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 일곱 마디 중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 주제는 '용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첫 출발은 '용서'라 하는 단어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내가 죄인 것을 깨달았고 '나 같은 죄인도 예수님께서 받아주시고 용서하셨구나!' 믿어질 때 우리의 신앙은 출발을 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감사가 뭔지, 기쁨이 뭔지, 사랑이 뭔지,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용서를 모르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은 자신이 가장 손해입니다.
가슴이 썩고, 병이 들고, 상처를 입은 사람은 반드시 내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어 있습니다. 나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까지 고통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르지 못한 인간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사순절을 맞아 우리 모두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가장 큰 메시지는 용서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이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를 받아야할 허물이 있다면 용서를 받으십시오.
용서를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빨리 용서하십시오.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할수록 저희들의 마음에 평안이 있고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오면서 언젠가 내가 누구로부터 거부를 당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이름만 나오면 화가 나고 가혹하리만큼 그분을 혹평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 사람은 대단히 나쁜 사람이다. 상대할 사람이 아니다고, 뭔가 그분을 통해서 상처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그곳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아, 이렇게 마음을 다짐해보고 맹세해 본적이 있습니까? 나는 절대로 부모처럼 살지를 않을 거야. 몸부림치면서 살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나는 누군가를 향하여 반드시 보복을 할거라. 이렇게 마음을 다짐하면서 살아온 경험이 있습니까?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하고싶은 공부를 못했습니까? 가고싶었던 학교를 가보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까? 친구나 동료를 통해서, 그 사람의 어떤 방해를 통해서,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했던 그런 아픈 경험이 있습니까? 가장 믿었던 사람으로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껴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이 있겠지만 제가 드린 이 말씀 속에 예라고 한가지만 대답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문제 때문에 내 정서와 마음이 묶임을 당한 것입니다. 짓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풀으십시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무덤 속에 꽁꽁 묶여있던 나사로를 향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풀어놓으십시오. 오늘도 좋습니다. 아니면 이번 사순절 동안에 뭔가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나의 마음속에 좋지 않은 감정, 나의 마음속에 묶임이 있다면 풀어놓으십시오. 사랑은 두려움을 내쫒고 진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고 했습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라고 할 수 없지만 인생을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감정에 묶임을 당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묶임을 당한 이 정서 때문에 성령충만을 못 받아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를 못합니다. 외형적으로는 교회생활을 성실하게 해왔어요. 우리가 계속 받은 말씀은 그런 것으로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속 중심을 보십니다.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 일을 했느냐, 하나님은 그것을 보십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함과 묶임에서 풀리지 않는 한은 우리는 심히 나약하고 불안정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나라의 한국 사람에게 아주 많은 병이 있습니다. '화병'입니다. 왜 생긴고 하니? 분노, 억울함, 수치심, 이런 것들 때문에 한국 사람에게 많습니다. 더구나 한국 사람은 정적이고 감정적이에요. 합리적으로 생각하신 분은 그런 것을 합리적으로 풀어 가는데 한국 사람은 정적이에요. 특별히 화병이라는 것은 통계를 보면 20대의 젊은이에게는 없습니다. 최소한 40대를 넘어섰을 때 50대에 많습니다. 그 말은 억울함과 짓눌림이 한번으로 화병이 되지를 않아요. 적어도 최소가 5년-10년을 마음에 삭이고 삭이는 가운데 병적인 증세로 나타난다고 그래요. 평균 보니까 9년 반입니다. 한 두 번 억울한 일을 당해서 병이 되지를 않아요. 얼마나 계속해서 같은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화병이 되겠습니까? 주로 이 화병은 평균적으로 남성이 20%라면 여성은 80%가 넘습니다. 감정을 다 풀지를 못해서 속으로 삭이고 삭이다가 나중에는 병이 됩니다. 이 화병은 모든 발병의 원인이 되어서 정신적인 질환뿐만 아니라 온 사지가 떨리는 병으로부터 암까지 가져오는 무서운 병중의 병이 심령의 병입니다. 사람의 몸에는 기가 흐른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실제 12볼트의 전류가 우리의 몸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 기가 흐르다가 심장에 그 고통으로 짓눌리면 기가 거기에서 멈추고 흐르지를 못하고 굳으면 그것이 가슴앓이가 됩니다. 병원에 진찰하면 전혀 나타나지를 않아요. 그것을 가리켜서 가슴앓이 화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슴앓이가 화병이 있으면 안됩니다. 스트레스는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가슴에 병으로 자리하도록 까지 두어서는 안됩니다. 늘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내 마음의 모든 묶임으로부터 늘 자유하시고 건강하셔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드리겠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오늘 말씀에 아버지여! 하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여! 하고 부르는 그 감정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34절에 "이에"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오른 편에 한 강도 왼편에 한 강도 죄인처럼 그것도 한가운데 예수님을 세워놓고 양쪽에 극악무도한 죄인들을 같이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하나님을 찾는 말씀이 세 번나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 중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다음 맨 끝에 "나의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아버지로 시작하고 아버지로 중심을 이루고 아버지로 말씀을 마칩니다.
무슨 뜻인지를 아십니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했습니다. 그 누구도 못지 않도록 고통과 멸시와 아픔을 다 몸에 겪으셨지만 주님의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없고 화병이 없습니다. 묶임이 없습니다. 자유하십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모든 것을 초월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내 감정과 마음을 묶을 수가 없어요. 상하게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저희들이 모르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불쌍히 여기며 긍휼히 여깁니다. 그들 때문에 화를 내고 분노하고 이를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 알았다면 이렇게 하겠습니까, 모르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는 괜잖아요.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기도를 드리십니다.
성경은 수도 없이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의 말을 지나치게 듣지 말고, 사람을 볼 때 지나치게 민감하지 말고, 주어진 환경에 지나치게 반응하지를 말아라.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할 분은 오직 한 분 있어요. 그런데 그분에게는 너무 둔해요.
여러분, 나중에 말씀을 드리겠지만 예수님께서 "기도하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하셨는데 우리는 기도에는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시동안이라도 깨어 있어 기도하라. 그 잠시 동안이 한 시간도 아니에요. 30분인지 10분인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 시간을 못 참고 졸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깨어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민감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에 대해서는 민감하십시오.
그런데 왜 그쪽에는 너무나 둔하고 둔해야 될 인간관계나 언어나 환경에는 왜 이렇게 민감한지 그게 병인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십시다. 남이 보지 못한 십자가를 보여주셨습니다. 남이 부르지 못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요한복음 16장에 주님이 말씀하기를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 떠날지라도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느니라" 이게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다 버리고 떠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만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지지해주시고, 나를 신뢰해주시고, 나를 믿어주심을 믿습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극복하면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두 번째, 용서하신 하나님을 체험하십시오.
예수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주님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 분속에서 오신 예수님은 그분의 마음과 심장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가장 잘 알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왔노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으나 병든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하느니라 인자가 오는 것은 심판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러 왔노라"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는지, 나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왜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낸지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용서하신 하나님 속에 오신 분이시니까, 누구보다도 늘 함께 그분을 정확하게 알고 함께 잘 사신 분이 예수님이시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를 했습니다. 탕자의 3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배은망덕한 자식, 모든 부모로부터 입었던 은혜를 하루아침에 배은망덕한 못난 자식 그래서 다 키워놓으니까 이제야 부모가 도움을 받고 살까 했더니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고 도망을 가는 자식입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힘들어서 모았던 재산을 가장 짧은 기간에 그 재산을 허랑 방탕한 자식입니다. 아버지는 돈이 아까워서 못 썼어요. 돈을 버는 사람은 아까워서 못써요. 돈을 벌어본 경험이 없고 고생을 해보지 아니한 이 자식은 아버지가 평생 고생해서 모았던 그 재산을 한 순간에 탕진해버린 거예요. 얼마나 돈을 빨리 탕진했으면 성경은 허랑 방탕, 그 정도면 돈을 몇 억을 가지고 있어도 한 순간입니다. 날마다 계집질을 하고, 날마다 도박을 하고, 날마다 술 마시고, 그러니 그 돈이 아버지가 부자여서 얼마나 주었는지 모르지만 한 순간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무식하고 못난 자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자식이 뻔뻔스럽게 집에 찾아옵니다. 이런 사람은 체면도 없고 자존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자식을 뻔뻔스럽게 용서를 합니다. 묻지도 않아요. 이 아들은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찌 아들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를 품꾼의 하나로 써주옵소서" 그랬더니 아버지는 죄인이라는 한 마디도 하지를 않아요.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다 옷을 가져와라 신발을 가져와라 반지를 가져와라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우리 잔치를 베풀자." 너무너무 쉽게 용서해버린 아버지, 그래서 형이 왜 신경질을 부리는고 하니, 동생도 밉지만 그런데 아버지마저 그 동생을 하루정도 벌을 주어서 데려왔으면 좋을 텐데 맨발로 뛰어가서 그 동생을 끌어안고 좋아한 것을 보니 기가 막힌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같이 할 수 없는 큰아들은 집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과는 밥상도 같이 할 수 없고 쓴 커피 한잔도 같이 마실 수 없는 것이 용서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은 가장 저주받은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당당하고 그가 나를 억울하게 했으니까 나는 당연하니 미워할 수밖에 없어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누가 손해인지 아세요? 내가 손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형이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밖에 나와서 들어가자고 끌어도 안 들어가고 어떻게 내가 그런 자식하고 같이 하느냐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런 못된 자식이 허랑 방탕하고 돌아오면 맨발로 뛰어 나가서 "아이고! 내 자식이 오느냐" 하고 그런 부모는 여기에 한 명도 없을 것 같아요. 꾸역꾸역 들어오니까, 뻔뻔하게 들어오니까, 자식이니까 나가라는 말은 못하고 그냥 둡니다. 두지만 환영식은 안 해요. 너 다시 나가든지 있든지 알아서 해. 밥을 먹든지 말든지 너 알아서 하라고 아마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아버지는 그 자식을 죄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아들로 본 거예요. 죄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사람은 미워하지를 않아요.
예수님의 말씀의 결론은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났다면 용서 못할 죄가 없고, 용서 못할 원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나 교만하면 용서를 못합니까? 나 같은 죄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를 받았다면 당연히 용서를 해야지요.
세 번째, 하나님의 명령이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서로 용서하라" 그랬습니다.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너희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너희의 죄를 사해줄 것이고 너희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바울 사도께서도 로마서 12 : 19 ∼ 21절에 말씀하기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리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손으로 악을 이기라"
명령에는 순종밖에 있지 않습니까, 순종은 기분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너 기분이 어떠니? 그렇게 묻지를 않으시고 "무조건 용서하라 너를 미워하는 원수를 보면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고 오리까지 가고자하면 십리까지 가 주어라" 명령은 행동만 있을 뿐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원한 마음이 없을지라도 의무라도 해야돼요. 오직 어려서 짓눌리고 상처가 많기 때문에 그 감정에 묶여서 같은 인간관계에서 조그만 사실 인간관계에서 사실 상처가 아닌데도 내 안에 상처가 있기 때문에 그 자존심의 상처를 건들었기 때문에 확대가 되어서 환상속에 빠져있고 착각속에 빠져있어요. 그러고 자기는 옳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불행한 마음입니까? 어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옳다고 말할 인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고 용서가 나는 필요 없어, 이렇게 크게 외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 가운데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용서를 받아야 될 죄인이고 용서를 베풀어야 될 죄인인 것입니다.
지난번에 훈련을 받으면서 우리 마음에 묶임, 치유, 상함, 분노를 다 드러내는데 한 자매가 땅바닥을 치면서 "엄마, 왜 그랬어. 엄마 미워 그때 왜 나를 버렸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그때 못했던 분노를 그 순간에 다 터트린 것입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엄마, 그래도 사랑해, 그 동안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엄마는 모르지," 결국 엄마를 용서하고 "내가 돌아가면 어머니에게 내가 잘 할께" 그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게 교회입니다. 막힌 담을 허시기를 바랍니다. 묶임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십시오. 용서하지 않으면 내 골방에 그 사람을 인질로 묶어놓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 안에 인질이 있다면 평안하시겠습니까?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인질의 특징은 요구입니다. 내가 인질을 잡아 났는데 무엇을 주든지, 무엇을 하면 풀어주겠다는 거예요. 그게 인질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내 마음에 감옥을 만들고 인질로 가둬놓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불행해요?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그 본인이 얼마나 불행해요. 그런데 그런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어요. 자유하십시오.
네 번째,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기도했어요. 주님이 "가라사대" 그 말은 반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배신한 것을 보시고 "아버지여 가룟 유다를 용서하소서" 그랬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을 때 그것을 지켜본 주님은 그때도 마음속에 "아버지여 저 베드로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병정들이 주님에게 침을 뱉고 채찍을 가하고 못을 박을 때마다 아픔이 올 때마다 주님은 "저들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용서해주시옵소서....."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예수님은 기도했습니다. 화 때문에 여러분이 병이 났습니까? 그 병의 원인은 용서하지 못한 마음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용서를 안 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생긴 병일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남들은 다 좋다고 말하고 기뻐하는데 좋다고 말하는데 여러분 안에 기쁨이 없습니까? 왜 없습니까? 그것은 용서할 것을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빨리 용서하십시오. 빨리 풀어놓으십시오. 그래야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