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아버지의 마음(눅 15:17-24)
  • 조회 수: 313, 2013.08.28 19:09:11
  • 5월의 하늘은 맑습니다. 산과들에는 온통 생명의 신비를 품어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5월은 가정의 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가정의 주체는 부모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건강하게 계시고 오래도록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 계신 가정은 화목하고 행복하게 보입니다.
      얼마 전 어느 목사 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목사님 께서 나도 이제 고아가 되였습니다 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저는 거기서 우리 부모님께서도 지금 까지 살아 계셨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87년 6.10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연세대학교 학생이었던 이 한열 군이 있습니다. 한열 군이 거리에서 데모를 하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숨지자 그 아버지는 아들을 잃은 아픔에 해마다 6월이 되면 심한 가슴앓이로 신체 한 부분에 마비 증세를 보이기도 하고 언어 장해를 이루 켜 끝내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아들이 죽은지 3년만에 "최루탄도 전경도 없는 저 세상에서는 한열이를 만나 가슴 찢어지는 한을 풀고 편히 살아 야 하겠다고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한 맺힌 아버지의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인 미차리히는『아버지없는 사회』라고 하는 책에서 '지금 우리는 아버지 없는 사회로 가는 길 위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과거 우리는 지나치리만큼 엄한 가부장제도(家父長制度)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로부터 별로 시간이 흐르지도 않은 지금은 여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어머니와 자식이 통하고 아버지는 소외되는 그런 가정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아이들이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고개 숙인 아버지가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속담에 실속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빗 대여『광목 여덟 자만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가정에 아버지는 없고 허수아비 같은 실속 없는 아버지만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
     아버지 있게 자란다는 것과 아버지 없게 자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자란 사람과 아버지의 권위를 모르고 자란 사람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오늘날, 사회질서가 어지러워진 원인은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들 때문입니다. 질서도 없고 정의도 없고, 공의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참으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귀중한 비유말씀은 복음 중의 복음이라 할 만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때로는 탕자를 너무 극대화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그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때로는 집에 남아 있던 큰아들의 훌륭함을 부각시켜서 그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아닙니다. 탕자비유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탕자비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신 의도는 거기에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아버지는 한마디로 허용하는 아버지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아버지일 수도 있습니다. 멀정하게 살아 있는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불효 막심한 고약한 아들을 둔 것도 한심스럽거니와 그런 아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는 이런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또 있습니까? 우리네 상식으로는 분명히 어리숙한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아버지의 그런 마음이야말로 정녕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에는 낭비성이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사랑은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바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사랑에는 허비성이 있습니다. 사랑은 마음과 재산과 명예를 허비하는 것입니다  탕자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는  바보 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재산 갖다가 다 낭비해도 좋으니 제발 살아서만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살아서 돌아 온다면 그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재산 따위야 다 버려도 좋으니 부디 좋은 아들이 되어서 돌아와 다오-이것이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탕자는 지금까지 무엇을 달라고 할 때만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달라고 할 때가 아니고는 아버지를 찾은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소망이 있습니다. 너에게 준 재물을 네 맘대로 쓰고 다녔어도 좋으니 돌아올 때에는 부디 착한 사람이 되어 돌와서 '아버지'라 불러다오-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출세해서 돌아올 아들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에게는 탕자가 사람되어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장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우리가 옛날에 불렀던 노래 가운데 요즘 아이들도 곧잘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그린 그 가사 가운데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그것은 노래의 가사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아이들이 실제로 부모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까? 제대로 아는 아이들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겪어보지 않고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흔히들 "너도 커서 자식을 두어봐라"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자식을 낳아 겪어보면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모님의 사랑'-결코 남의 이야기로 돌리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추운 겨울날
    길을 지나다가 아파트 밖의 길가에 나와 서 벌벌 떨고 서 있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안쓰러워 보이기에 다가가 왜 그러고 서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추운데 집에서 기다리지, 왜 밖에 나와 기다리느냐고 했더니 말하더군요. "아닙니다. 제가 젊었을 적 집을 나와 늦게 돌아올 때면 늘 문밖에 서서 초조하게 기다리시다가 제 손목을 잡고 왜 이리 늦었느냐고 하시면서 울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서 있는 것입니다. " 스스로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보니 이 여인, 쉰 샅이 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철들기란 이렇듯 어려운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이런 경험 저런 경험, 이런 실패 저런 실패를 모두 겪으면서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그 자체가 고통이요 어리석음일 수 도 있습니다. 그려나 거기에 간절한 소원이 있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있습니다.
       어느 불량 청년이 여러 차례 범죄를 하여 감옥을 들락거렸습니다. 또 다시 범죄 하여 이번에는 십 년 징역 선고를 받습니다. 선고를 받고 쇠고랑이 채워진 채 법정을 나서는 아들을 보고 그 어머니가 재판정에 주저앉아 엉엉 웁니다. 딱하게 여긴 판사가 그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말합니다. "그런 몹쓸 자식, 이젠 포기하세요. 잊어버리세요." 순간, 그 어머니는 눈물을 씻고 정색을 합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천만 에요 ! 절대로 단념할 수 없습니다. 20년 30년, 아니 무기징역을 산다 해도 나는 내 아들을 단념하지 못합니다. " 그렇습니다. 아무리 방탕한 자식이라도 자식은 자식입니다. 모든 사람이 단념하여 내버린다 해도 부모 된 자는 그 자식을 마음에서 내몰지 못합니다. 그 사랑은 절대적 인 사랑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 가느 라면 참으로 가슴아픈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참으로 구슬픈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윗왕의 셋째 아들 압살롬은 아들들 중에서 유난히 잘나고, 출중했습니다. 어느 사이에 국민들의 인기가 그에게 모이면서 마침내는 맏이를 제치고 이 셋째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습니다. 압살롬은 왕위를 계승할 큰형을 제치고 왕이 되고자 음모를 꾸밉니다. 그는 세력을 모아 아버지 다윗왕의 신복 을 살해하고, 아버지마저 해치려듭니다. 다윗에게는 저를 넉넉히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보좌를 내놓고 정처 없이 피난 길을 떠납니다. 차마 아들과 대항하여 싸울 수 없어서 임금자리를 내놓고 피난길을 떠납니다.
     얼마 후에 아들이 죽었다는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을 받자 다윗왕은 오열합니다. 다윗은 그 순간 마음이 심히 아팠습니다.  그는 울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하면서 통곡하였습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대적해서 아버지를 죽이려 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렇듯 아버지의 사랑은 주도적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적극적이요 창조적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역시 아버지의 적극적인 사랑을 말씀합니다. "아직도 상 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절)"다고 말합니다. 먼 거리에 있는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고 달려나가 맞습니다. 아마도 그 아버지는 여러 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저렇듯 아들을 간절히 기다렸을 것입니다. 지금 그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알아볼 수 도 없는 먼 거리이지만 아버지는 한눈에 아들임을 압니다. 아버지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서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영접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대번에 알아보고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지 않습니까? 이것이 부모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탕자를 아들로 영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수속도 필요 없습니다. 물어볼 말도 없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이것 말고 다른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그간의 걱정근심이며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푸념이 없습니다. 말없이 그리고 용서할 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다. 만약 그 아버지가 이런 질문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놈아, 그러게 집을 나가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 " "돈은 얼마나 남겨 가지고 왔느냐? " 나에게서 가져간 재산 다 어떻게 했느냐?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도 캐보지 않고, 품에 안아 줍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무조건 아들을 용서합니다.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완전히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큰 기쁨으로 아들을 맞고 잔치를 벌입니다.
      저는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병든 어머니를 자식들이 모시기를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실 곳 이라 고는 자식들 집뿐입니다. 그 자식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병들고 나이 많아지니까 서로  모시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작은 아들 집에 몇 일 쉬고 큰 아들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까 주위 사람들이 나서서 문을 열어주어 들어가셨다는 이야기는 기가 막혔습니다. 그 대문 밖에서 그 어머니는 무엇을 생각하셨을 까요? 그가 흘린 눈물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 일 까요? 아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가진 슬픔의 눈물인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을 이해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슬프고 쓰라린 눈물을 대문 밖에서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 눈물을 예수님의 사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죄로 멸망해 갈때 예루살렘아 하면서 우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픔을 이해해야 합니다. 독생자 예수를 죽이기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외롭고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를 위로하고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해주는 몸 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나를 나시고 기르신 부모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5월의 하늘아래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정성 드리는 마음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탕자의 아버지 깊은 사랑으로 아들을 기다렸고, 커다란 기쁨으로 아들을 영접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한테서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돌아올 걸. 아버지가 이렇게 사랑하시는 줄을 알았더면 돼지먹이로 연명하는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을"-아마도 이 한마디가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효란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자녀된 존재를 발견하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 내 마음을 깨끗이 버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수용하십시오. 내 기쁨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을 때, 그것이 비로소 효(孝)인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이요, 그것이 은혜임을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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