수가 없습니다. 상처가 나고 그리고 썩어야지만 씨가 발아하게 되고 그리고 싹이 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줄기라고 하는 바로 그 대상은 즉 이 새싹을 발아시킬 수 있는 이 줄기라고 하는 이것은, 비록 산 나무에 붙어있는 한 부분이기는 하더라도 싹을 낼 수 있는 줄기였다면 썩고 그리고 상처 나고 이러한 상태가 아니면 가능치 않았으므로,
    이 빌립이나 나다나엘이 이 이사야의 글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오히려 나사렛같은 데서 싹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야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바로 알았을 것이고 "그렇도다. 이곳이 나사렛이기 때문에 허물 많고 죄 많은 도시이기 때문에 바로 이런 곳에 주 예수의 싹이 움틀 수가 있었다." 이렇게 했어야 되는 것이지요.

    참고적으로 신학적인 내용 하나 말씀을 드리면 신약시대 제자들이나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구약을 많이 인용을 했습니다. 그 때 구약이 창세기 출애굽기 혹은 몇 장 몇 절이 표시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말씀하시기를 "시편에" 또 "선지자의 글에" 이런 식으로 하시면서 그 신약에서 구약 때의 글을 많이 인용한 것이 있습니다.
    그 인용된 것은 우리 신약을 읽어가다 보면 난을 한 단 내려 가지고 쓴 것은 다 구약에 이미 기록이 되어 있는 선지자의 글을 사용했다 라는 뜻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사용된 제자들이 인용을 했거나 예수님께서 시편에 혹은 선지자의 글에 라고 하면서 구약에 있었던 그 글 내용을 인용한 경우는 반드시 다 있습니다. 구약에 없는 게 없습니다. 반드시 있어야지만 신구약이 맞아떨어집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장 23절에 보면 예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억되시면 아멘 합시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애굽으로 피신하였다가 헤롯이 죽은 후에 나사렛 동네에 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이미 구약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러라"라고 했는데 구약 전체를 찾아보아도 이 글만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글만은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모든 신약에 인용된 것을 다 찾아서 구약에 찾았지만 이것이 나오지 않아서 제가 글을 잘못 읽거나 정독을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해서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여러 신학생들에게 숙제를 주었습니다. 이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이 말씀을 구약에서 찾아내면 몇 장 몇 절이라는 것만 찾아내면 그냥 무조건 이 학기는 패스시켜준다 해서 아마 여러분 중에서도 그런 숙제를 받아 보신 분이 계실텐데 아무도 이 말만은 찾아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참 선지자들이 분명히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라고 했는데 왜 없을까 고민 고민하던 중에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적에 참 힘들게 갔지만 그 동네에 가서 나사렛 동네를 방문하면서 이것이 구약 어디에 있다 라는 것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냥 경비도 들고 고생도 스러웠지만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나사렛이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이냐 하면 "줄기에서 난 싹"이 나사렛이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나사렛 동네는 이사야 11장 1절의 말씀이 이루어진 이름이 동네 이름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도 좀 뜻으로 이름을 짓습니다마는 저쪽 지방으로 가면 이런 이름이 있지요. 영화 제목으로도 기억하실겁니다마는 "늑대와 춤을", 저는 늑대와 춤을 해서 늑대와 춤을 추는 것인 줄 알았더니 사람 이름이 "늑대와 춤을" 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사람 이름이 늑대와 춤을 인가 했더니, 늑대와 춤을 잠시 춘 그런 사람이라서 그것을 쳐다보았기 때문에 늑대와 춤 춘 사람이라고 해서 이름을 그냥 "늑대와 춤을" 이렇게 지은 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이름을 짓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나사렛이란 이 단어는 어떤 뜻을 가졌느냐? 줄기에서 나온 싹,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줄기에서 나온 싹, 뿌리에서 나온 가지, 바로 이 뜻으로 나사렛이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라고 본다면 신약에서 사용한 모든 말씀들이 구약에 다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저는 그때 참 만족스러웠던 그런 일이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동행했던 분도 있습니다마는 그때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릅니다.
    이 나사렛 사람 예수는 그 나사렛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부활의 새 싹이 되셨으며,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줄기에서 나오셨다는 겁니다. 나사렛 동네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 딴 데서 출생해서 어른이 다 되어 바로 능력이 나타날 때 능력의 꽃으로 그냥 나타났다 그겁니다. 그러면 능력의 꽃으로 나타나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나타나야 할 곳이 썩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나타나야 하셨던 곳은 능력이 필요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이 생각했던 것처럼 나사렛이란 동네는 의로운 자가 태어나거나 의로운 자가 여기에 거할 수 없는 곳이라고 자기는 생각했지만, 성경은 미리 말하기를 의로운 자는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의롭지 못한 곳에 싹으로 나타나서 의롭지 못한 곳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구원을 위하여 나타나신다고 예언되어 있었다 그것입니다. 이 나다나엘은 그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야말로 나이 한 살로 무균상태인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오신 게 아닙니다. 어머니 태에서부터 출생한 것은 저 베들레헴이었고 지금 나사렛은 삼십이 되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줄기에서 싹이 나오는 것처럼 나와 버렸고 뿌리에서 순이 아니라 바로 가지가 나오듯 예수님이 이 나사렛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고 부활의 싹이 되어 나타나신 그 현장은 어떠했느냐? 무균질의 어머니의 태와 같지도 아니했고 한 살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 부활하셨느냐? 썩어 냄새나는 무덤에서 부활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의 죄악이 극에 도달했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마저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이런 굉장한 어둡고 두렵고 슬프고 정말 외롭고 그리고 절망이 가득찬 그러한 곳, 어떠한 곳이냐? 바로 냄새나는 나다나엘이 생각하는 것처럼 더러운 곳 허물 많은 곳 그래서 이러한 곳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날 수가 없다 라고 했지만 성경은 미리 말씀하시기를 그러한 곳이기에 찾아가서 싹으로 나타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난 것입니다. 아니 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나사렛이었기 때문에 의로우신 이가 그곳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썩은 곳에 새싹으로 나셨던 것입니다. 그 썩은 곳이 새싹을 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국에 이민을 간 어느 목사님 가정의 얘긴데 오늘 칼럼 난에도 실었습니다마는 이사를 가 보니까 뒤뜰 한 쪽에는 라일락꽃이 피어있고 아마 지금쯤 되는 모양입니다. 라일락꽃이 피어 있는데 그 반대켠에는 무엇을 하던 다음에 그렇게 버려두었는지는 모르지만 땅이 거무스레하고 오물 모아두었던 곳처럼 생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이사를 대략 마치고서 그 거무스레한 그곳에다가 부서진 의자같은 것을 오히려 갖다 놓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피곤한 사람들이 새 이삿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그 뒤뜰 라일락 향기가 집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그 뒤뜰로 나가보았더니, 라일락은 참 좋은데 거무스레한 곳에다가 부셔진 의자 조각도 몇 개 던져 놓았더니 이웃에 사는 사람이 새벽 일찍부터 자기 집에 있는 쓰레기를 잔뜩 갖다가 그 거무스레한 뒤뜰에다 쌓아두었습니다.
    아주 기분이 좀 나빴습니다. 그래서 "이것 참 왜 이런가" 했더니 그 뒷날에도 또한 쓰레기를 거기다 갖다놓습니다. 자기집 쓰레기도 아닌데 이웃 사람들이 이사온 자기집 뒤뜰에다 갖다버리니 "이것 정말 내가 소수 민족으로서 이사를 왔기 때문에 이 백인들이 나를 무시하는가"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것을 본 그 목사님의 아들이 그 아들은 영어도 잘하고 그랬던 모양인데 "내가 좀 따져야 되겠다. 미국에서는 이럴 수가 없다."라고 하면서 그 옆집으로 가서 막 따지려고 성을 내어 가지고 이제 뛰쳐나가려고 하는데 그 사모님이 지혜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아들아, 오늘 당장 가서 따지지 말고 내일 아침에는 이렇게 해 보렴. 뒤뜰에 일찍 나가서 옆집 사람이 쓰레기를 가져오기 전에 옆에 있는 라일락을 꺾어다가 그 쓰레기 위에다가, 그 사람이 갖다 놓은 쓰레기 위에다가 갖다 놓아보렴."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의 말씀이 뜻이 있다 싶어서 이 깨끗한 라일락을 갖다 놓지 하고서 꺾어 가지고 이제 그 쓰레기 무더기 위에다가 갖다 놓았습니다. 다음날 나가보았더니 옆집에서 라일락이고 뭐고 그 위에 상관없이 또 오물을 갖다 쌓아 두었습니다. 그래서 또 따지려 가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하는 말이,
    "라일락의 향기가 아직 부족했던 모양이구나. 오늘은 또 더 싱싱한 라일락 향이 발하는 라일락을 갖다가 놓아두어 보렴." 해서 이틀 삼일 계속해서 라일락을 갖다 놓았더니, 그 옆집에서 쓰레기를 갖고 오던 사람이 자기도 그저 미안했던지 꽃 위에 쓰레기를 자꾸 덮을 수가 없고 또 갖다 덮으면 또 그 위에 꽃이 있고 꽃이 있고 하니까 그 사람이 그 깨끗한 꽃을 더 이상 덮을 수가 없어서 그저 그 뒤부터는 갖고 오지 않았다 라는 이런 얘기를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어쩌면 참 가슴 뭉클하게 하는 그런 말씀인데, 우리는 그동안 사순절 메시지를 통해서 연한 순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 이사온 이민 목사의 옆집 아주머니처럼 피해를 주어도 연한 순이신 주님께서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거리에 들리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어야 되는데 꺾지 않으시려고 꺼져가는 등불을 꺼버리고 새 등을 준비해야 되는데 그 불을 끄지 않으시려고, 참으로 우범지역에 가 있는 딸을 찾아내기 위해서 딸 대신 자기의 사진을 곳곳에 갖다 걸어서 모든 창피를 딸 대신 자기가 감당했던 이 브라질의 한 여인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의로운 성스러운 도시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런 분은 이런 곳에 오실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나사렛같은 동네에 나타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머니의 태에서 바로 부활해 나오신 것도 아니고 깨끗한 어떤 병원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무덤과 절망과 죄악이 활개를 치는 그런 곳에서 부활해 나와 주셨습니다. 어리게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줄기에서 싹이 나왔습니다. 어떤 줄기에서 나왔느냐? 가장 험하고 허물 많고 죄스러운 그런 줄기였기 때문에 싹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나사렛을 보고 이런 내 동네에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고 나다나엘같은 생각을 하십니까? 이제 생각을 바꾸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보니 나사렛 같습니까? 여러분의 경제적 구조를 보니 나사렛 같습니까? 여러분 주위의 모든 환경을 보니 나사렛 같습니까?
    자녀가 나사렛 같습니까? 남편이 나사렛 같습니까? 아내가 나사렛 같습니까? 썩어가고 있습니까? 무너져가고 있습니까? 거룩하다 일컬어지는 예루살렘이기는커녕 미리부터 예언되었던 베들레헴이기는커녕 나다나엘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렇게 추한 곳에 의로운 이가 난다니 그 말이 되느냐 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현장이 나사렛 같습니까?
    전에는 믿음이 좋았으나 지금 여러분의 줄기 가운데 토막은 오히려 시험에 들고 있습니까 유혹을 받아 있습니까? 전에는 충성하였으나 지금은 충성하지 못하고 전에는 겸손하였으나 지금은 교만하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지금 그 마디가 여러분의 그 줄기가 처음에는 좋았으나 지금은 바로 나사렛처럼 되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나사렛처럼 되어 있는 그 동네를 여러분이 발견하면서 "무슨 선한 것이 이 내 동네에 나겠느냐?" 그리하지 마시옵소서. 오히려 여러분의 현장이 나사렛처럼 되어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현장에 나사렛이 있다면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나사렛이라는 현장이었기에 생명으로 싹이 되어 여러분의 그 현장에 발을 붙이고 피어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나다나엘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줄기에서 싹이 나며 뿌리에서 바로 가지가 난다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 칭할 것이라는 그대로 나사렛이란 험하고 영적으로 희망없는 도시에서 나타나 주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의 나사렛같은 이 현장에 부활의 주님께서 갑자기 가지가 되어 나타나고 썩어 있는 우리의 현장에 갑자기 한 싹이 되어 나타나 우리들의 위에 한 송이 백합화처럼,
    그래서 오늘 저는 이 라일락을 바쳤는데 저 뒤에서 보니까 라일락만 있는 것 같아서 "이 라일락 중에서 백합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제가 얘기하면서 제 사무실에 백합화가 있기에 "이것 좀 강대상에 놓아두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더니 와서 가까이 보니까 이 라일락 사이에 백합이 다 피어 있습니다. 여러 꽃들 가운데 여러 백합이 피어있는데 저와 여러분 수많은 성도님들의 현장에 나사렛같은 형편이 있다면 오늘 이 이천년 부활의 생명의 새싹이 여러분의 나사렛에 피어나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썩은 줄기에 싹이 나면 싹이 얼마 있다가 줄기가 썩었으니 그만 되겠지 여러분 생각하지만, 여러분 오물 위에다가 꽃을 갖다 두면 그리고 그 꽃이 계속 피게 된다면 어떻게 되느냐? 오물은 더이상 오물이 아닙니다. 꽃이 없으면 오물이지만 꽃을 피우는 오물은 오물이 아니라 거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꽃을 위하여 꼭 필요한 거름이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줄기에서 난 싹, 줄기가 썩었으니 싹이 났다 하더라도 잠깐 났다가 쓰러지지 않겠는가 여러분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이사야서 11장 뒤에 10절에 가서 보면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그랬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1절에는 줄기에서 한 싹이 나왔는데 줄기에서 싹이 나왔지만 그저 없어질 날아가버릴 그런 줄기에서 나온 싹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싹이 줄기에서 나서 피는 동안에 바로 그 날에 그 싹이 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새 싹이 되어 나사렛같은 여러분의 현장에 오늘 나타나셨다면 영접하고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후로는 썩어있는 여러분의 줄기가 아니라 그 예수의 새 싹의 새 뿌리가 뿌리를 여러분에게 내리게 된다면, 여러분의 나사렛 현장은 이제는 나사렛이 아니라 거룩한 예루살렘성과 같이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이천 이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을 축복하고자 합니다. 백성들로부터 죄인이라 취급받아서 백성 앞에 제대로 나서지도 못하던 세리장 삭개오, 그는 물질은 많이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그런 대상에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새싹 되신 주께서 "삭개오야 뽕나무에서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서 유하여야 하겠다." 하며 주님이 그 욕먹고 있는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한 송이 백합처럼 꽃으로 심기어지니 그 집이 얼마나 기쁨이 넘쳤던지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오히려 그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데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은 여기 있도다." 말씀했으니,
    여러분에게 물질이 혹 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 취급받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그런 분들이 계셨다면 이 이천년에 나타난 백합처럼 피어나신 주님의 이 새 싹을 여러분의 그 정말 험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그 줄기에 심어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된 순간에 어제의 삭개오가 아니라 오늘의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영광스러운 삭개오가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 오늘 부활의 새싹 되어 여러분의 그 현장에 있어서, 삭개오의 집처럼 삭개오의 즐거움처럼 그리고 삭개오의 그 권위가 위상이 높아졌던 것처럼 오늘 이후 주 예수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밤새워 그물을 던졌으나 잡은 것이 없는 제자, 그래서 빈 그물만을 씻고 있었는데 주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며 그들 앞에서 지시하시니 나가서 다시 그물을 던지매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들었으나 찢어지지 아니하고 옆에 있는 동무의 배까지 불러서 그 고기를 담을 정도가 되었다는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낮이고 밤이고 남편뿐만 아니라 부인까지도 열심히 나가서 일을 하고 사업하고 또 여러 가지 이 재산을 키워보겠다고 하다가 큰 실패를 하고 제자처럼 빈 그물만 털고 씻고 있는 여러분의 형편이 되어 있습니까? 경제가 그렇게 어려움에 빠져있는 여러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그런 경제상황은 예루살렘도 아니요 베들레헴도 아니요 나사렛입니다. 썩어갑니다. 죽어갑니다. 내어놓을 수 없이 부끄럽습니다. 주님은 그런 현장에 싹으로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그런 썩어가는 줄기에 싹으로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을 여러분의 그런 썩어가는 그런 망해가는 현장에 한 송이 꽃이 되어 피도록 하시고 아멘으로 받아드려 붙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현장은 더이상 망해가는 현장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놀라운 복이 이 이천 부활절에 여러분의 생업의 현장에 부요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병들어 죽고 나흘이나 지나서 썩어 냄새나던 나사로 그 누이들이 실망하고 웁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무덤 속에 들어가서 냄새를 밖으로 풍겨냈습니다. 그 돌의 문을 열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마는 갑자기 나타나신 주님, 뿌리에 가지처럼 나타나신 주님, 능력 있는 자가 되어 바로 나타나신 주님, 그가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시니 나사로는 순종하여 걸어나옵니다. 수족을 쌌던 것을 풀어 걸어다니게 하라 하여 그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 걷습니다. 그 누이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육신이 병들고 쓰러져가고 있습니까? 전에는 팔팔하게 힘을 썼으나 힘을 쓰지 못하는 지체를 가졌습니까? 아니 피가 통하지 않아서 손발이 저리고 그리고 어쩌면 곪아들어가고 썩어들어가고 눈만 감으면 바로 냄새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입장에 계신 분이 계십니까? 아니 계시겠지요. 계시기에 오늘 부활의 주님이 오늘 싹으로 소개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나다나엘과 빌립은 이러한 곳에는 거룩하신 분이 안 오신다고 했지만 성경은 이미 말하기를 그러한 곳이기에 싹이 피어날 수 있다 라고 했으니, 병들어 죽고 나흘 지나 썩어 냄새가 나던 나사로의 집에 주님이 그 무덤 앞에 서시니 큰 기쁨이 그 집에 가득찼던 것처럼 여러분을 위하여 축복합니다.
    오늘 부활하신 싹이 되신 주님의 그 부활의 생명으로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그 나사렛같은 현장에 오늘 주님이 서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주님이 서신 것처럼 여러분의 그 썩어져가는 여러 환경 앞에 오늘 주님이 말씀과 함께 소개되어 섰습니다. 서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주님이 섰다면 이제는 그 주님이 싹으로 나시더니 바로 11장 10절에 나타난 대로 그 날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그분이 떠나가지 아니하고 여러분이 붙들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면, 여러분의 땅은 오물이 아니라 쓰레기가 아니라 거무스레하던 여러분의 그 땅은 그를 꽃피우면 그를 피워낼 수 있는 거름밭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슬픈 자가 아니요 부활의 생명의 그 기쁨과 함께 그 기쁨이 오늘 우리 가운데 주의 말씀과 함께 소개되었으니 여러분의 나사렛 현장에 모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산업과 또 여러분의 앞날에 그리고 영원한 날에 있게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51 장 찬송합시다.

    부활하신 주님의 새 싹이 여러분의 나사렛 현장 잘 나가다가 중간에 썩어져버리는 어쩌면 꺾여버릴 장래가 없어져버릴 그런 썩은 줄기에 새 싹이 났는데 그 싹을 찬양하며 거룩한 순서들로 믿음을 가지고 붙드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환영을 받으며 여러분에게 거하시게 되는 주님께서 그 날에 그의 뿌리를 내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의 뿌리가 내려지면 우리는 그의 나무에 속한 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부활 축하를 위하여 헌금한 예물을 주께 봉헌하고 축복하는 순서를 갖겠습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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