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복받는 어린이(막10:13-16)
  • 조회 수: 182, 2013.02.06 18:39:06
  • "동화로 시작해서 악몽으로 끝맺다" 다이애너비와 찰스 왕세자의 이혼에 대한 BBC TV에 대한 보도입니다. 세간의 화제가 된 결혼이었지만 그러나 불운으로 끝맺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부모의 사랑의 결핍이 나타나 있습니다. 부모가 애정을 주는 것 중요합니다. 요셉은 사랑을 듬뿍받아 시련을 이겨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위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 나라의 도처에는 퍽 많은 고아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아원에 수용된 고아 가운데 42%나 부모가 있는 고아라고 합니다. 오직 8%만의 어린이만이 부모가 없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부모님이 죽음으로써 고아가 되고 수용시설에 맡겨졌습니다마는 요즘의 고아는 단지 돌볼 사람이 없어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엄연히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버려져서 고아가 되고, 문제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고아를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가출과 자살까지 안갔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완전히 소외되어 고민하고 희생당하는 어린이들을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절망과 반항과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어린아이들의 오늘의 절망은 내일의 폭력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도덕의 원인도 여기에 있습니다.
     구세군의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는 슬하에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일꾼들로 성장했습니다. 캐서린 여사가 세계적으로 모든 사람의 눈에 위대하게 비친 원인은 남편을 위한 내조에도 있었지만, 이보다는 여덟 명의 자녀 모두를 그렇듯 훌륭하게 키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사에게 교육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여사의 대답은 담담하고 명료했습니다. "언제나 악마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나쁜 습관을 배우기 전에 좋은 습관을 먼저 가르치고, 악마가 나쁜 생각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좋은 생각을 가르치고, 악마가 나쁜 지혜를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치고, 악마가 사단의 거짓과 위선과 악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마음속에 악마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먼저 배우게 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야 합니다.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체로 경건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흔히 어렸을 때는 아직 사물에 대하여 잘 모르고, 사고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어리다고 하는 그 때에도 복음을 듣고, 영적 체험을 하고, 중생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입
    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어린아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된 우리가 어린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어떤 마을을 총총히 지나고 계실 때, 그 마을의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께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해 주시기를 간청했다고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제자들이 꾸짖거늘(13절)"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자 귀찮아서 꾸짖었을까요? 생각해보십시다.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붙들고 이야기하고 복을 빌고 하는 일보다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더 크고 중요한 일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은 시간만 빼앗기는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소홀히 여겼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축복하는 것은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복을 빌어준다고 당장 눈앞에 어떤 확실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변화는 이삼십년 뒤에나 나타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에 관한 것은 전부가 그렇습니다. 눈에 띄게 당장 얻어지는 효과는 없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쳐보신 분들은 아마 아실 것입니다.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에 보면 서로 장난질이나 하고 돌아다니지 가르치는 내용을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해보십시오. 줄줄 잘도 대답합니다. 장난치면서도 들은 것은 다 듣습니다. 반면 어른들은 고개도 끄덕이고 간혹 '아멘'을 외치며 모두 이해하는 것처럼 듣습니다마는 막상 물어보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것이 어른과 어린아이의 다른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린이
    들을 조급하게 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조급히 생각하면 당장은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같이 조급한 생각을 가졌기에 사람들을 꾸짖어 물리친 것입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망하시고 분노하셨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14)" 이렇듯 제자들을 꾸짖으시고는 당신 곁에 모인 어린아이들을 차례차례 모두 안아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새벽부터 자정까지 자식들을 학교에, 학원에 맡기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한테 부모들이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모릅니다. 치맛바람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천재교육, 영재교육, 일류병에 휩싸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끔찍스럽지만, 또 현실적으로 그 끔찍한 일을 자기만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 교육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 교육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문제는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가장 치명
    적인 가치관을 서슴없이 심어준다는 데 있습니다. "너는 뒤지면 안된다. 좀 그릇된 방법으로라도 아무튼 이겨야 한다. 승리해야 한다"고 몰아댑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아이들을 경쟁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키웁니다. 거기에다 사회에는 우리 아이들을 오염시키는 수많은 유혹들이 널려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세상은 세상이고 교회는 교회라고 갈라서 생각합니다.
     저는 이 본문의 부모들을 생각합니다. 예수님 앞에 자기 자식들을 데려왔던 이들은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을까요? 이들은 제자들이 막는 것도 무릅쓰고 예수님을 만날 기회만을 엿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안수받게 하고 싶었고 기도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순전히 자식들을 위해서입니다.
     본문말씀은 어린아이의 일이 모든 일보다 가장 우선적이며,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어린아이들보다 바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던 예수님의 행적 역시 사실은 엄청난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어린이를 위한 일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큰 일이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위해서 하신 예수님의 행위를 본문에서 세 가지로 볼 수 있습
    니다. 첫째는 복을 빌라, 둘째는 가르치라, 셋째는 어린아이들로부터 배우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교훈입니다.
     먼저, 축복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은 복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을 청하는 행위, 복을 내리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유대사람들은 복을 비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마을에 특별히 존경받는 랍비나 어떤 훌륭한 분이 들어서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저 어른을 쳐다보아라, 얼마나 훌륭한 분이냐?"라고 말하면서 자녀들로 그러한 분들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지도록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에게 다가가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어 복을 빌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물론 랍비와 같이 훌륭한 분들은 어린아이들을 차례차례 만나서 머리에 손을 얹고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유대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풍속이 있어왔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지금은 '나는 자녀에게 어떤 본을 보였는가'를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라도 어린아이들 듣는데서 누구를 비방하지 마십시오. 특히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에 대하여는 절대 금기입니다. 쉽게 내뱉는 한마디로 아이들의 운명이 결딴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지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부부사이에도 존경심이 필요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역시 존경심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존경심을 가르치고 우러르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복을 받고자 하는 그 자세, 축복을 구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복을 간구하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도 아버지 이삭이 아들 야곱에게 복을 빌어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뒤늦게 돌아온 에서가 남은 복은 없느냐고 울부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 빌고, 복 받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성경에 나타난 말씀을 통하여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한다고 하지만 아버지 자신이 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에게 복을 내려주십사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축복의 선포가 있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이다마는 네 생명은 내가 준 것이 아니요, 출생도 성장도 운명도 모두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각자의 노력과 수고보다는 하나님의 절대 은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복으로 지금의 내가 있듯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어야만 너의 미래도 열릴 것이다."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은총을 간청하는 이 아름다운 기도, 즉 축복의 선포는 바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요, 삶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축복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위탁하고, 이를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와 그 크신 사랑과 보호와 은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신령한 축복의 의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먹거리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복을 받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신에 대한 정체의식을 자각하게 됩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내 정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나의 나됨에 대한 의문을 바로 그 축복 안에서 풀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터득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절망하는 일이 없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
    고 복을 받는 자세로, 복을 받을만한 그릇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위탁받은 천국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할 것입니다. 내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할 것입니다. 또한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어린아이들에게는 실망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은 어린아이를 실족케 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엄히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절대로 실망을 주지 않도록 좋은 본만을 보이면서 소중히 키워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증오와 시기와 싸움과 다툼을 보여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아이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생각만을 심어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언행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들어본 일이 없는데 아름다운 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린아이는 어른의 언행을 그대로 배워서 똑같이 할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들을 보면 그 부모님을 알 수 있다고 학교의 선생님들은 말합니다. 부모님을 안만나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아이들이란 부모님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본을 보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진실한 모습,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모습과 그 방법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살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봉사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시련을 당했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우리는 이것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일이 잘될 때에는 찬송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모습을 저들의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겨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머니'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우리의 아이들은 '어머니'하면 나를 위해서 늘 기도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납니까? 그렇게 생각될 것 같습니까? 아니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아버지와 싸우는 모습이 떠오릅니까? 훌륭한 어머니란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마음속에 어떤 그림을 그려주고 있느냐에 따라서 훌륭한 어머니일 수도 있고, 추한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이 한가지만 가지고도 모든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셋째, 어린이로부터 배우라고 합니다. 여기서 배운다고 함은 유치해지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신뢰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전적으로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모든 사람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순수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실망감과 노여움을 안겨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배신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에 대해서 전적인 믿음을 가집니다. 하나님과 부모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야말로 천국백성된 기본자세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의심이 없습니다. 천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꿈에 살아갑니다. 그들은 꿈을 잘 꿉니다. 무한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동화가 통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꿈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꿈은 현실보다 강합니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강합니다. 신화는 역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망은 경험을 이겨냅니다. 이렇듯 사랑에 대한 환상적 신뢰야말로 모든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을, 나아가서는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숨겨진 엄청난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꿈이 있는 민족은 망하지 않고 번영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더라도 꿈이 있었던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애굽사람과 동족을 흉년에서 구원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꿈이 있는 소년이었던 모세가 430년간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한 자기 민족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했습니다.
     우리는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어린이 교육에 성공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유대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 된 것은 어린이 교육에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린이들에게 메시야의 자손이라는 꿈을 심어 줍니다.
     그들의 역사는 A.D. 70년에 나라가 로마에 의해 망하고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리고 약 2000년 가까이 지난 1948년에 팔레스타인의 땅, 지금의 텔아비브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신앙으로 뭉쳐 다시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전세계 유대인은 1,500만 명이고, 그 절반인 750만 명 가량이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국토는 작지만 약 300명의 노벨상 수상자(1986년도 통계) 중 93명이 유대인입니다. 미국의 70만 명의 변호사 중 20%인 14만 명이 유대인입니다. 세계적인 언론사인 「뉴욕타임즈」 출판사의 사장이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미국 대학의 법대나 의대교수 중 50% 이상이 유대인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 화가 샤갈, 상대성 이론을 세운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 세계적인
    지휘자 레오나도 번스타인, 영화배우 커크 더글라스, 국제 외교관 키신저, “E.T”와 “쥬라기 공원”을 만들고 최근에는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었던 스필버그도 유대인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성경으로, 미래의 꿈을 심어 주는 교육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과열된 교육열이 바로 될 수가 있고, 우리 민족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에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혹은 어머니의 무릎에 쪼그리고 앉아 불편하게 잠자는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편안히 누우면 더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사실 어머니의 등이나 무릎에 기대어 자는 것이 우리의 눈에는 불편해 보여도 그들에게는 더없이 편한 것입니다. 무릇 아이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고서야 잘 수가 있습니다. 자다가도 손을 뻗쳐서 어머니를 만지고, 어머니의 체온과 사랑을 확인해야만 만족
    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확인하고 살아갑니까? 어린아이들은 결코 교만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전적으로 믿고 사랑할 뿐입니다. 사랑중심의 세계관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 없는 단 한순간도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린아이들의 마음입니다.
     강아지는 태어나서 30∼45일 되면 어미에게서 떨어져서 독립생활을 합니다. 병아리도 역시 한 달이 지나면 어미의 품을 떠나 혼자서, 자유로이 마당을 돌아다니면서 먹이를 먹고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송아지도 일 년이 되면 어미의 품에서 떨어져 혼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나서 가장 오랜 시일 동안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어린이는 사랑으로 양육하고 교육해야 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패전 이탈리아 시칠리 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산을 하나 가운데 두고 두 고아원이 이웃하고 있었습니다. 한 곳은 연합군과 결연되어 시설도 좋고, 영양가있는 음식을 먹일 수가 있었습니다. 다른 고아원은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우지 못할 뿐 아니라, 분유도 제대로 먹이지 못할 지경의, 시설이 형편없는 고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설이 좋고, 영양도 좋은 음식을 먹인 쪽의 고아원의 어린이
    사망률이 시설이 나쁜 쪽의 고아원보다 60%나 더 높았기 때문입니다. 상식에 위배된 이 결과는 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했고, 연구결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전쟁 중 세 아이를 잃고 실성한 한 어머니가 시설이 나쁜 쪽의 고아원에 찾아들었습니다. 그곳에 수용된 고아들이 모두 자기 자식으로 착각되어 번갈아가며 안아주고, 업어주길 수년 간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아이들은 환경이나 영양 외에, 어머니의 품에서 배어나오는 훈김, 곧 인간성이 아이들 성장이나 건강과 생명에 불가결의 요인이라는 학설이 체계화되었고, 지금 구미의 고아원에는 훈김을 급여하는 사랑의 대모(代母)가 필수불가결의 조건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어린이는 사랑으로 교육할 때 마음을 열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칼릴 지브란에게 한 어머니가 나아와 묻습니다. 아이에 대해 한마디 해 주십시오. 그러자 입을 열어 말합니다.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생명 그 자체를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 딸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통하여 왔지만 당신으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과 함께 있지만 그들은 당신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은 줄 수 있어도 생각은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당신은 그들의 몸을 집에 가두러 둘 수 있으나 그들의 영혼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은 당신의 꿈에라도 방문할 수 없는 내일이라는 집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당신이 그들을 닮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어도 그들이 당신을 닮도록 하지는 마세요.
      왜냐하면 생명이란 되돌아가지 않으며 어제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까요.
      그대들은 활, 그대들의 아이들은 마치 살아 있는 화살처럼 그대들로부터 앞으로 쏘아져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궁수이신 하나님은 무한 궤도 위의 한 표적을 겨누고
      그의 힘으로 그대들을 구부려 그의 화살이 보다 빨리 보다 멀리 날아가도록 합니다. 그대들, 궁수이신 하나님의 손길로 구부러짐을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그 분은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시는 만큼 또한 견고한 활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린아이들은 가슴으로 듣고 마음으로 배웁니다.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치를 따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으로 듣고 배우며, 그 안에서 성장할 뿐입니다. 아이들은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을 받는 깨끗한 그릇으로 자랄 수 있도록 소중하게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복을 주십사 하고 간구하던 어머니들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천국백성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들을 축복합시다.
     여러분, 아이들의 잘못을 나무라십니까? 아이들이 잘되시기를 바라십니까? 훌륭한 자식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잠깐 멈추시고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휼륭한 부모가 있어야 훌륭한 자식이 있음을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축복 받을 수 있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부모가 되게 하여주십시오"라고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리고나서 훌륭한 자녀로 성장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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