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추절을 지키되....(신명기 16:9-12)
  • 조회 수: 127, 2013.01.28 18:44:41
  •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칠주를 계수할찌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칠칠절은 곧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맥추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16절에서는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오늘의 말씀에서는 칠칠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절기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3:14절 이하에서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가지 절기는 유월절,
    유월절 후 칠주간이 지난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도 하는 맥추절입니다.
    가을 추수 후에 지키는 장막절이라고도 하고 수장절이라고 하는 절기가 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이것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1:14절에서는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나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51:16절에서는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 하신다"고 했습니다.
    또 호세아 2:11절에서는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령을 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언제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켜라, 유월절을 지키라, 맥추절을 지키라 등등의 명령을 내리시고, 또 언제는 이 모든 절기를 싫어한다 폐지해 버리겠다고 선언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중에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나 감사 절기가 잘못 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규례대로 지켜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이와 같이 지키라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맥추절을 지킬 것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맥추절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 앞에서 모든 절기는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씀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에나 모든 절기를 지킬 때에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드린다고 하는 철저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모든 생활의 행동 반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있다고 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사람의 눈을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다 보니까 외식이라고 하는 가면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경건의 모양만 내고, 경건의 흉내만 내고, 사람의 방법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라고 하고, 바리새적이라고 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기도를 해도 사거리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중언부언하는 길고 긴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구제할 때에도 금식이나 선행을 할 때에도 소리가 나게, 사람 앞에 드러나게, 보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모든 종교 행사나 모든 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살아 계심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은 불꽃 같아서 사람의 사정도 다 뚫어보시고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관통해 보고 계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눈가림으로 하지 않습니다.
    체면 유지만 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는대로 네 힘을 헤아려서 지키라고 했습니다.
    (1)복을 주시는 대로 맥추절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측정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헤아려 볼 때에 가장 밑바탕부터 헤아려 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자신들을 어느 적정선에 올려 놓고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가령 나는 교육의 수준이 어느 정도니까 어느 정도의 대우는 받아야 한다. 혹은 생활비는 어느 정도까지는 받아야 한다. 또는 나는 부모로부터 얼마만한 유산을 물려 받았으므로 나의 생활 수준은 어느 정도까지는 누려야 한다. 아니면 나의 전문 분야에 있어서는 어는 정도인데 내가 여기까지의 기반을 닦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과 연조를 쌓아 올렸으니 현재의 생활로는 만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은 큰 착각입니다.
    성경의 원리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욥은 적신으로 왔으니 적신으로 돌아감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마지막으로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마지막이라면 날마다 새로 시작한 것이 우리 인생살이 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잠언 27:1절은 너희가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을 당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2)우리의 힘을 헤아려서 바치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힘을 헤아려서 바치라는 말씀은, 자신의 힘을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힘을 헤아려 보라는 말씀은 경제적인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힘은 현재 가지고 있는 재산 만이 힘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자본 중에는 건강의 자본도 큰 힘인 것입니다.
    또 지식의 힘, 기술의 힘, 거기에다가 믿음의 자본은 더 큰 자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더 가지고 덜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각 지역에서도 누가 좀 더 부자냐? 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부요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힘이 있을 때에 우리의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날 보다 혹은 누구보다 더 행복함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힘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의 힘에 맞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1-4절에는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을 예수님이 칭찬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했지만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했습니다.
    즉 억대의 재산을 가진 성도가 드리는 헌금의 액수와 삭을세 방에 살며서 하루 하루 생활비를 벌어 먹고 사는 성도가 드리는 헌금의 단위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수입이나 재산을 가진 자는 많은 금액을 해야 하고, 자식에게 용돈을 받아 그 중의 일부를 드리는 성도의 헌금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액을 보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힘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경제적인 힘에 맞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힘대로 해야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힘에 지나도록 하는 것이 원리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법의 원리를 따라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빚진 성도들은 힘에 초월하도록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3절에서 마게도냐 교인들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의 원리를 곡해하지 말고 바로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대로 돈만 많이 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오해하게되고 물질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상처만 받게 되는 것입니다(어리석은 부자 청년의 경우,막10:17-22).
    분문에서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능력의 범위 안에서 정도껏 예물을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범위 안에서 최대한으로 힘껏 예물을 드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는 말씀 앞에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비례대로 감사의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저와 여러분들 자신이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에 비하여 우리의 감사는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금년도 반년을 살아왔지만 정말로 경제적으로 힘에 겨운 나날들이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아직도 적당한 일자리가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며 설령 직장이 있고 사업장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곤난을 겪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형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어려운 일만 기억을 하고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만큼이라도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산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서 본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10절에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는 말씀이며, 또 하나는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이미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복을 주실 것을 믿고 드리는 감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풍성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의 형편이 넘치는 감사를 드릴만한 형편은 안되지만, 앞으로 넘치는 감사를 할 수 있는 복을 주실 줄 믿고 감사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3.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10절 중반절에서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의 반대는 고린도후서 9:7절에 인색이나 억지로 드리는 것입니다.
    인색이라는 말은 아끼는 마음, 즉 아까와 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5:10절에서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까운 마음을 품지 말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찬송할 때에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찬송가 처럼 드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입니다.
    여기에서 자원한 예물이란 즐겨내는 예물을 의미합니다.
    고린도후서 9:7절 하반절에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원해서 드리는 헌금입니다.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이 생길 때에는 스스로 헌금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타의에 하는 헌금이나 강요를 당할 때에 불쾌한 만큼 하나님께서도 스스로 원해서 드리는 헌금이라야 열납하십니다.
    어떤 조건이 없이 이미 받은 은혜 때문에 감사하는 헌금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바로 측정하고 또 자기의 힘을 바로 판단한 다음에는 자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닫는다면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말씀하기 전에 자원하는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십일조를 드릴 때에 멜기세덱 제사장이 강요하거나 명령하기 전이었습니다.
    그에게 축복하고 나니 아브라함이 너무나 감사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전리품 중에서 십일조를 뚝 떼어서 바친 것입니다.

      4. 온 가족이 다 함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맥추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노비, 고아, 과부, 객 등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업원은 일하고 사장만 맥추절을 지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빈부나 귀천이나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다 빠짐없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혹 짝 믿음 가정은 온 가족이 하루빨리 한 마음으로 한 자리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강권하여 주께로 인도할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다 함께 감사 제단을 쌓을 수 있도록 소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성전인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11절 중반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맥추절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같이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그의 자녀가 즐거워할 때에 부모가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장에 갔다 오면서 아들 생각이 나서 옷을 한 벌 사다 주니까 이것을 입고 아버지 앞에서 어찌나 좋아서 뛰고 재롱을 부리는지 이것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흐뭇하고 좋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무엘하 6:12절이하에 보면 블레셋 군대에게 빼앗겼던 하나님의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다윗이 춤을 추며 즐거워 했습니다.
    이 때에 사울의 딸인 미갈이 다윗에게 체통없이 춤을 추었다고 비방하다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은 흉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또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주님 앞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놓고서도 여러분들의 마음에 즐거움이 없으면 참된 감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즐겁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복을 받아 누리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행한 궁극적 관심사는 즐겁고 복되게 사는 것입니다.
    이 시간 참석하신 성도들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왕이면 부부가 즐겁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가족식구들끼리 즐겁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기쁜 마음으로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6. 비참했던 과거를 회상하고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든지 맥추절이나 기타 어떤 예배를 드릴 때에는 비참했던 과거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다 아름다운 것만은 아닙니다.
    죄스러운 과거를 회상하거나 추억하는 것은 아픔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애굽의 종살이를 추억하라는 말씀은 크게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불행했던 과거, 형편없이 비참했던 과거는 항상 간직하는 것이 좋습니다.
    보리 농사를 짓지 않는 오늘날도 맥추감사절을 지켜야 되느냐고 반문하는 성도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사실 맥추감사절을 지키지 않는 교회도 혹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 우리 민족은 6월이 되면 보리고개가 있었습니다.
    지난 날에 들에 쑥 한 포기가 안 남도록 뜯어다가 삶아 먹고, 죽을 끓여 먹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정부로부터 밀가루를 배급받아서 수제비, 국수를 밀어 끓어 먹고, 꽁 보리밥을 먹던 과거를 우리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보리 대신 쌀로,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풍족함 때문에 불행했던 과거, 형편없이 비참했던 과거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날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그 은덕을 감사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시인은 말하기를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것인데, 십자가를 대속하시고 영생 할 수 있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성경에는 무수한 제사와 예물이 드려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 받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세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는 물리치시고, 바리새인의 기도나 헌금까지도 물리치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저들이 믿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원함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쁨으로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23절에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은 모든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성경을 믿어야 하고, 성경대로 예배하고, 성경대로 찬송하고, 성경대로 헌금해야 합니다.
    맥추절도 추수감사절도 성경에서 나온 제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드리는 감사절이 곧 주께서 원하시는 감사절이요, 하나님께 열납되는 감사절입니다.
    이 모든 절기나 주일을 지키되  하나님 앞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복을 주시는 대로 힘을 헤아려서 더 감사하고 자원하는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가진 자난 못가진 자나 다 함께 감사해야 합니다.
    성전, 즉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해야 합니다.
    비참했던 과거를 기억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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