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마가14:43-54)
  • 2013.02.07 22:15:02
  • 금주는 주님의 고난주간이자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특히 이날은 주님께서 불의로 먹칠한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성전 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금 청결케 하고자 성례전을 행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주님을 따르게 된 동기는 무엇이며 지금은 어떤 자세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최후의 성만찬을 집례 하셨습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다고 하던 제자들이 고난의 현장에 이르자 다 주를 떠났습니다. 이제 본문에 나오는 주님을 따랐던 분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다시 한번 되돌아 보며 새롭게 되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첫째, 자기의 유익을 위해 따르다가 주님을 배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43절"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 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가롯유다는 어떤 동기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을까요?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확실한 것은 주님을 따르고자 열망하는 많은 지망자들 중에 한 사람으로 주님께서는 유다를 발탁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온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가 택하여 세운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거듭나기를 바라셨고 또 새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요 15:16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과실이 항상 있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던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롯유다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는 그 순간까지 거듭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만찬석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 "목욕한 자는 깨끗하기 때문에 발만 씻으면 되느니라 그러나 다는 아니니라." 고 했을 때 바로 가롯유다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3년동안 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거듭나서 영혼의 깨끗함을 받았는데 왜 가롯유다만 옛 사람 그대로 였습니까?


    그는 주님을 따르면서도 항상 자기개인의 사욕을 추구하였습니다. 마26장 15절 가롯유다가 대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를 주려느냐?" 고 흥정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교회를 상대로 장사를 해보려는 속셈입니다.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얼마전 신문에 총선에 출마한 후보자의 40%가 크리스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예배에 출석하지도 않으며 게중에는 집사들도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처음에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가 병을 낫기 위하여, 가정에 평화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움으로 어떤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원의 주님, 생명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 더 나아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그 결과는 가롯유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은 모두 생명의 주님을 만나는데 까지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삶을 본받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호기심으로 주님을 따르다가 어려울 때 도망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50-52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스승을 버리고 도망하는 마당에 한 청년이 붙들려 가는 예수를 따라갔다는 기록은 참 인상적입니다. 과연 이 청년은 누구일까요? 왜 하필이면 벗은 몸에 이불을 두르고 따라갔을까요? 그는 다름 아닌 바로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였던 것입니다. 마가의 어머니는 부유한 여성이었고 일찍부터 주님을 섬긴 신앙인 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주 제자들과 이 여인의 집에서 모여 말씀을 가르쳤고 그때마다 마가도 더러 참석하면서 주님의 말씀도 듣고 주님을 존경하며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도 주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나눌 방과 발씻을 물을 준비해드리며 순순히 무엇이 더 필요한지 심부름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들이 식사를 마치고 감람산으로 간다는 말을 들으면서 문간까지 나아와 공손히 배웅을 한 뒤 방안을 정리한 다음 그날 따라 예수님의 특별한 주문에 기쁘게 봉사한 흐뭇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이 막 깊어 질려는 순간에 칼과 몽둥이를 든 군병들이 문을 박차고 들이닥쳐서 예수를 내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안계신다고 말했지만 다락방을 샅샅히 뒤졌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란 물음에도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만약에 거짓말을 했다간 큰일나는 줄 알라는 협박과 함께 가롯유다의 인도에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감람산으로 가신 줄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위험을 미리 알려주려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채 벗은 몸 그대로 홋 이불만 걸치고 동산으로 달려갔더 것입니다.그러나 영리한 가롯유다는 예수님의 계신곳을 알고 이미 체포해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 일을 걱정하며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가다가 그만 발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체포된다면 그는 물론 그의 어머니마져 무사하지 못할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번개같은 동작으로 홑이불을 벗어재치고 벌거벗은 몸으로 줄행랑을 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마가가 주님을 따른 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각오를 가지고 따른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그는 주님께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라는 호기심과 일말의 연민에서 따랐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가고자 하는 영적 정신적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육체가 벌거숭이 된 것처럼 그의 정신도 영적 상태도 벌거숭이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의 몸이 적신이 되고 칼 앞에 위험이 닥친다 해도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덧입을 때 바울처럼, 주기철 목사님처럼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셋째, 관망자적 자세로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54절"베드로가 멀찍히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불을 쬐더라."

    베드로는 성만찬을 받아먹을 때 '다른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며 옥에도 죽는데도 함께 가리라는 굳게 맹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체포하러 온 수비대 병사중 하나에게 달려들어 귀를 자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예수님은 해쳐나갈 능력이 있는 분임을 믿고 담대히 위험한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순순히 체포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병사들은 제자들은 물론이요 특히 병사에게 대항했던 베드로는 1급 체포대상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순간에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제정신이 들고보니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해했던 주님을 버려두고 자기들만 도망친 꼴이 되어서 안색을 달리하고 주님을 붸아 갔습니다. 54절에 주님을 멀찍히 붸아갔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고난받고자 하는 각오를 포기하고 여차하면 또 도망할 준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멀찍히 붸아간 것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거리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변의 상황을 살피면서 대제사장의 뜰까지 들어갔지만 그 자리는 고난의 자리가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되는가? 주님의 고난을 관망하는 자리였습니다. 관망이란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연극에 비유한다면 배우들을 비롯한 출연진이 있고 그것을 구경하는 관객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배우가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하속들과 함께 구경꾼이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시는데 여러분은 지금 감상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태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도 그 무대위에 올라가서 주인공은 아니지만 배역을 맡아서 극중의 인물이 된다는 것 아닙니까? 교회활동에 참여자보다는 구경꾼으로 남기 원하는 분 안 계십니까? 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에 배우가 되려고 하지 않고 관객이 되려고 하시는 분 안 계십니까? 멀찌기 따라간 배드로는 결국 결정적인 위기가 닥쳐오자 주님을 부인하는 죄를 짓었습니다. 이렇게 멀찍히 주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안전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결정적인 위기가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패하게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아직도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배신한 가롯 유다에게도, 발가벗고 도망쳤던 마가에게도,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에게도 주님은 자신들을 돌아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도, 베드로도 오순절 성령의 세례를 받고난 뒤 능력을 받아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다 주님의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길을 묵묵히 따라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자리에서 계십니까?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오오 때론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최후 믿음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험한 십자가 붙드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
    우리를 위해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로 올라가신 주님
    그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죄악을 짊어진 십자가요
    가장 치욕적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의 십자가요
    그러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십자가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를 알지 못할 때는 주를 욕하였고, 호기심으로 붸을 때는 위기 때마다 도망하였고,
    나의 의지로 주를 따를 때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주의 고난을 관망하며 부인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무지와 비굴함과 교만함을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고난의 자리와 영광의 자리에 참예하는 저들이 되게 은혜 나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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