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의 목회철학을 배우라(행20:1-38)
  • 조회 수: 63, 2013.07.04 07:34:26
  •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 선생에 의하여 1922년 5월 1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날은 국제노동절이라 당시 일본이 군중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허용치 않았습니다. 그후 1928년 5월 첫째 주일에 어린이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것도 얼마간 허용하다가 1937년에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1946년 5월 첫째 주일에 어린이를 위한 다채로운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교회는 5월 첫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켰습니다. 그 다음해 1947년 5월 5일을 정부가 어린이 날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가 1975년에 국가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어린이에 대한 문제점이 무엇인가? 첫째, 핵가족제도입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뀜에 따라 혈통적 수직개념에서 할아버지를 잃었고, 수평개념에서 산아제한으로 형제와 자매를 잃게 되었습니다. 옛 가정은 인성교육의 장이었습니다. 둘째, 급변하는 사회구조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정보사회로 바뀌었습니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신선함이 산업사회 부산물로 인해 환경이 오염되고, 정보사회를 통해 노동력과 제도권의 파괴현상으로 가치관의 혼돈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셋째, 타락한 세속문화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열린 사회가 되어 버려 아무런 여과 없이 청소년에게 노출됨으로 유해한 오락, 폭력, 음란에 빠져 들어가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산업사회와 정보사회로 나아가므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제도가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남으로 출산율이 낮아지고 자녀양육의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놀이방과 어린이집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를 세속 기관에 맡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원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밀알선교원의 교육 목표는 이러합니다. 첫째, 영성회복입니다. 매일 아침에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합니다. 둘째, 공동체 교육입니다. 핵가족 자녀들이 선교원에서 형님, 언니, 친구, 동생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인성교육의 장입니다. 요즈음 자녀들은 무리와 둥지를 잃어버려 올바른 예절교육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예절과 인사훈련을 시킵니다. 넷째, 달란트 개발입니다. 상담을 통한 숨은 재능을 찾아서 적성에 맞는 학습훈련으로 창의력을 개발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두고 청년의 문제가 무엇인가? 바울은 제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드로아에 들렸습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9)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청소년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첫째, 창터에 앉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곳은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인 회색분자입니다. 둘째, 말씀 앞에 졸았던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목숨을 걸고 사력을 다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는 말씀에 아무런 관심이 없이 졸고 있었습니다. 셋째, 창밖으로 떨어진게 문제입니다. 안으로 떨어졌으면 불행중이나마 다행할 것인데 밖으로 떨어짐으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경건한 예배시간에 얼마나 방해가 되었을까? 이제 바울은 드로아를 떠나 밀레도에 와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마지막 고별 인사를 하고 주님의 교회를 그들에 부탁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목회철학을 배우고자 합니다. 

    눈물로 섬긴 목회

     먼저 18-20절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했습니다.

    초지일관된 사역입니다. 18절에서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행한 것"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함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고 했습니다. 변함없는 사역입니다. 주님도 공생애를 마칠 때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요13:1)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히13:8) 초지일관된 변함없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겸손과 눈물의 섬김입니다. 19절에서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남을 섬길 수 없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바울은 주님의 모습을 그대로 배웠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눈물 없이는 섬길 수 없는 자리입니다.

    목양일념입니다. 20절에서 양무리의 유익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저의 어릴 때입니다. 어머니가 한복을 입을 때 띠로 가슴을 졸라맵니다. "어머니 그만 당기세요" 하면 어머님은 "여자가 가슴이 나오면 부끄러운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끄러워 감추는 가슴도 자식이 배고파서 울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젖을 꺼내어 먹입니다. 바울의 목회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명자 목회

     다음으로 22-24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심령이 사명에 매임을 받았습니다. 22절에서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22)라고 했습니다. 그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임으로 피할 수 없습니다. 많은 종들이 만류했으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가롯 유다는 은 30에 사로잡혀 예수를 팔았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총독의 자리에 꽉 잡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에 사로 잡혀 있는가?

    우리 모두 사명자가 됩시다. 24절 말씀은 우리 교회의 좌우명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사로잡혀 밀알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모든 인생은 달려갈 길이 있고, 마쳐야 할 목표가 있고, 걸어야 할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사명을 위해 생명을 바칩시다. 목회는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언젠가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세계 석학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인류 미래학에 대한 심포지움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이 회에서 수많은 토론과 회의를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이 무엇인가? 「인류미래에 가장 무서운 적은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하려는 용기의 상실」이라고 했습니다. 사명을 발견하면 목숨을 거는 담대한 용기가 생깁니다. 

    이단을 경계하는 목회

     본문 28-29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고 했습니다.

    이단을 철저히 경계합시다. 외부인이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영적 표지판이 분명해야 합니다. 교리(dogma)와 신앙고백(comfesstion)과 믿음의 색깔(colour of faith)이 분명하여 그 정체성(identity)이 확실하게 들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울타리를 가지고 있으면 함부로 이단들이 칩입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참교회와 거짓 교회를 무엇으로 구분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고 했습니다.

    이리는 언제 와서 무엇을 하는가? ? 파수꾼이 잠을 잘 때옵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잠을 잘 때 이단이 일어납니다.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무력해질 때 사단이 득세합니다. 초장을 더럽힙니다. 푸른 초장의 풀들을 밟아서 거름더미로 만들고 잔잔한 시냇가를 오염시켜 먹을 수 없는 폐수를 만들어 버립니다. 사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믿음이 자라지 않게 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시험들게 되어 있습니다. 양을 도적질 해갑니다. 새끼 양을 잡아 먹고, 어미 양을 도적질해 갑니다. 목자는 목숨을 걸고 양떼를 지켜야 합니다.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삼상17:35) 

    훈계의 목회

     본문 31-32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양무리에게 적절한 훈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여 양무리를 사명자로 세울 것인가? 방법은 눈물입니다.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31)해야 합니다. 탕자 어거스틴을 변화시킨 것은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이었습니다. 눈물의 기도보다 더 큰 위력은 없습니다. 우리는 훈계할 때 억눌린 감정이 폭발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치료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대상은 각 사람입니다.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고 했습니다. 훈계의 대상은 각 사람인 개인입니다. 공회 앞에서 무안을 주어서도 안됩니다. 상대방의 프라이버시 문제에 침해가 가서는 않도록 해야합니다. 목적은 세우는 것입니다. "능히 든든히 세우사"(32)라고 했습니다. 훈계는 사람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만약 세울 수 없으면 훈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훈계를 받기까지 자랍시다. 저가 군에 있을 때입니다. 그때 야구를 했던 분이 입대해서 저와 같이 군생활을 했습니다. 야구 선수들이 벧트를 잡고 그라운드에서 뛰기까지는 매일 많은 몽둥이에 맞아야 한다고 합니다. 맷집 훈련을 키운다는 것입니다. 영적 믿음의 사람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크고 작은 시험들을 믿음으로 잘 참고 이겨냈습니다. 이것이 선진들이 가르쳐 준 신앙의 전통입니다. 

    모본을 보이는 목회

     마지막으로 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악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성숙한 성도가 베풉니다. 어린아이를 키워보면 무엇이든 잡으면 입으로 가져갑니다. 이것이 미성숙한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다가 조금 자라면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가로챕니다. 이제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철이 들면 체면을 차립니다. 그러다가 완전히 성숙하면 옆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합니다. 우리가 미성숙할 때는 받는데서 즐거움을 느겼으나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베풀고 섬기는데서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손」은 엘버트 듈러의 작품입니다. 그와 그의 친구가 가난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친구가 와서 "듈러야 너는 공부하라 내가 너 학비를 벌어 줄게 그 후에 내가 공부하면 돼 잖아"고 했습니다. 그래서 듈러는 미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그 친구는 듈러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식당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듈러가 졸업할 무렵 그의 작품도 제법 팔렸습니다. 그는 그 돈으로 친구 등록금을 주려고 찾아갔습니다. 그때 그 친구는 식당 구석진 곳에서 듈러를 위하여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듈러는 감동을 받아 그것을 한폭의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기도하는 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회는 목을 거는 겁니다. 하나님이 맡겨준 양무리를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새벽기도로 소문난 서울 명성교회를 담임한 김삼환 목사님의 목회철학은 「머슴 목회론」론입니다. 무욕의 목회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명일동에 종소리가 울러 퍼지게 하자"고 지은 명성(明聲)이 한국과 온 세계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admin 63 2013.07.04
125 admin 203 2013.07.01
124 admin 176 2013.05.27
123 admin 41 2013.05.27
122 admin 67 2013.05.27
121 admin 194 2013.05.27
120 admin 108 2013.05.27
119 admin 47 2013.05.27
118 admin 185 2013.05.27
117 admin 36 2013.05.27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