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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마가복음 01:12-13/ 사순절에는 광야로 나갑시다! [마가]
  • 조회 수: 712, 2013.02.15 20:40:18
  •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 지난 첫 주일의 예배입니다. 사순절은 흔히 봄의 시작과 함께 옵니다. 저에게 봄이라는 말은 설 명절과 사순절이 오면 떠오르게 되는데 이번에는 설 명절의 끝자락에 다시 사순절 절기가 맞물려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설 명절은 물리적으로, 사순절은 영적인 의미에서 봄을 떠오르게 합니다. 사순절을 생각하면 항상 따라 다니는 단어가 십자가라는 단어이며 회개하는 삶의 모습이란 문구가 따라 다닙니다.

     

    사순절 기간은 두 가지의 대조적인 부분들을 비교하며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들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죽음, 진정한 회개와 죄, 십자가와 구원, 광야와 생명 등 대조적인 상황들 속에서 우리들의 삶을 반성하고 진정으로 우리가 나아가야하고, 찾아야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지요. 특별히 사순절 절기를 생각하면서 이 사순절의 첫 주일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 구정 명절에 CBS가 특집으로 꾸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40년의 광야생활을 지리적인 측면에서 조명한 ‘성지행전’을 보면서 힌트를 얻어 ‘아 그래! 우리들의 광야,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동안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에서 깨닫지 못했던 한 가지 미스테리가 이 영상물을 보면서 풀렸기 때문입니다. 뭐 특별히 이 프로그램에서 의도적으로 가르쳐준 것은 아니지만 TV 화면에 비쳐진 거친 광야의 환경들을 보면서 제 머리 속에 떠오른 영감인데, 아...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40년간이나 훈련을 시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했습니다.

     

     제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의구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가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얼마나 비옥한 땅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솔직히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때 우리나라는 그렇게 비옥한 땅은 아니죠. 세계에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나라들이 비옥한 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이스라엘 보다는 비옥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제가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데, 하물며 유럽과 같이 비옥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면 참 이해하기 힘든 말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 해도 한국의 농토에 비한다면 특별히 젖과 꿀이 흐른다고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했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광야생활이 있었기에 가능한 표현입니다. 40년 동안이나 거친 광야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요단강 지경에 다다라 저 요단 강 건너편에 드러난 가나안 땅을 볼 때 지금까지 자신들이 지나온 땅에 비하면 진정으로 젖과 꿀이 넘쳐나는 땅이었습니다. 비옥한 땅입니다. 항상 비옥한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일상으로 보이는 그 땅이 척박한 광야를 지나온 백성들에게는 그 만큼의 선물이 없는 축복의 땅이 된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는 매순간 축복의 땅에 살고 있으면서 광야를 몰랐기 때문에 그것에 감사할 수 없었다는 반성이 동시에 떠오르기도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사순절은 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광야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봅니다. 금식이라든지, 좀 그동안 즐기던 오락들을 절제해 본다든지, 아니면 그동안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했던  스마트폰, 인터넷, 문명의 이기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문화금식이라든지, 또는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사람들을 대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위해 새벽기도를 하고, 높은 산을 오르고, 힘에 겹도록 운동을 하는 등의 정신적 인내를 시험하는 광야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저는 이번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 한도교회 교인들이 광야 깊숙이 들어가 진정한 광야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사순절에 광야라는 단어가 굉장히 의미가 있는데..... 

     

    1. 이 사순절에 우리에게 광야의 삶이 필요한 것은 광야는 그냥 죽기 위해 기다리는 장소가 아니라 훈련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경책입니다. 그래서 원래 이 민수기의 이름이 "광야에서"란 이름입니다. 지금은 민수기, 영어로 numbers 라고 표현하지만 원래에는 'in the wildness'로 표기된 것입니다. BC 2세기에 이루어진 70인 역에서 "광야에서"란 원래의 제목을 "민수기"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름인 "광야에서"가 훨씬 더 깊이가 있는 제목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 책의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기나긴 종살이에서 해방된 후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기 전 시나이 광야에서 보냈던 40년 세월의 기록을 다루고 있는데, 이 기간 동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체험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것임을 사도행전에서 스데반 집사가 일러줍니다. 사도행전 7장 38절에 보면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라고 말씀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전도설교를 딱 한번 하고 순교를 한 인물인데 그가 순교하게 된 설교 중에서 조상들의 광야 40년을 "광야교회"라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들도 "광야교회"를 살아갑니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들이 모두 "광야교회"인 셈이죠. 광야교회가 뜻하는 핵심은 훈련입니다. 애굽에서 살았던 4백년은 종살이 아닙니까? 종살이를 오래 하게 되면 “종의 근성”이 몸에 배게 됩니다. 그런 근성을 그대로 지닌 채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면 올바른 역사를 창출하여 낼 수 없죠.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받으며 "종의근성"을 치료한 후 새로운 정신과 마음으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1945년 해방된 후 곧 바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반백년을 온갖 훈련을 받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 겪은 훈련이 오늘 우리들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광야란 말의 히브리어는 "미드바르(MIDBAAR)"이고 미드바르의 동사형은 다바르(DABAAR)인데 다바르란 동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세상적으로 의지할 것도, 즐길 것도, 아무 것도 없기에 오로지 하늘만을  바라보며 하늘로부터 임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광야에서의 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훈련입니다. 그리고 광야를 뜻하는 “미드바르" 에서 나온 말로 "드바르(DBAAR)"란 히브리어 단어가 있는데 바로 지성소를 일컫습니다. 성막에 나오는 지성소죠.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삶의 중심에 성막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성막은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곳이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곳입니다. 그런 성막의 가장 중심에 지성소가 위치합니다. 그래서 광야를 뜻하는 미드바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뜻인 다바르, 지성소를 뜻하는 드바르가 모두 한 단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줍니다. 이는 곧 광야는 순종의 장소, 거룩의 장소, 하나님을 대면하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번 사순절이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훈련의 기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이 사순절에 우리에게 광야의 삶이 필요한 것은 광야를 통해서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새롭게 만들어지기 위해 가야하는 필수적인 자리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왜 예수님은 광야로 나아가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왜 3년 동안이나 아라비아 광야에서 살았습니까? 우리는 광야를 이해하기 위해 평범한 예를 하나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아버지는 두 부류입니다. 처음 아버지는 능력이 넘쳐나고 처음부터 엘리트로 자라난 분이시라 능력을 최고로 치시는 분이십니다. 경제적인 부분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이름이 나있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그 아버지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너무도 완벽한 분이시기에 못난 자식이나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적이 떨어진 부분이나 친구들 간의 갈등,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아버지께 고백하지 못합니다. 자식이 잘못하면 힘이나 권력으로 해결해 주시지만 결코 자식을 인정하지는 않는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냥 남들에게 보이기에 자랑스런 아버지일 뿐이지 나의 진정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아버지는 아닙니다. 두 번째 아버지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말썽도 많이 부렸으며 상처도 많이 받았고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좋은 성적이 안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아버지이지만 친구 아버지에 비하면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아버지입니다. 회사에서도 열심히는 하시지만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 부족한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우리의 이야기를 항상 들어 주십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우리들의 부족함을 이야기하면 아버지께서는 좋은 웃음 지워 주시면서 기다려 주시고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그런 명함은 별로 없는 아버지이지만 대개의 경우 자녀들은 이런 아버지가 좋습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대개 첫 번째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아버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런 아버지이기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광야로 몰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광야를 통하여 우리 인간의 힘들고 어려운 이성적인 갈등을 체험하시게 했고, 우리들이 겪는 유혹과 똑같은 유혹을 받으셨으며, 그 속에서 우리들의 부족함을 더 많이 이해하시고 아파하시며 우리들의 부족함을 치유하여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주님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대우조선 이사로 계신 분이 있었어요. 잘 생기고, 학벌이 있고, 그래서 꽤 교만했어요. 부인은 열심히 교회에 다녔지만 남편은 오는 둥 마는 둥 했죠. 그런데 이 분이 목 뼈에 이상이 크게 와서 잘못하면 전신불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서울에 가서 수술을 받는데 거기서 자기처럼, 혹은 자기보다 더 국한 환자들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수술이 무사히 잘 끝난 후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병에 고통받고 보니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이 분에게는 이것이 그의 광야였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사순절은 우리가 광야를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들의 광야를 체험할 때 그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부족함을 꾸짖는 주님이 아닌 우리들의 부족함을 함께 아파해주시는 주님을 우리는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들의 광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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