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26:57-58, 69-75/ 멀찍이 쫓아가는 사람
  • 2013.09.15 21:14:54
  •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우리가 사는 이 세대의 특징중 하나는 상대적 가치관이 통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급변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변화하되 근본적으로 변하며 그 기초까지 흔들리는 세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변적이며 다원적인 세대가 되고 보니 그 어떤 것에도 절대란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통하고 있습니다. 절대란 절대로 없다는 말까지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때문에 모든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으며 상대적인 가치 이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은 계속 절대자를 찾으려 하고 영원히 불변하는 그 어떤 가치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러한 사랑을 계속 원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이나 흔들리는 것에 근거하고서는 어떠한 안정과 평안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모순된 현실 속에서 현대인은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진퇴양난의 입장과 희미한 일이 너무나도 많은 현실에 처해 있으면서 아무런 확신도 약속도 없는 암담한 미래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불가피성에 몰려 살면서 그 어떤 보장도 없는 생을 "그 무엇에 끌려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웅겔스마라는 심리학자는 "사람은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이다"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이처럼 희미하고 미분명한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에 "하나님이 있다고 하자니 희미하고, 없다고 하자니 불안하다는 것이 현대인의 신앙이라"고까지 말한 것을 읽었습니다. 앞으로 나가자니 앞이 보이지도 않고 아무 보장도 없으며, 뒤로 물러가자니 그 동안 지켜 온 과거의 업적을 져버리기가 아쉬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에 끌려가는 막연한 인간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또 하나의 희미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른 지가 벌써 3년이나 된 베드로라는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그는 예수를 따르던 자들의 대표자이며 특별히 그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12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였습니다. 명실 공히 그는 수제자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예수님의 물음에 누구보다 앞서서 먼저 대답하기를 좋아했으며 어느 곳에서나 주님 가까이 따랐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함으로 칭찬과 더불어 마침내 "반석(베드로)"이라는 이름까지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천국 열쇠를 주신다는 귀한 허락까지도 받은 바 있는 수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너무나 나약하고 불투명하며 희미하고 비겁한 데가 있는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처럼 열심히 따라가던 그의 선생이요, 주시며,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데 그 순간에 와서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태도가 너무나 섭섭합니다. 함께 따라 가서 고난을 당했다고 하던지 아니면 도망하고 말았다던지 그도 아니면 차라리 배반하고 떠나 버렸다는 기록을 남겼어도 좋을뻔 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따르든지 아니면 떠나거나 할 것이지 결국 따르지도, 도망도 못한 채 "멀찍이"가서 "그 결과를 보려고" 하였다는 점이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생각하여 보십시다. "결과를 보아서" 어찌 하겠다는 것입니까? 만일에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다가 큰 이적이라도 나타내시어 빌라도의 법정을 뒤엎고 영광스러운 왕위에 오르시면 그 때에는 "내가 예수님의 수제자요"하고 나타날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비참하게 수난을 당하시게 되면 그때에는 별 수없이 도망해 버리겠다는 심사입니까? 어찌 이처럼 기회주의적이요, 회색적인 비겁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단 말입니까? 유감되기 그지없습니다.
    이같이 불확실하며 비겁하게 행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더욱 큰 시험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도 베드로를 몰라보고 그에게 묻지만 아니하였더라면 그는 그처럼 초라해지지는 아니할 것이었는데 본문에서 보여주는 의외의 사건으로 인하여 베드로는 더욱 비겁한 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럴까 저럴까 하면서 아무런 결정이 없는 일을 하게 되면 언제나 무기력해지는 법이요, 확실한 결심이 없는 일은 언제나 생각지 않는 함정에 빠지게 되기 마련입니다.
    보세요, 본문에서 너무나도 넌센스 같은 베드로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따라간 법정은 사람을 임의로 살리고 죽이는 권력을 행사하는 빌라도의 법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끌려가셨고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갔던 그 법정은 가야바의 법정입니다. 실상 법정이기보다는 공회 장소입니다. 이방인의 법정이 아니라 동족이며 유대인의 최고 종교 책임자인 대제사장 가야바의 공회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비겁해질 것이 무엇입니까? 또한 창검을 든 군인이 검을 가슴에 들이대면서 네가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기 때문이라면 인간의 하나 뿐인 목숨을 위해서 부인했다하더라도 동정할 여지가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바는 군인이 아닌 심부름하는 작은 계집애의 물음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게 됩니다. 설사 법정에 앉은 재판장의 준엄한 심문이 두려워서 갈릴리의 한 어부가 예수를 모른다고 하였어도 유감된 일인데, 갈릴리 사람이란 말에 지레 겁을 내어 예수를 부인하였고 "함께 있었다", "사투리가 증명한다" 혹은 "그 당이다"라는 말에 미리 놀라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나약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간단한 말로 부인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부인하고 두 번째에는 맹세하여 부인하였으며 세 번째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였다는 것입니다. 어찌 그가 저주하며 맹세까지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이는 본인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거니와 이런 정도까지 전락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멀찍이 따라가는 자에게 있게되는 시험이며 뒤따르는 함정인 것입니다.
    무디 선생님은 누가복음 22 : 61에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라고 하신 말씀에 이렇게 설명한 것을 그의 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실 때 단순히 보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모른다니 사실이냐? 내가 너를 갈릴리 바닷가에서 불렀고, 네가 믿음이 없어서 물에 빠져 들어갈 때에 내가 네 손을 잡아 끌어 올렸는데 네가 나를 모른다니 그게 사실이냐?"고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멀리 따라 갔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었던 깊은 함정에 빠짐과 함께 또한 큰 시험에 들게된 것입니다. 언제나 소극적인 생활태도는 위험한 시험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멀찍이"란 말에 무슨 뜻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애당초 베드로는 예수를 따르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한번도 가까이 따른 일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숙식을 같이 한다고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요는 마음과 마음의 문제입니다. 서로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아는 일이 있어도 마음으로는 멀리 있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 계실 때에 베드로는 잠잤었고, 잠에서 깨어난 그는 정신없이 헛소리 같은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는 계속 잠자고 말았습니다. 이 어찌 가까이 따른 일이 되겠습니까? 멀리 있었습니다.
    실은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에도 그는 고난의 메시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영광의 메시아로, 세속적인 영광만을 생각하며 "사람의 뜻"만을 생각하여 십자가를 만류하다가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하시는 주님의 책망을 듣게된 것입니다. 이로 보건데 베드로는 처음부터 계속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른 바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즉 멀리 따른다는 뜻은 첫째 무지 속에 따른다는 뜻입니다. 확실히 모르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몸으로는 가까이 따랐으나 그리스도의 마음과 뜻은 모르고 따랐기 때문에 결국은 멀리 따른 것이 됩니다. 칸트(Kant)의 말 중에 "이성이 없는 종교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종교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와 같이 지식을 더욱 고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고 알았습니다", "아는 것이 영생이다", "지금은 모르나 이후에는 알리라", "성령이 알게 하리라"등 안다는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9절에서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부하게 하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불학무식하다고 비난받던 베드로 자신도 그후에 깨닫고 그의 서신인 베드로후서 1장 5절에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공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르고 하는 일은 언제나 무기력한 것이며 모르는 중에 내는 용기는 용기가 아니라 미련한 고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좀 더 분명하게 알아야 하였습니다. 썩어지는 밀 알의 비유를 알아야 했고, "대속물"로 오셨다는 귀한 말씀의 참 뜻을 알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정욕에 사로잡힌 눈은 흐려지며, 세속적인 명예욕에 빠지게 되면 귀가 어두워지게 마련입니다.
    그처럼 몇 번이고 말씀하셨건만은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뜻을 끝내 몰랐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4 : 25에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뜻하는 바와 사실은 무지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자를 꾸짖는 말씀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르고 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같은 거리의 길도 갈 때보다 올 때에는 가까운 것입니다. 모르고 가는 길은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더욱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좀더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들을 귀"를 가지고 그리스도가 "고난의 메시아"란 진리를 배웠어야 했으며, "좁은 길"의 결과와 "마시려는 잔"의 의미를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천국은 십자가로 세워지며 영광은 수치와 수욕 후에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음을 알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결과와 미래를 알며 그 미래가 주는 약속된 현실의 뜻을 분명히 알았었다면 그 같이 나약하고 비겁한 자가 되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멍에란 죄짐이나 율법의 짐을 가르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의인의 고난과 대신 당하는 고난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비슷한 그 어떤 고난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게 될 때만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있었던 귀중한 뜻을 알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부정 없이 따르는 것이 곧 멀리 따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직업을 버리고 따랐으며 가정도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버리고 따르지는 못했으며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워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고, 어떤 때는 자기 전토나 부모와 형제자매, 자기 목숨까지라도 미워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가 없게 되고, 예수님께 욕만 돌리다가 마침내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 자신을 먼저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이후에 주님을 쫓아야 가까이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으며 마틴 루터는 신앙생활이란 곧 "매일 세례(Daily Baptism)"라고 말하였습니다. 벌써 자기는 죽었어야 하며 그리고 또한 계속 자기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었고 또 계속 죽여야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생활입니다. 자기부정 없는 따름은 언제나 먼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 없이 따르는 일이 곧 멀리 따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은 완전히 하나님께 바쳐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완전히 하나님께 위탁해 버린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 현실에 임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에 자신을 바쳐 버린 후에 현실적인 사건에 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현실 안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부름을 듣고 그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위탁한 후 이제는 어떤 비난이 있고 조롱이 들리건, 채찍이나 십자가의 죽음이 와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벌써 완전히 위탁하였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나약한 때가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모를 때입니다.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확실히 모를 때에 당황하게 되며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다는 확신과 이 일에 대한 자신이 없을 때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직 기도로써 해결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의 해결을 완전히 보지 못하고 현실에 임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실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인간을 만났다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기도 없는 모험은 그 자체가 어리석은 함정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기도해야 했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야 했으며 먼저 기도로써 힘을 얻어야 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보다 더 가까이 따라가서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옆에 있던 자가 하나는 강도라 하더라도 하나는 베드로이어야 했을 것이 아닙니까? 어찌 십자가 옆에 있는 두 사람이 모두 강도들 이였단 말입니까?
    결론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영광의 길은 먼저 고난에서 시작되며 생명은 죽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서는 먼저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기도하고, 먼저 하나님께 생명을 위탁한 후, 그리고 따릅시다. 따르되 바울같이 가까이 따릅시다.
    그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고……"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완전히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며 연합된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 운명에 들어가 하나 된 생명, 이것이 참 생명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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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9 04:47

    sara
    고난주간 설교자료 - 마태복음 26:57-58, 69-75/ 멀찍이 쫓아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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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2 09:29

    고수익 단기 알바
    고난주간 설교자료 - 마태복음 26:57-58, 69-75/ 멀찍이 쫓아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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