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페이지
  • 신약 고린도전서 4:06-13/ 믿음의 해석이 필요한 때입니다! [주일낮]
  • 조회 수: 892, 2017.09.23 18:44:38

  •  바울이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있음에도 자기중심적인 고린도 교인들 때문에 많은 비방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인격이란 일상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드러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인격이 어떠한지가 잘 드러나는 말씀이지요. 지금 사도 바울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습니까? 바로 보여주는 것이 13절의 말씀입니다.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여기에서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라는 두 단어는 먼지 같은 것, 때 같은 것.... 바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취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잘난 척하는 것을 보니 참 지혜로운 것 같은데, ‘우리’는 미련해 보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을 보니 참 강한 것 같은데, ‘우리’는 연약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도인 ‘우리’를 미말에 두신 것 같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지요. 바로 이 시점에서 억울한 가운데서 인격이 드러납니다. 14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고 12절과 13절에서도 “12 …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사도 바울은 자신의 억울함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를 압니다. 억울한 소리를 들으나 변명할 수 없을 때, 누군가와 싸우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꼬여갈 때.... 사도 바울의 마음이 많이 이해가 됩니다.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변명하지 않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 오히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참고 권면합니다. 아니,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처럼 권하려 함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신앙적 행동을 종종 보여 주었습니다. 자신의 정적이었던 사울 왕을 죽일 기회에서 참았을 뿐 아니라 왕위에 오른 뒤에도 왕의 권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때가 있습니다. 참 억울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떠나 피난 가야 했을 때 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배신으로 도망을 가는 것도 힘든 일인데, 피난길에서 자신의 신하였던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피난 가는 왕이지만, 아직 왕입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놓고 저주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다윗의 부하들이 분을 참지 못하여 칼을 빼 들고 시므이의 목을 치려고 합니다. 그러자 사무엘 하 16장 10절에서 다윗왕은 자신의 신하들을 만류합니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라고 하며 그의 저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던 길을 그대로 갑니다. 억울했을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그 모욕을 참고 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회복시키고 복을 주셨던 것을 압니다. 그의 마음 자세와 신앙을 보시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억울한 이 순간 사도 바울 역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본문 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 사도 바울이 신앙적인 해석을 한 것입니다. 믿음의 언어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비천한 사람 취급을 받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만드셨구나!’ 시인 서형선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라는 시가 오늘 저의 설교내용과 좀 맞는 것 같아서 한 번 소개합니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행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를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계의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비록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당신이 나에게 바라시던 그 모든 것을 주셨사오니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삶을 변명하기보다는,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려 했던 것이 아닐까요? 어떤 비방을 받든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가 꺾이지 않으므로 변함없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고백은 아닐까요?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런 신앙적 해석이 자신에게서 일어나자 원망과 욕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고 비방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사랑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만물의 찌꺼기 취급을 했지만, 이들은 결코 찌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찌꺼기라고 인정하는 순간, 더는 찌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억울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억울함을 씻으시고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 비천한 취급 받는 것을 참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를 높이시는 하나님.... 바로 이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그릇을 만들어서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그 그릇에 합당한 사역을 맡기신다고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과 기회를 함께 축복해 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큰 사역을 맡겨 주시겠습니까? 원망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원망’이라는 놈이 모든 것을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신앙적 렌즈를 가지고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수없이 많은 일 가운데 여러분의 신앙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신앙적인 해석을 내리는 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신앙적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호  분류  제목  조회
notice 공지사항 93959
주일낮 892
178 주일낮 462
177 주일낮 692
176 주일낮 535
175 주일낮 611
174 주일낮 535
173 주일낮 331
172 주일낮 731
171 주일낮 837
170 주일낮 244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