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아이 어떻게 키울까?(막9:21-27)
  • 조회 수: 234, 2013.02.06 18:16:51
  • 5월 가정의 달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복받는 귀한 가정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은 어린이 주일로서 '우리 아이 어떻게 키울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이름을 갖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온 것은 병든 자를 낫게 하기 위하여' 꼭 육체적인 병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내가 온 것은 가난한 자로 부요케 하고 귀먼 자를 듣게 하고 눈먼자를 보게 하고 포로되고 눌린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던 목적과 이것이 내 삶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진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 삶의 가난함이 부요케 되었는지, 또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육체적 질병과 영적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더나아가 세상의 욕심으로 우리의 눈이 어두워 졌지만 예수를 믿고 내 눈이 밝아져 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의해 항상 눌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포로 되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억누르고 자꾸만 몰아 붙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나는 참 자유함을 누리고 있는가?' 라는 이 분명한 확신과 믿음이 우리들에게 있을 때만이 우리는 참으로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 어떻게 키울까? 
      이 질문 속에 대답이 벌써 나왔습니다. 우리의 모든 자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자녀문제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안고 그 문제와 씨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어떤 방법대로 자녀를 잘 양육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자녀를 잘못되게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대로 두면 더 잘 자랄 아이들을 억지로 한쪽으로 몰아서 누르고 억압함으로 자녀들을 어둠 속으로 빠뜨리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한 나그네가 길을 가고 있는데, 어느 한적한 곳에 원숭이 한 마리가 앉아서 아주 이상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원숭이는 계속 열심히 무엇을 하고 있는 데 나그네가 가까이 가서 보니 웅덩이가 있는데 그 안에 보니 물고기가 놀고 있습니다. 원숭이가 계속 들여다보면서 고기를 잡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기를 잡아서는 그 옆 숲 속으로 던집니다. 하루종일 그러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긴 그네가 원숭이에게 물었습니다. 양식을 축적하기 위해서 고기를 잡는가? 아니면 왜 고기를 그렇게 잡아서 던지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원숭이가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물에 빠진 고기를 살려주고 있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원숭이는 스스로 자기는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일들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웅덩이를 들여다보니 고기가 물에 빠져 있기에 자기가 살고 있는 행복한 숲속으로 던진 것입니다. 원숭이는 자기 기준에 맞추어서 모든 것을 보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물에 빠진 고기가 불쌍해서 잡아서 살리려고 숲속으로 계속 던지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행여나 이 어리석은 원숭이와 같은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녀의 재능을 살리려고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어서 아주 훌륭하게 성장시킨 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많은 자녀들은 한국에 그대로 두면 잘 자랄 아이들을 욕심으로 유학을 보내어서 오히려 자녀를 망치는 부모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 속에 두면 잘 놀고, 행복하게 잘 자랄 수 있는 고기들을 건져서 살린다고 숲속으로 던지는 그 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주님의 눈으로 자녀를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자녀를 물 속에서 노는 고기를 건져서 숲속에 던지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셨습니까? 성서적인 가치관과 성서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볼 때 하나님은 아들이든 딸이든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고귀한 인격을 가진 인격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으로 보고 판단할 때는 어떤 아이는 고귀하고 어떤 아이는 그렇지 않다라고 판단해 버립니다.
      성경적인 관점(마태복음 25장)을 통해서 자녀를 볼 때 어떤 아이이든지 개성 있는 인격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존재는 이 땅에 한 아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적인 관점에서 자녀들을 보지 못하고 욕심에 찬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아이들을 쉽게 판단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낙인찍은 곳으로 계속 아이들을 밀어 넣고 맙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자기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어른들이 만든 웅덩이 속에 억지로 밀려들어가서 어둠 속에서 멸망해 가는 자녀들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은 성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헨리 나호엔'이란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녀는 함께 있다가 나이가 들면 자기의 길을 가야할 손님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들이 영원토록 내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자녀들은 다 문제가 있습니다. 전혀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는 자녀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문제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두 가지 사건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9장에 비슷한 사건이 있고, 요한복음 9장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나타납니다.
      한 아이가 귀신이 들렸습니다. 여러 가지 귀신이 들려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한 영은 언제나 순수한 아이들의 영에 들어가서 공격합니다.   마태복음 9장에 나타나는 내용은 한 딸이 죽은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나면서부터 눈먼 자를 두고 있는 가정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자녀들은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는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문제로 생각하고 그 문제를 붙들고 같이 씨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속에 제자들과 무리가 모여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사건을 두고 계속 변론만 합니다.   요한복음 9장의 사건처럼 이 병든 것이 부모의 탓인가? 아니면 조상의 탓인가? 까지 끌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에게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문제가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변론만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못하는 자들을 바라보면서 책망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녀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못 맡기고 우리가 이 일에 붙들려서 함께 고통 당하고 있다면 주님은 '믿음이 없는 자들' 이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믿음없는 아버지를 책망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버지는 '주여 믿음 없음을 용서하소서. 내가 믿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러면서 능력의 손으로, 생명의 손으로 귀신들린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웁니다. 모든 문제에서 떠났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죽은 아이가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아이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긍정적인 눈으로 보셨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잡으시고 "소녀야 일어나라"(달리다굼)' 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가 먼저 믿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자신있게 우리의 자녀를 주님의 손에 위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을 여러분의 관점에서 보면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 자녀가 있다 없다는 것보다 우리의 믿음의 정도의 차이에 따라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는 항상 존재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으로 볼 때 주님은 나사로를 보고도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죽은 자를 바라보고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아이를 통해서 분명히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이루실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태도를 뒤돌아보면서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얼마나 우리의 보는 눈이 제한되어 있고 잘못되어 있는지 다음 예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학교 성적이 항상 꼴찌였습니다. 그는 예술학교를 지원했는데, 3번 지원해서 3번 낙방했다는 것입니다. 교육불능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교육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왜 하필이면 우리 집에 이런 바보가 태어났을까?' 라고 한탄했습니다.   우리가 보는 관점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누구냐 하면 세계 최고의 조각가인 '로댕'입니다. 또 한사람이 있습니다. 이 아이는 5세때 까지 말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멍청한 아이라고 낙인찍혔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이 아이를 '환상에 사로잡힌 저능아다'.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고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돌아가곤 하니까 그렇게 낙인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아이도 학교를 다니다가 퇴학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누구냐 하면 바로 세계적인 석학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였습니다. 또 한 아이가 있습니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왜 둘이 되느냐고 따지는 아이였습니다. 2라고 답을 가르쳐 주어도 왜 그렇게 되는지를 몰랐습니다. 계속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느냐고 질문했답니다. 한번은 새끼를 낳겠다고 하루종일 오리알을 품고 방에 들어앉아 있던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이 이 아이를 '혼란스러운 문제아'라고 낙인찍었습니다. 그래서 13세때 퇴학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가 누구냐 하면 바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입니다. 남자뿐만 아닙니다. 정서 불안 증세로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모든 의사들이 최고의 의술로 이 아이를 치료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치료가 안되어서 의사들이 이렇게 진단 내렸습니다. '회복불능'  그런데 한 노 간호사의 극진한 사랑으로 이 아이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3중고의 헨렌켈러를 길러낸 이 사람은'앤 설리번'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도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 받지 않은 아이는 없습니다. 비록 죄가운데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고귀한 인격체를 지니고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 고귀한 인격을 찾기만 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될 것입니다.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아이가 예수를 만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부모인 우리들이 먼저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도여러분! 자녀를 바라볼 때 절대로 내 관점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십자가 앞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혹 자녀를 보고 걱정하고 있지만 우리의 아이들을 볼 때 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일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걱정한다고 그 앞날을 책임 질 수 없습니다. 계속 자녀를 데리고 있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예를 든 로댕이나 아인슈타인, 또 애디슨이나 앤 설리번의 앞날을 보면 캄캄한 어두움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앞날이 어두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만났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훌륭한 사람들을 만났습니까? 아닙니다. 정말 형편없는 자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평소때 괜찮다는 사람보다도 훨씬 뛰어난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기도문을 읽다가 이런 글을 발견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갖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나를 기준으로 해서 색깔 있는 눈으로 보고 내게 맞으면 받아들이고 맞지 않으면 내뱉아 버립니다.   주님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일곱 귀신이 들린 여인이었습니다. 세상의 문제는 다 안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모든 문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부르며 따라다니던 제자들보다도,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믿음이 좋았던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실 때 모든 제자들은 다 자기 길로 떠났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처음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전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상황은 이렇게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가정에 문제 있다고 하는 자녀들이 있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은 변장된 축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욕심에 차지 않는 아이를 우리에게 주셨을지도 모릅니다. 문제의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우리는 영원토록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통해서 온 가족이 방황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우리 가정을 찾아오셔서 내게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요'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믿나이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주께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아이 어떻게 키울까? 돈에 기준을 두지 마십시요. 세상 기준에 기준을 두지 마십시오. 잘못된 교육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녀를 잘 키우는 너무나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므로 참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 자유함을 누리는 참된 행복과 평안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까지 공급하는 훌륭한 믿음있는 부모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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