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안에서의 가정(골3:18-21)
  • 조회 수: 172, 2013.07.27 21:13:37
  • 윈스턴 처칠이 세기의 위인으로 불리며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런던의 한 신문이 처칠에 대해 조사했는데,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가르친 선생들을 조사해서 '위인을 만든 스승들'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신문을 읽고 처칠은 메모를 한 장 신문사에 보냈다고 합니다. '귀 신문사에서 조사한 조사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스승 한 분이 빠졌습니다. 그분은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든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중학생 때의 잊을 수 없는 회고담을 썼습니다. 자기가 14살이고 동생이 11살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가 서커스에 데려 가시겠다고 하셔서 모두들 흥분해 있었습니다. 그 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친구인데 중요한 의논이 있으니 곧 나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곁에서 말을 합니다. '중요한 일이니 나가 보세요. 서커스는 또 올거예요' 형제들이 실망하고 포기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보, 서커스는 또 올 것이지만 저 아이들의 소년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아요. 사업도 중요하지만 아이들과 약속은 지켜야지.' 이 말에 중학생 소년이었으나 얼마나 기쁨과 감동을 받았던지 고든 박사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그 사랑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드립니다. 뉴욕주의 버팔로라는 곳에 한 불행한 가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관심한 부모 밑에서 자라난 십대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의 돈을 훔쳐서 나가서 창녀들과 놀다가 성병을 얻고 몸과 마음이 병들어 소년교도소에서 몇 해를 살았습니다. 그후 결혼을 했으나 첫 아이를 낳다가 아내는 죽고 아이는 정신 질환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청년은 자살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의 아들이 청년으로 성장한 어느 날, 미국 제 25대 대통령인 맥킨리 대통령이 그 마을을 방문하게 됩니다. 대통령이 환영인파와 악수를 나눌 때 그는 권총을 꺼내어서 쏩니다. 아무런 감정도 누구의 사족도 받지 않은 범행이었습니다. 당시 심리학자들은 엉뚱한 파괴행위의 뿌리를 전적으로 그의 가정 환경에 두었습니다.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이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아주 복잡한 연결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처칠이나 고든 박사와 같이 사랑이 많은 부모 밑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사회에 좋은 공헌을 하는가 하면,
     무관심한 부모 밑에서 자라난 아이가 대통령에게 총을 쏘는 무서운 결과를 빚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가정과 가정이 얽혀서 한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룹니다.
     오늘 본문은 가정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을 무시한 성도의 생활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주안에서 가지는 가정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살펴보면서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고 주안에서 아름다운 가정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역시 <주안에서>라는 단어입니다.
     사실 가정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불신자의 가정과 믿는 사람의 가정이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서 <주안에서>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자기의 위치에서 상대방에게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안에 있는 남편은 비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아내를 사랑하고,
     주안에 있는 아내들 역시 다른 아내들보다 더 복종하고,
     주안의 부모는 자녀 양육에 더 관심을 가지고,
     주안에 있는 자녀는 더욱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안에서의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20-21절을 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자녀로서 해야 할 순종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순종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도둑질 해 오라고 해도 순종해야 합니까?'하고 반문이 제기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에 대한 순종의 자세만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 부분에 아주 좋은 대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예를 든다면 부모가 자녀에게 도둑질을 시켰다고 합시다.
     그러면 가장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녀의 자세는
     '아버지 저는 그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둑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 양심에도 그 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제 마음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한다면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아름답게 유지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이것은 우리에게 종종 일어나는 사건들에 접목할 수 있습니다.
     제사에 절을 하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금하셔서 할 수 없지만 저는 부모님께 순종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 등등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거기에 순종할 수 없으나 그렇지 않은 이상 주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을 먼저 줍니다. 
     그리고 뒤 이어서 부모들이 자녀에게 취할 태도가 나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기에 이 부분을 좀더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강조하고 뒤를 이어 아비들, 곧 부모들이 자녀에게 대해야 할 태도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로서의 자녀에 대한 역할은 정말 어렵습니다.

     역사가인 덩클 교수는 이런 지적을 합니다.
     프랑스에 69명의 왕이 있었는데 신하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왕은 3명뿐이었다.
     그런데 그 3명은 친어머니에 의해 양육된 왕들이었고, 나머지 66명은 유모 계모 가정교사에 의해 양육된 왕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통계는 부모의 참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왕이 훌륭한 제왕이 되었다는 결론을 주었습니다.
     갈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부모가 좋은 것을 심으면 자녀에게 좋은 것을 거두고,
     부모가 나쁜 것을 심으면 자녀에게서 나쁜 것을 거둔다는 논리입니다.
     자녀들의 언행은 주로 자라날 때 그 부모에게서 배웁니다.
     그래서 '사위를 고를 때는 그 아버지를 보고, 며느리를 맞이할 때는 그 어머니를 보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엡6:4에서 오늘 본문과 비슷하게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비들아'라고 하는 것은 자녀 교육을 어머니들에게만 떠넘기는 아버지들에게 마치 일침을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범죄할 때에,
     성경은 그 홉니와 비느하스의 어머니의 교육이 잘못됨을 지적하기보다는 그 아버지인 엘리를 더 지적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잠언에 보면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고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 등등,   
     성경에 나타나는 훌륭한 위인 뒤에는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교육은 부모가 동시에 가져야 할 책임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가지는 책임이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엡6장에서 바울은 격노케라는 단어대신 노엽게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립니다.
     어린 사람이 어른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들었어도 어른이 아이들을 노엽게 한다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노엽게 한다'는 말은 '자극시킨다.' '격분시킨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비록 자기의 자녀라고 해도,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해서 그 부모의 말과 행동에 자녀가 격분하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의 권위를 남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마땅히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권위가 남용될 때 자녀를 격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이 자녀에게 야단을 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요즈음은 너무 버릇없게 키워서 오히려 문제가 됩니다. 
    이 말은 부모의 권위를 내세워서 임의로 자녀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권위와 명령권을 주었다고 해서 자녀를 억압시키거나 혈기를 부리면서 구타하는 것은 바로 자녀를 격노케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주어진 책임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라면 부모에게 주어진 책임 역시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화가 난다고 함부로 자녀에게 언행을 하는 것은 자녀를 격노케 하고 낙심하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것을 한 번 가라앉힌 후에 징계를 해도 해야 마땅합니다.
     오늘 본문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에게 낙심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낙심한다는 것은 기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자녀들에게 화가 나는 대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한 것으로 인해서 자녀들이 자아상이 잘못된 경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주어진 두 번째 책임이 있습니다.
     엡6:4을 보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이 부모의 책임임을 말해 줍니다.

     부모의 욕심, 부모의 고집, 부모의 권위로써가 아니라 주님의 교양과 주님의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모의 욕심으로 자녀를 키우는 문제는 너무 만연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교양과 훈계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교육을 뜻하는 말입니다.
     딤후3:16에서는 교훈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교양이라는 것은 성경 말씀이 교과서가 되어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교과서로 삼으면 하나님을 배우고 성령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배우게 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게 됩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부모는 자녀의 소유주가 아닙니다.
     자녀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부모는 그 자녀를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할 의무를 가진 자입니다.
     
     또한 세상 중심적으로 가르쳐서도 안됩니다.
     세상이 다 그렇게 하니까 그냥 세상 흘러가는 대로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날 샤프(Shaepe)에게 젊은 부인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어려서 학교 공부를 하기에 바쁘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은 철이 들 때까지 미루어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때 샤프는 아주 엄숙하게 대답했습니다.
     '자매여 당신이 아이에게 지금 가르치지 않으면 마귀가 자기 방법을 가르칠 것입니다.'

     주님의 교양으로 계속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방법이 고3이 되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입시준비만 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이 까마귀가 자기 새끼에게 먹이나 가져다주는 것처럼 먹을 것이나 입을 것, 용돈이나 주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 부모의 일은 그보다도 말씀으로 키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부모의 제사장적 사명이라고도 합니다.

     성도는 자녀를 하나의 인간으로만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사명은 내게 주어진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는 일입니다.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양육해야될 너무나 중대한 사명을 하나님 앞에서 부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는 합니다.
     이 훈계라는 말은 히12:5에서 징계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징계가 없이 자라난 엘리의 자녀들이 빗나간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22:6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여러 가지 많은 좋은 것들을 가르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주안에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주안에서 생각하고, 주안에서 말하는 법, 주안에서 행동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범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양육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어느 선생님이 자주 말씀하시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새끼 싸개'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화장실을 안 다니면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소변처리를 잘못하면 아이들이 말하기를 '오줌싸개'라고 합니다.
     대변처리를 잘못하면 아이들은 '똥싸개'라고 놀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잘못 양육하면 우리는 다 '새끼 싸개'들이 되는 것입니다.
     소변처리 잘못하면 그 처리 잘못한 사람에게 욕이 됩니다.
     대변처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자녀 처리 잘못하면 그 부모가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복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부모다운 부모가 되는 것은 더 귀중한 일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격노케 할 때가 언제입니까?
     지나치게 징계를 할 때입니다.
     자녀들에게 교육적 차원에서 뭔가를 해야 하는데,
     자기 맘에 안 드니까 우선 무력으로 때리거나, 혹은 독설이 섞인 말을 할 때 아이들은 격노하게 됩니다.

     사실 아이들에게 매를 드는 것, 격한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자기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섞여있다고 생각하면 매를 들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차분히 교육하려는 자세가 되었을 때에만 매를 들어야 그리스도안에서 가지는 부모의 자세입니다.

     자녀를 격노케 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부모들의 이중적인 삶입니다.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면서 본인들이 바로 살지 못할 때 격노하게 합니다.
     그래서 목사, 장로, 권사 등 신앙이 좋다는 부모들의 자녀들이 별로 좋지 않은 경우들이 나타납니다.
     교회에서의 생활과 가정에서의 생활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중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자녀들을 격노케 하는 것은 역시 무관심입니다.
     교육학자인 도브슨 박사의 연구결과를 하나 말씀드리고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어느 학교 운동장에서 울타리를 제거했다고 합니다.
     울타리는 아이들에게 정신적인 구속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울타리를 철거한 후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울타리가 있을 때에는 아이들이 운동장 전체에 흩어져서 놀았는데, 울타리를 철거한 후 아이들은 운동장 가운데 부분에 모여서 놀더라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울타리란 아이들에게 구속감이 아니라 안정감을 준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울타리가 없으니까 아이들은 오히려 활동범위를 좁혀서 자기들끼리 의지하고 논 것입니다. 
     아이들에겐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울타리입니다.
     무관심은 자녀들을 격노케 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오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에게 주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그리고, 주님께 하듯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에게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욕심대로 기를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나님의 자녀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의 위상은 지금 어디에 있는 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주안에서의 여러분의 가정을 위한 기도를 오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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