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교육 (삼상 2:12-21)
  • 조회 수: 98, 2013.02.01 16:39:44
  •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 주일을 맞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귀한 선물로 주신 자녀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어린이들을 어떻게 잘 교육시키어 훌륭한 인재로 양육시킬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지금 한국사회의 문제 중의 하나는 자녀들을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 것이 아니고, 지나치게 교육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요즈음 아이들은 놀 틈이 없다고 합니다. 학교공부는 물론이고 피아노다, 바이올린이다, 영어공부다 과외로 배워야 되고 또 이제는 컴퓨터까지 정규과정이 됨으로 어느 때는 11시 너머까지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자라려면 놀이를 하면서 육체의 발달은 물론이고 인간관계를 배워 가는 것인데 지능교육에만 치우치고 있으니 큰 문제라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 교육은 비정상적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시대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인간이 되는 교육을 시킬 것인가? 우리는 그 원리를 유대인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은 미국 전체 인구 비례로 볼 때 겨우 3%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미국 전체 대학교수의 30%가 유대인들이요, 노벨상 수상자의 24%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처럼 교육열이 불타는 나라에서 노벨 수상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과 너무나 비교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유대 랍비에게 묻기를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처럼 자녀교육을 잘 시키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대답은 '일찍부터 가르쳤기 때문입니다.'라는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의 교육의 실체가 무엇이고, 성공적인 자녀 교육과 실패한 자녀 교육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나는 일개 부녀자에 불과했으나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양육한 반면, 엘리는 존경받는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불량자를 키워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교육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우리 부모들이나 교회학교 교사들을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1. 한나는 자녀를 기도로 양육한 반면, 엘리는 그렇게 하지 않      았습니다.
     한나는 불행하게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둘째 부인을 택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둘째 부인 브닌나가 한나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다른 여인에게 뺏긴 것도 억울한데 그 여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니 한나는 말할 수 없는 비통함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러한 때에 한나는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는 한나의 기도방법에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1)인간적인 방법으로 처신하지 않고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1:6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둘째 부인이 한나를 괴롭혔으면 '대적'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원수가 집안에 있다고 하더니 그런 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한나는 그 여인과 말다툼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다툰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 말씀대로 서로 물고 찢으면 서로 망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 비통한 심정을 하나님께 안고 나가 눈물로, 혹은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2)한나는 자기 욕심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했습니다.
     1:10-11에 보면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자기 정욕을 따라 기도하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따라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이러한 자세로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자녀를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3)한나는 심정을 다해 불붙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한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서 이루어질 때까지 불붙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심정을 통한 기도, 중심을 다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불타게 기도했는지 다른 사람이 볼 때 술취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4)한나는 응답을 확신한 기도를 했습니다.
     1:18에 보면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듣고 '가서 먹고 다시는 수색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제목을 놓고 수도 없이 기도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루어질 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한번 기도하고 엘리 제사장의 말만 듣고 철저히 믿었다는 것은 놀라운 믿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태가 열리면서 사무엘을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나는 이와같이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을 키울 때도 철저하게 기도로 키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젖을 먹일 때도 기도하고 몸이 아파서 보챌 때에도 기도하고 이제 젖을 뗀 다음 성전에 가 있을 때나 사무엘이 성장해서 사명을 감당할 때도 전력으로 기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무엘이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그 배경에는 한나의 불붙는 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사무엘도 어릴 때부터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요, 그의 생 다하는 날까지 영적으로 큰 능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 부모님이 기도를 많이 하던 분의 자녀는 영적으로 온전하고 후에 그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그 뒤를 이어서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은 성직자의 자리에 있음에도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로 한나가 성전에 와서 열심히 기도할 때 엘리는 한나를 보고 '왜 술을 마시고 성전을 어지럽히는가? 이제는 술을 끊으라'고 했습니다. 아니,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을 보고 술취한 사람으로 취급하다니, 성직자로서는 큰 실책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는 엘리는 그만큼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고 있었기에 영적으로 무디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도 엘리는 듣지 못했던 것은 그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불량자가 판을 치고 있는 성전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이 특별히 보호하심으로 악영향을 받지 않은 반면, 엘리 제사장은 기도에 게을리 함으로 그 자녀들이 탈선하여서 하나님과 모든 자들 앞에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나 교사들은 반드시 기도로 어린 아이들을 양육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기대는 아이들이 자라기에는 너무나 나쁜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음란의 유혹과 폭력의 난무함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우리 부모나 교회학교 교사들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저들을 그 악으로부터 보호하기가 어렵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도우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이 기도를 쉬지 않을 때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사 자녀들을 그 나쁜 환경으로부터 사무엘처럼 보호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 이야기를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만,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18:10에 보면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보면 "저희 천사들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 아이들마다 담당한 천사가 있는 것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면 그 아이들을 담당한 천사들이 그들을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특별히 보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죤 뉴톤 목사님은 선원들의 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친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젊어서는 악한 생활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방탕 속에 빠져 헤메던 때에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탓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방탕의 거리를 헤메이고 있는 때라도 쉬지 않고 기도한 결과, 드디어 회개하는 날을 만나게 되었고 나중에는 유력한 전도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전도를 통하여 유명한 찬송가 작가 토마스 스코트 목사와 유명한 시인 윌리암 쿠퍼가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부모님 여러분이여, 교사 여러분이여, 우리는 매일 호흡을 멈출 수 없듯이 자녀를 위한 기도를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계속 그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여러분의 자녀들과 교회학교 학생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공기를 마시면서 점점 귀하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장해 갈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한나는 자녀에게 하나님을 알게하는 교육을 시키었으나 엘리      는 그렇게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할 구절은 12절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의 아이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대단히 큰 문제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알다'라는 말은 '야다'입니다. 그 말은 관념이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깊은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육체적인 관계까지 가짐으로 깊이 아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지적이해만으로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깊이 체험할 때 하나님을 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이요, 그 후계자들이기 지식적으로 너무나 깊이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이미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 밑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체험한 줄 압니다. 더욱 성전에 와서는 아주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음성과 이스라엘 미래에 대한 예언까지 들었던 것은 너무나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알도록 교육을 시키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어느 면을 알게 합니까? 하나님의 두 가지 면, 즉 '좋으신 하나님'과 '엄위하신 하나님'을 동시에 알도록 교육시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인 반면에 죄를 지을 때는 엄하게 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엡6:4에 보면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어느 의미에서 교양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내용이라면 훈계는 잘못할 때는 매를 때려서라도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는 태도를 말합니다.

     엘리와 한나의 교육태도를 비교해 보십시오. 본문 17절에 나오는 대로 엘리는 그 자녀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기 전, 가마솥에서 갈고리를 가지고 먼저 고기를 마음대로 취해가거나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불량한 짓을 자행하고 있을 때에 이 소식을 들은 엘리는 어떠한 태도를 보였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삼상2:23-2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의 입장에서 제물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것을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기 아들들이 마음대로 먹고 수종 여인들을 육적으로 범하므로 백성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다면, 펄펄 뛰며 매를 들고 사정없이 때리거나 당장에 내어쫓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만들므로 엄위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게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마치 자장가를 부르듯이 '그래서는 안되느니라 범죄니라'라는 유약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자식들을 점점 병들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교육은 아주 어릴수록 강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왜 그냥 놓아두고만 있었을까요? 29절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 나보다 더 중히 여기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녀를 더 귀히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엘리 제사장의 가정이 망한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교육 태도를 보십시오. 

     비록 여인의 몸이었으나 자녀교육을 얼마나 단호하게 시켰는지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한 대로 젖을 뗄 때가 4살인지, 5살인지 몰라도, 젖을 떼자 마자 하나님의 전에 데려다 바쳤습니다. 그러한 한나는 모습은 너무나 매몰차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사무엘이 엄마를 떠나지 않으려고 울고 불고 했다는 기사가 본문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께 바쳐진 몸이다. 너는 앞으로 성전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쳤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한나는 아이를 성전에 떼어놓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철의 여인입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얻은 아이인데요?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낳은 아이이기 때문에 너무나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불면 꺼질까? 만지면 터질까? 눈에 넣어도 아플지 않을 것같이 애지중지하던 아이가 눈물을 그렇이며 자기를 애타게 바라보는 것을 보면서 성전에 떼어놓고 돌아설 때 그 심정은 갈기갈기 찢기는 심정이었을 것이요, 아마 집에 돌아와서는 골방에 들어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가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은 자식보다도 하나님을 더 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한나의 믿음의 중심이 그런 위대한 사무엘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미운 자식 떡 한 개 더 주고,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잘못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오냐 오냐' 키우는 것은 자식의 인생을 망친다는 말이요,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기 위해 가슴은 찢어지나 매 한 대 더 때리면 복된 자식이 된다는 말입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후일 자기의 소년기를 회상하며 쓴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어렸을 때 한번은 남의 과일을 훔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 이를 알고 어머니가 피가 나도록 나를 때린 적이 있다. 이러한 엄한 가정교육을 받는 속에서 여러 번 정신적 격동기를 넉넉히 이겨 나가는 원동력이 되게 했고, 이뿐 아니라 그것은 나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만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시는 부모님 여러분이여, 교사와 교회 어른 여러분들이여, 진정 자녀와 제자가 귀하고 사랑스럽거든 '좋으신 하나님'을 열심히 가르치십시오. 동시에 잘못할 때는 심하게 매를 때려서라도 바르게 훈계하여 '엄위하신 하나님'을 알도록 교육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한나는 자녀에게 사명을 심어주었으나 엘리는 그렇게 못했습      니다.
     자녀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사명감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고작 장래 목표를 심어준다는 것이 '내 소원은 네가 이 다음에 부자가 되어 이 지긋지긋한 가난 좀 면해보는 것이다.' '야, 우리 집안에서 판검사 한번 만들어 보자.'라는 식입니다. 더 한심한 것은 '너 이 다음에 성공해서 네 어미의 억울함 좀 풀어다오.'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욕심으로 일관한 목표를 심어주는 것은 아이에게 독을 먹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닙니다. 무슨 직업을 가지든지,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우리에게 주신 청지기 사명을 가지도록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사명의식없이 부자가 되고 명성을 따면, 바로 그것이 올무가 되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건전한 자아상」이라는 책에는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어느 가난한 청년이 권투를 시작하면서 그의 꿈이 챔피온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몇 년만에 챔피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목표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타이틀을 지켜야 한다는 두려움과 더 이상 목표가 없다는 허탈감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는 점점 먹어가고 젊은 시절의 능력은 쇠하여 갑니다. 점차로 그의 성격은 내성적인 되어갑니다. 그는 그의 친구들, 신문, 잡지, 심지어는 가장 친한 친구까지도 피했습니다. 마침내는 음침하고 우울한 사람이 되었고, 그의 아내도 그와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 이러한 인생의 파국을 만났습니까? 인생의 목표가 고작해야 참피온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목표는 영원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한나는 어린 사무엘에게 아주 어린 아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다. 너는 이 민족의 영적 지도자가 되라.'는 사명감을 계속 넣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는 그의 아들들이 다 제사장이 될 위치에 있음에도 제사장의 중대성을 철저히 심어주지 못함으로 집안을 망치고 나라까지 망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부모들이나 교사들은 자녀나 제자들에게 하나님 중심한 사명감을 심어주고 언제나 격려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아이들은 격려 속에 자라는 나무들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사명의 씨를 심어준 후에는 계속 격려라는 비료를 뿌리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에디슨은 저능아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기어 났으나 엄마의 끝없는 격려를 통해서 유명한 과학자가 됨으로 천여가지의 발명품을 만들어 인류 앞에 공헌했으며, 유명한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4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못하고 7살이 되도록 글도 읽을 줄 몰랐지만 부모의 격려 속에서 세계적인 석학(碩學)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부모님들이 자기 욕심에 따라 생의 목표를 정해주거나 자기 생각들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카릴 지브란이 쓴 「부모가 되는 법」이란 책에는 우리 부모들에게 이런 귀한 글을 남겼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비록 아이들은 당신과 함께 있지만, 그들은 당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당신의 생각을 아이에게 주려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녀들의 몸을 집에 둘 수 있지만, 그들의 정신을 속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의 정신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집은 당신이 방문할 수 없고, 꿈속에서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처럼 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아이들을 당신처럼 만들려고 하지는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지금 우리가 보호하고 있지만, 우리의 아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시로 맡긴 소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정성을 다해 교육하여 하나님의 사람들로 만들 책임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 책임을 다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이라는 나무는 사무엘처럼 좋은 나무가 되기도 하고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나쁜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 스콧틀랜드 선교사로서 아프리카 탐험과 전도에 크게 헌신한 인물이 리빙스턴입니다. 그러므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훗날 고백하기를 '나의 오늘 이러한 업적을 이룬 것은 어머니 애그너스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세 아들과 두 딸을 훌륭하게 길러낸 분입니다. 어머니의 특성은 경건과 믿음, 쾌활과 온화한 분으로 우리 남매들은 어린 날 어머니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감화 때문에 내가 아프리카 토인들에게 깊은 사랑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부모님 여러분이여, 교사와 교회 어른 여러분들이여, 우리의 자녀들이나 교회학교 학생들을 교육시킨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은 없는 줄 믿고 우리 모두 한나처럼 (1)쉬지 않고 기도하므로 천사들이 그들을 보호하도록 하며 (2)하나님을 알게하되 좋으신 하나님과 엄위하신 하나님을 교육시키시기를 바라며 (3)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명을 심어주고 계속 격려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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