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 중의 감사 [시편 116:1~14]
  • 조회 수: 228, 2013.03.12 20:15:13
  • 저는 이 시간 어느 무명의 성도가 지은 시 한편을 낭송하면서 추수감사절의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버려진 자로서 급급해 살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계획한 일들이 틀어져 안 된 것도 감사합니다.
    저의 교만이 꺾이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아내와 남편이 힘들어질 때도 있게 하시고 부모와
    형제가 짐으로 느껴질 때가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어려움의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인간된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힘겨웁게 느껴지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눈물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여, 저의 작은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주심을 찬송합니다."

    해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지만 감사절을 지킬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리가 감사의 조건을 너무나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찾는 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패한 인간은 자연히 감사보다는 불평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는다고 하여도 얼마나 감사할 일이 많습니까?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요. 그런데도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들은 감사의 조건보다는 원망의 조건을 찾기가 쉽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시인은 12절에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 속에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도 많고 측량할 수 없어서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잊지 않고 반드시 감사로 보답하여야 하겠다는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들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I. 감사 중의 감사는 구원의 감사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성경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3대 절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삼대절기의 뿌리가 구원의 감사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유월절, 맥추절, 장막절 모두가 애굽의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표하는 것이고 맥추절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고 장막절은 마지막 날 알곡신자들을 창고에 거두어 들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들의 감사의 뿌리는 죄악 가운데서 영원히 진노 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감사에 근거할 때에야 비로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 욥의 감사, 다니엘의 감사가 바로 구원에 근거한 감사였습니다. 그러기에 엄청난 환난 가운데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분명한 신앙을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심령에 구원에 대한 감사가 희미하여지면 자연히 불평과 원망이 생깁니다.

    구원에 대한 뜨거운 감사와 감격이 메마르면 올바른 감사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놀랍다고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 13절에서도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여 그 이름을 찬양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구원에 대한 감사를 들어보십시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 말씀의 배경을 알면 더욱 실감있게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팔레스틴 지역은 물이 귀한 지역입니다. 사막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막과 같이 메마르고 삭막한 광야에서 두려움이 엄습할 때에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우물물에서 마음껏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지금까지 광야 메마른 나그네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괴로움이 우리들을 덥쳤습니다. 그럴 때마다 넘어지고 쓰러졌지만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왔기에 이만큼이라도 신앙을 지키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나아가는 길이 비록 찾는 이가 적은 좁은 길이요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은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악이 선을 이기고 거짓이 진리를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죄악의 세상에서 장차 영광 중에 재림하셔서 공의로 심판하여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친히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장차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천국의 내 집을 마련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예수님 바라보고 기뻐하시고 그 예수님 바라보고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II. 감사 중의 감사는 간구를 들으심의 감사입니다.
    1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아십니까? 누가 우리들의 음성과 간구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저가 요사이 바쁜 일들이 밀려서 교회 홈페이지와 가족 홈페이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 메일로 편지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가 옴에도 아직 그 편지를 열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메일로 편지를 보내신 분에게는 대단히 죄송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담대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이 메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시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아뢰이는 기도의 이 메일은 저처럼 바쁘다고 열람하지 않는다거나 알고도 보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의 음성을 그때 그때 들으시고 합당하게 처리하여 주십니다. 기도하는 순간 순간마다 즉시 내용을 검토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인은 이 놀라운 사실을 알았기에 무엇이라고 고백하였습니까?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한번 기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기도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를 체험하였길래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순간마다 분초마다 하나님이 내 음성을 들으시는 것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음성} 이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리는 우리의 음성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올리는 우리의 음성입니다. 전도는 하나님께 올리는 우리의 음성입니다. 이 모든 음성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평안한 상황이 아닙니다. 한가하고 평화로운 상황이 아닙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찬양을 할 형편이 아닙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감사할 형편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낙심과 원망의 자리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악조건 가운데서 감사의 찬양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힘은 기도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의 감사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기도에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는 하나님, 죄인들을 후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건지심을 체험하는 자들이 어찌 감사가 나오지 않겠으며 어찌 찬송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신약에 와서 야고보 선생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체험함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간구를 항상 내 곁에서 들으시는 하나님께 평생에 기도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감사가 떨어지고 있습니까? 기도의 불을 지피면 감사의 불도 살아날 줄 믿습니다. 오늘도 한 주간 기도로 준비한 성도들은 감사의 찬송을 힘있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허겁지겁 달려온 자들은 뜨거운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저가 왜 그토록 새벽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까? 하루가 시작되고 나의 기력이 시작되는 첫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고 모든 힘이 하나님에게 서 나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모든 것이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괜히 기도하지도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불평할 일만 보입니다. 여러분 엉터리 비누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한 중년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회사가 경영난을 겪을 때에도 철저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한번은 직원이 비누 만드는 기계를 너무 오래 가동시키는 바람에 물에 둥둥 뜨는 '엉터리 비누'가 생산되었습니다. 직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당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장은 비누를 들고 묵상에 잠겼습니다. 그때 한 가지 생각에 퍼뜩 떠올랐습니다. "목욕탕에서는 물에 뜨는 비누가 훨씬 좋다. 이 상품을 그대로 판매하자" 사장은 이 비누의 이름을 '아이보리'(Ivory, 상아)라고 지어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이 비누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그는 그 덕분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감사하는 자에게는 감사할 일들이 생기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평할 일만 생깁니다. 여러분들의 신앙과 생활을 한번 점검하여 보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감사를 표현하면 자꾸 감사할 일들이 생기고 매사에 불평하고 원망하면 자꾸 불평할 일들만 생기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우리들의 생활에서 체험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항상 감사하는 말, 감사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입니다.

    솔직히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지만 어디 감사가 마음 먹은대로 잘 됩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감사를 배우고 감사를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누가 보아도 감사할 만한 일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태도입니다. 그런 감사를 하였다고 하여 감격하거나 놀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감사할 수 있는 일만 가지고 감사한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하려면 감사할 수 없는 것들까지 만들어서 감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왜 날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하나님께 원망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분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는지를 깨닫고 나서부터 감사를 하게 되었다. 인생이 얼마나 장수하는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누리고 있는 가에 참된 가치가 있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에 있는 이상 나의 장애가 결코 감사 못할 선물이 아님을 알았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송명희 시인과 비교하면 얼마나 감사할 일이 많습니까? 그럼에도 감사할 줄을 모른다면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대로 동물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우리들이 감사의 공통분모는 우리들을 죄악과 죽음에서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알려 주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감사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떠나서는 하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우리들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그 삶은 헛되다는 것입니 다. 우리가 비록 가난하게 살고 병들고 가지고 있는 지위가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진정한 감사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참된 감사는 감사를 표시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 감사하는 자는 성경에도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리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년동안 우리들에게 주신 은혜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과 건강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까지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우리들을 인도하여 주시리라믿는 믿 음을 가지고 풍성한 감사의 예물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디 바라기는 남은 평생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범사에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므로 우리 자신들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여러분들의 자손 만대에 까지 이르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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