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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8. 노아의 홍수(창 7:6-12)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 조회 수: 530, 2017.05.23 19:00:39

  •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에 대한 보답을 얻는 것이 믿음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방주를 건조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결과 모든 멸망 중에서 온전히 구원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여 구원받으라고 주십니다. 우리가 군에서 상관의 명령에 ‘왜’ 라고 물으면 우리 정강이에 발길질부터 날라 옵니다. 만약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전쟁에서 ‘왜’ 라고 물으면 바로 총살당합니다. 심지어 직장의 높은 분들이 하는 지시에 대해서도 우리는 ‘왜?’ 라고 물어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냥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하물며 죽고 사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왜?’라고 물어볼 수가 있습니까? 노아의 가정이 그냥 말씀에 순종하므로 구원받은 것과 같이 우리의 구원도 온전한 순종,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복도 온전한 순종에서 오는 줄 믿습니다.


    자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방주의 건조를 마치니 하나님께서는 7일 동안 기간을 주시면서 먹을 양식과 정결한 짐승과 하늘의 새 종류들을 각각 암수 7쌍씩, 땅에 기는 것과 각종 부정한 짐승들을 각각 암수 두 쌍씩 배에 태우라고 하였습니다. 겨우 7일 동안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어떤 동물가들은 이에 대해서 합리적인 의견을 내어놓습니다. 동물과 각종 곤충들은 재난이 오기 전 안전한 곳으로 피해 가는데 하나님은 이러한 동물의 본능을 이용하여 노아가 손쉽게 동물을 구별하여 배에 태우게 했을 것으로 봅니다.


    노아의 홍수는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7장 11절에 보니까 깊음의 샘물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리면서 40일 밤낮으로 비가 쏟아졌다고 말씀합니다. 하늘의 창은 궁창이 막아놓은 아주 두꺼운 수분 층이 터져 내리면서 비를 쏟는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창세기 2장 5절에 보면 노아 홍수 이전에는 비가 오지 않았고 지면에 아지랑이가 올라오면서 식물들에 수분을 공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둘쨋날에 창조하신 궁창 위의 물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구름이나 수증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노아 홍수 이후에 생겨난 현상이고 노아 홍수 이전에는 이 궁창의 물을 통해 어느 정도의 햇빛이 들어와야 했으므로 이 수분 층은 거의 물에 가까운 성질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깊음의 샘물이라는 것은 바다가 아닌 궁창 아래의 물.... 즉 땅 속에 가두어 놓은 물들이 터져서 올라오면서 엄청난 홍수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머무른 아라랏 산은 높이가 5,000미터 정도입니다. 유럽의 지붕이라 하는 필라투스 꼭대기가 3,800미터입니다. 이런 산들을 다 덮어야 땅 위의 모든 생명을 멸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5,000미터 이상 높이의 산을 물로 덮으려고 하니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쏟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 보아 지구를 감싸고 있었던 궁창 위의 물이 얼마나 많은 양이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이렇게 엄청난 양의 물을 쏟아 부으면서 모든 산들을 다 덮었다고 하는 것은 요즘 엄청 높은 산꼭대기에서도 해조류나 조개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에서도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노아홍수에 대한 시실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애녹을 통하여 노아의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거라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애녹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임하리라’는 뜻을 가진 ‘무드셀라’ 하여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969년이라는 무드셀라의 나이만큼의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의 방주에 오르기를 기대하였지만 방주를 만든 노아의 8식구만이 구원을 얻는 아주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떠나서 그를 감화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구원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입니다. 회개하고, 중생하고,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은 온전히 성령의 사역에 속합니다. 노아 시대처럼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은 그분의 영인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가 구원받도록 감화하십니다. 초대교회 오순절에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지금껏 우리의 구원에 강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해도 6월 첫째 주일이 되면 성령강림 기념주일이 되는데 우리가 받은 구원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보라 지금은 구원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은혜의 날이로다” 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새벽에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야 할 것은 ‘성령이여 나를 감화하옵소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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