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시100:1-5)
  • 조회 수: 454, 2013.03.10 23:04:13
  •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가 착하고 부지런한 농부가 살고 있었답니다. 그 농부가 어느 해에 무우를 밭에 심었더니, 농사가 잘 되어서 거의 사람 몸뚱이 만한 무우를 수확했습니다. 농부는 이렇게 잘된 무우를 혼자 먹기가 너무 아까웠습니다. 이 농부는, 농사가 잘된 것이 그 고을을 잘 다스려 주는 원님의 선정 탓이라 생각하고, 그 무우를 잘 포장해서 원님께 갖고 갔습니다.

    원님은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칭찬한 뒤에, 하인을 불러 요즘 관가에 들어 온 것 중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인은, 최근 들어 큰 황소 한 마리가 들어 온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원님은, 그 황소를 끌어다가 이 농부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마음씨 착한 농부는 무우 한 개를 바치고, 그 대신에 크고 좋은 황소 한 마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이 온 동리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심보가 고약한 농부 한 사람이 있었는데 생각하기를, "무우 한 개를 바치고 황소 한 마리를 얻었으니, 내가 황소 한 마리를 바치면, 이번에는 땅이라도 몇 마지기 얻을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에서 키우고 있는 황소를 끌고 원님에게 갔습니다.

    "원님, 저는 오랫동안 집에서 황소를 길러 왔습니다만, 이렇게 크고 좋은 황소는 처음입니다. 이것이 다 원님께서 백성을 잘 다스려 주신 덕택인 줄 알고, 이 황소를 바치려고 가져왔습니다"

    원님은 이 말을 듣고, 농부의 마음씨가 착하다고 칭찬한 다음에, 하인을 불러 요즈음 관가에 들어온 것 중에서 귀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인이 하는 말이, '며칠 전에 들어 온 크고 잘 생긴 무우가 있다'고 했습니다. 원님은 그 무우를 이 농부에게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농부는 별 수 없이 무우 한 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감사로 사는 사람과 욕심으로 사는 사람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잘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입을 걱정은 아예 할 필요가 없었고, 먹거리도 사방 천지에 쌓여 있었습니다. 손을 들어 따먹을 수 있는 과일들이 지천이었습니다. 잠자리 물론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어디서든지 누우면 안방이고, 일어나 앉으면 응접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모든 것들을 감사했다면 하와와 아담이 감히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보았겠습니까? 그들은 감사는 없고 오히려 욕심 때문에 그만 낙원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없이, 계속 욕심만 부리며 살게 될 경우, 그 사람은 당장에는 무엇인가 취하고 뺏아서 얻은 것 같아도 진실로 그의 삶은 불행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구원받지 못하여 죄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불쌍한 죄인의 모습이 되고 말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나병 환자 열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사에 대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어떤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리 서서 예수님을 향해 외쳤습니다.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자신들의 병을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아무 주저 없이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가 나았다는 것을 보여라"하고 말씀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병이 모두 나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고침 받은 사람은 열 명이었는데,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의 예를 올린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에게 있어서, 정작 고침 받아야 할 부분은 육신적인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욕심은 가지되, 얻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이 마음의 병이 나병 보다 더 무섭고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한 사람에게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고는,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하지 않고 떠나간 자들을 책망하시고, 주님께 나아와서 감사하는 그 한 사람에게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눅17:19)"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육신만 온전케 된다고 해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감사한 사람에게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열 명이 모두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은, 주님께 나아온 모든 사람이 다 나음을 입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하건만, 열 중에서 한 명만이 주님께 찾아와 감사의 예를 드렸으니, 이것은 이만큼 사람들이 욕심은 있으나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실은 은혜를 입고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질병에 걸려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읽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 감사의 예를 드리는 일이, 그들에게 무엇이 그리 힘들다고 마다했을까요? 병 낫기를 소원하며 주님께 나아왔고, 나기를 위해 몸부림쳤던 것에 비하면, 감사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온다는 노력이란 '새 발의 피'에 불과했을 텐데 말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를 살펴보면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문제점도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 아홉은 예수님을 따르되 단지 자신을 위해서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고통하고 있었던 그 육신의 무서운 병을 낫기 위해서 주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은혜를 입어 고침을 받았으니 이제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습니다. 다시말해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 졌고, 이제는 주님이 더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신앙생활에서 감사와 충성을 잃어버린 중요한 이유가 아닙니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전후, 경제가 너무 어려워서 못 먹고 못 입고 살 때는 그런대로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세계가 놀랄만한 교회부흥과 더불어 경제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이 먹고 살만한 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 우리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더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적인 복을 받으리라'고만 가르쳤던 한국교회가 이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교인들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이전 같은 큰 어려움이 없으니까먹고 살만하게 되니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부강하게 되었지만, 감사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까? 하나님이 이제 자신들에게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 찾는 것은 옳은 것입니까?


    사람들은 영적 삶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고, 육적인 일에 치우쳐 삽니다. 물론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몸도 건강해야 하고, 어느 정도 지적 수준도 있어야 하며, 물질적인 여유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꾸짖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만 해결 받으면 다 끝난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것들을 주시기 위해서만 필요합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지난 몇 주간에 말씀드린대로 영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돌릴 수 있다는 점이, 바로 인간의 존귀함인 것입니다. 이를 회복 시켜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도 하나님께서 주셔야하는 것이지만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신령한 구원의 은혜가 주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오고 있는데 이를 모르고 이를 받으려고는 주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은혜는 이방인으로서 나병이 나은 한 사람만 받았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인생들이 다 나병과 같이 더럽고 무서운 죄의 병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일평생 숨어서 고통하며 살아야하는 나병은 무섭고 더러운 병입니다. 그러나 그 병 보다 더 영원히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더럽게 하는 인간들이 죄의 병이 들어있음을 알게 하시고, 이 병을 고치시기 위해서 세상에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이 아홉명의 나병환자들은 주님께서 왜 저희들에게 오셨는지를 몰랐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주님을 잘 모르고 자신들의 문제로 주님께 나아갔을지라도 이제 주님께 은혜를 입어서 도무지 소망 없던 그 무서운 나병을 고침을 받았을 때에는 그들이 주님을 새로이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과연 이분이 누구신가? 이분이 누구시길래 죽은 자와 같은 우리의 병을 고치시는가? 이분이 왜 세상에 오셨는가? 이분의 뜻은 무엇인가? 이방인 한 사람 외에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곧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들을 구원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과 영원한 멸망에서 건지시고 영생으로 옮기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큰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문제만 보았지 보다 더 크고 중한 문제를 보지 못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려 오신 주님은 보지 못하고, 또 이를 얻게되는 은혜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있지만 이 은혜를 발견하고 가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열명 가운데 아홉은 그러하다 하는데 여러분은 어디에 속했습니까?

    이방인 나병환자가 이를 얻게 되었다는 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셨으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가 있었으나 단지 기적과 능력만으로 제 소원이나 이루려는 욕심중심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병고침을 받고, 주림을 면하는 기적을 보았으나 그들의 눈이 어두워서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서 이방인 나병환자는 감사하는 마음 때문에 주님께서 주시는 더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감사와 감격이 없는 삶은 죽은 목숨이나 매한가지입니다. 과연 우리의 삶에 기쁨도 없고 감사와 감격도 없다면, 무슨 살맛이 나겠습니까? 그리고 살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감사가 없고 불평뿐인 사람은 자신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뿐 아니라 사람의 은혜도 감사해야합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도 다 하지 못할뿐더러, 그 불평과 불만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불행하게 만듭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과 사는 가족은 불행합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감사가 없는 자 그의 삶이 그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니, 그런 삶을 계속해서 산들, 도대체 이 세상에 무슨 필요가 있단 말입니까?


    오늘 감사절에 하나님께 나아오신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보다 더 크고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육신의 모든 필요한 것들도 하나님이 채워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채워주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는 것이 여러분들이 주님께 나아오신 목적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내 욕심 이루기 위함보다 먼저 하나님께 받은 한 없는 은혜를 헤아려 깨닫고 이를 감사하며, 은혜 베푸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위해 나오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00편은 사람이라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어야, 인간의 기본적인 예의이며 사람다운 태도라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찬송시는 명령조로 되어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들이 당연히 드려야할 것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입니다.


    1절: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2절: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3절: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을 알지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여호와가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들은 다 그분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백성으로서, 그분이 기르시는 양떼들라고 시편 기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4절:

    ㄱ.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며

    ㄴ.감사한 마음으로 찬양 노래를 부르고

    ㄷ.감사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송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살전 5: 18에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지으시고 늘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께, 진정 감사와 감격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있습니까? 특히, 죄 중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 그 구원의 은총에 대하여 얼마나 고마워하고 감격하며 살고 있는지요?


    어떤 분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구가 큰 소리로 회전하고 있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이 사람들의 지식이 너무 좁고 무지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에 은혜인 줄 느끼지를 못하고, 그 긍휼하심이 넘치기에 감사조차 잊어버렸노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돈 주고 얻는 것이 아니고 땀 흘려 일해야만 얻는 것이 아니기에, 그 고마운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자는 감사하며, 감격에 넘쳐서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시편 100:3절에 말씀한대로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인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해야합니까?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는 그의 것입니다.


    이사야 43장에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었나니 너는 내것이라 2절에는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4절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배입니다. 우리를 보실 때에 심히도 보배롭고 존귀하게 보십니다.

    "너는 내것이라" "너는 나의 보배야"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우리를 잊으시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렇게 보배롭고 존귀하게 지음을 받았으나 인생들이 범죄하여 천하고 불쌍한 마귀의 자녀가 되었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해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또 당신의 것을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로 우리를 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데에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시고 구속하신 것입니다. 이러니 우리 몸은 이제 우리 것이 아니요, 피로 사신 주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당신이 지으실 뿐 아니라 당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여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이제 우리를 잊어버릴 수 없다는 하나님의 고백입니다. '너는 내것이라' 우리들은 다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십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구원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은 이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녀가 되었습니다.

    3절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말씀은, 백성이 임금의 은택을 입어 사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이, 양이 목자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이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들의 목자십니다.

    양에게 있어서 목자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우리들의 생명을 주신분이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호흡할 수 있도록 모든 자연환경도 적절하게 쾌적하게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원수가 우리를 해하려 할지라도 우리를 지키시는 목자십니다. 양은 목자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고 그 생명을 보존할 수 없는 것 같이 양과 같이 유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가 아니면,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살아계실 때에 기도 하실 때는 이런 기도를 종종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들은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고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으시면 한 걸음도 옮길 수 없나이다."

    과연 그러합니다.

    정근모 박사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정작 과학자들은 과학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비과학자들이 '지금은 과학 문명 시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 박사의 말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 인생은 참으로 비참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 줄을 알기 위해서 나오셔야합니다. 하나님을 깨달아 알고, 믿으며, 그 은혜를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하고, 영광을 돌려 드려야합니다.


    둘째로, 또 이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변덕을 부리는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이지, 하나님께서는 변하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성실하게 따르면, 그야말로 만사가 형통입니다. 탈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변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 진리를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00편 5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칩니다.

    그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그리고 그 진리와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 모든 것이 변함이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그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이론을 펼지라도, 하나님은 변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 진리를 부정하려 드는 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인 고로, 아예 그런 미련한 장난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이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변함없이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거룩하게 지으셨습니다. 만물보다 으뜸가는 존재로 창조하시고 모든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한다고 해서, 무슨 해로운 일이 생긴다고 말이지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면, 그만큼 인간은 더 큰 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늘 변함없이 돌보십니다. 자식을 낳기만 하고 버리는 부모가 있다던데, 그리고 배속에 있는 아기가 딸이면 끊어 버리는 부모들도 있다던데, 하나님은 결코 그처럼 무책임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지으셨기에, 끝까지 돌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의 은혜를 저버린 채, 제 멋대로 살겠노라고 고집 부리면, 주님께서도 어쩌지 못하십니다. 돌아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시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내하심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생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만드신 후에 계속 돌보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도망갔던 사람들이 죄 짓고 돌아올 때에는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온전케 하셔서, 새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우신 하나님이십니까? 이런 하나님께 어찌 감사와 찬양을 올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듣고 새롭게 되어, 늘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셨으니, 우리 또한 조건 없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진실로 감사한 마음을 회복해야, 온전한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바로 깨닫고 감사할 수 있다면, 그는 온전한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지으신 분이고, 지금도 우리를 돌보시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기억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돌보심과 그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 와 예배 드릴 때에, 진정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날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소홀히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 날은,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아주 귀중하고 복된 날임을 기억하고, 참 감사한 마음으로 주께 나아 와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 드릴 때에는, 하나님의 영원 불변하신 사랑과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범사에 주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살전5:18에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불신자에게는 고난과 시련이 불행일 수밖에 없으나, 믿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결코 불행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가까이 하여 온전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보호하심과 그 은혜 안에서 살게 되면, 무엇이든지 헛될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아무쪼록, 믿음 안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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