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하며 감람산으로(마가복음 14 : 22-31)
  • 2013.02.07 22:05:29
  • 오늘은 주님이 수난을 받으시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역대 교회가 지키는 종려 주일입니다. 또한 다음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지키는 부활 주일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리는 이 번 주간을 고난주간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오늘 뜻깊은 절기를 맞이하는 영광 가운데 우리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때에 특별히 새생명을 얻는 축복의 기회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고난주간에 보다 경건에 힘쓰고 더욱더 믿음을 간구 해야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고난에 참여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오늘 전할 설교의 제목은 26절의 말씀을 따라 '찬미하며 감람산으로'라고 정했습니다. 이 말씀은 에수님이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난 후에, 즉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음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과 함께 동산에 가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들이 배신하고 도망할 것이라 미리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에 대해 베드로와 제자들은 어떻게 결의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이라고 순교의 충정까지 드러내며 장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들은 나중에 제자들이 취한 모습과는 달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데로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봅니다. 주를 모른다고 부인 할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또 인간은 자기 약점과 결점이 지적될 때, 결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인간을 완전히 통찰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갔다'는 말씀을 통해서 또다른 인간의 삶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디론가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 모두 어디론가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목표를 알고 가는 삶이 많지 않습니다. 또한 무엇인가를 하면서 가야한 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무목표와 무절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노산 이 은상 시인의 시에 보면 이런 시가 있습니다.

     

    '차창을 내다보니 산도 나도 다 가더니

                 나려서 둘러보니 산은 없고 나만 왔네.

                                   다 두고 저만 가는 이 인생인가 하노라'

     

    우리 모두는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저만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는 것이 불안하고 외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성경은 하나의 새로운 모습의 인간 행로를 보여 줍니다. 바로 찬미하며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찬미'라는 말을 더 깊게 음미해 봐야 합니다. '찬미' 또는 '찬송'이란 인간들 사이에서 흔히 쓰는 노래가 아닙니다. 찬미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 찬송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이 만찬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때까지 지켜온 유유월절을 지키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이라는 그들의 명절을 오늘 기독교회에서 말하는 성찬(Holy Communion)으로 최초로 지킨 것입니다. 신약의 성찬식은 이스라엘들이 지키는 신약의 성찬식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는 유월절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 누룩없는 떡을 먹고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재앙을 피할 수 있었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는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죄가 용서함을 받게 된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어떻게 지키고 있습니까? 17가지의 순서가 있는데, 그 중에 6번째와 15번째 순서에서 시편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예배의 6, 15번째도 찬송순서입니다.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갔다'고 할 때, 찬송은 유월절 의식절차 중에서 15번째에 해당하는 순서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만찬을 마치고 부르는 찬송과 같습니다. 유월절에서는 시편 113편-118편까지를 둘로 나눠서 첫 번째는 식사 전에 113편,114편을 부르고, 식사 후에 두 번째로 115편에서 118편을 부릅니다. 이 시간에 말하고 있는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갔다'는 것은 시편115편에서 118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의 행동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에 너무 맹목적이거나 습관적으로 또는 기술적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의미와 삶의 의미를 연결시키지 못한 찬송은 아무리 경건하고 신성하게 부른다해도 합당하게 드려진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찬송과 생활을 조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현대 교회가 지니고 있는 잘못된 모순입니다. 찬미를 부르고 감람산으로 갔던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도 이러한 모순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잡히실 때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것을 보던 제자들은 찬송을 잊고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시편 116편에 있는 씩씩하고 용기 있는 믿음의 표현이 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3,4절)....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믈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7,8절)...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15절)..." 이런 노래 속에는 고난에 맞서고 구원의 확신을 보여 줍니다. 또한 죽음을 응시하고 그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다는 용기있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부르고 감람산에 간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매맞고 죽게 될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예수님의 곁을 떠나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곧 찬송과 신앙생활의 모순입니다.

     

    시편 118편 이하를 자세히 보면, 모든 위험과 환난, 심지어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는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6,7절)...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9절)...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14절)..." 바울 사도도 이 노래에서 볼 수 있는 용기를 적용시키면서 로마서 8장 31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위험 가운데 있을 때에 그들이 부른 찬송을 허공에 날려 보냈습니다. 잡힐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핍박과 고통을 받으실 때 그 수욕의 자리에 함께 거하는 것을 싫어 하였고 예수님께서 매맞으실 때 도망하였습니다. 그들은 찬송을 생활과 연결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찬송과 생활을 연결시키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제목을 '찬미하고 감람산으로'라고 하지 않고 '찬미하며 감람산으로'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글자 한 자 차이밖에는 없지만 그 뜻의 차이는 대단합니다. 제자들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갔지만 주님은 찬미가 계속되고 있는 상태로 신앙의 용기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감람산에서 맞이할 비애와 고난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평탄할 때,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때 주로 찬송을 합니다. 그러나 한번 어려움이 닥치면 그 찬송의 소리가 끊기고 하나님에 대해 불평과 원망을 대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그 고난에 대한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셨습니다. 감람산에서 제자들의 무관심과 반역에도 그 분은 자신의 길을 겸손히 찬미자의 모습으로 행하셨습니다. 종교적 횡포와 잔인한 모욕에도 찬송하는 심정으로 그들을 대하신 것입니다. 골고다 십자가 위에 달리시기까지 모든 고통을 이겨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면 사람이 내게 어찌할 것이냐!'하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용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지만 죽음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유월절의 찬송인 시편 118편 16,17절에 있는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주시는 구속의 사역을 성취하고 계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연약하고 어리석은 우리의 찬양과 삶은 다르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보여준 영화 '네로 황제'에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원형극장으로 죽으러 가면서 그들의 입은 찬양으로 끊임없이 채워졌습니다. 사자의 입과 발에 찢겨 선혈을 흘리면서도, 넘어져 죽어가는 지체들을 보면서도 그들은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찬송을 하며 감람산으로 간 것입니다. 바울 사도와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있을 때에 그들이 찬송과 기도로 그 시간을 감사드렸던 것처럼(사도행전 16),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했던 것처럼(시편 23) 우리는 신앙의 용사들이 찬송과 더불어 고난을 이기는 삶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람산을 우리 삶의 실재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감람산이 감람나무로 우거진 아름다운 동산이라기보다는 거기에는 폭력과 갈등, 배신과 반역이 넘쳤던 것처럼 우리 삶의 현실은 거친 광야입니다. 정의와 사랑이 짓밟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사회이고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이 감람산의 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 감람산의 길을 지나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갖 인간의 악이 넘치는 무질서와 배신, 반역의 감람산이라는 어두운 사회를 지나가야합니다. 문제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나가야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찬미하며 지나가느냐', 아니면 예수님처럼 '찬미하며 가느냐' 라는 두길 가운데서 바로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로 가야합니다. 우리는 감람산과 골고다 언덕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찬송의 동기와 내용으로 삼고 찬양하며 감람산으로 가야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하는 사람처럼 우울하게 여러분의 감람산을 향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찬미하며 가길을 바랍니다. 그러면 그 감람산의 겟세마네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신 주님이 우리와 그 길에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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