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드로의 실패와 슬픔 (막 14:66-72)
  • 2013.02.07 22:17:36
  • 여러분, 에디슨을 아시지요? '에디슨, 토마스 에디슨' 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아마, 발명왕, 발명의 아버지, 그리고 그가 발명한 수많은 발명품들이 먼저 떠오르실 것입니다. 혹시, 그가 발명한 발명품들이 모두 몇 개나 되는지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그는 무려 1천 100여개나 되는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얻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구와 비슷한 백열 램프를 비롯해서 영사기, 축음기 등 발명왕 에디슨이 만든 것들은 일일이 손으로 꼽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에디슨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의 성공, 발명품, 그리고, 그가 수많은 발명품들을 만들어낸 발명 왕, 발명의 아버지라는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화려한 성공 뒤에 가려진 어두운 실패와 좌절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한가지 예로, 그는 그 유명한 전등을 발명하기 위해서 무려 2천 번이 넘는 실패를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스포츠에 조금만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베이브 루스라고 하는 미국의 전설적인 홈런 왕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생애 통산 714개라는 홈런을 때려서 1976년까지 세계 최고 기록을 유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베이브 루스가 홈런 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그가 역시 스크라이크 아웃을 제일 많이 당한 세계 기록 보유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는 714개의 홈런을 치기 위해 무려 자그만치 1330번이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714번의 성공을 위해 무려 그 배에 가까운 1330번의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에게 1330번의 스트라이크 아웃이라는 실패가 없었다면, 그는 역시 홈런왕이라는 성공도 맛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했을 때,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이 2천번의 실패를 거듭한 후 전등을 만들었을 때 느낌이 어땠습니까?'그러자 에디슨이 말했습니다. '2천번의 실패라니요. 난 전등을 만들기 위해 2천번의 단계를 밟고 올라서서 전등을 만든 것뿐입니다.' 이처럼, 성공적인 삶이라는 것은 그가 얼마나 실패를 적게 경험했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온 그 실패의 순간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감수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를 생각할 때도, 우리는 역시 그를 예수님의 수제자, 위대한 사도, 주를 위해 거꾸로 달린 순교자 등등의 이미지를 쉽게 떠올립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어쩌면 그는 실패자였습니다. 어쩌면 그의 삶 전체는 실수와 실패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14:22-23에 보면, 예수님이 바다위로 걸어오실 때에 베드로 역시 아주 믿음있는 모습으로 배에서 내려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만 곧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바다에 빠지게 되는 실패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마16:22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해 가르치실 때에, 베드로는 비록 충정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긴 했지만,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는 싸늘한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도, '주여 내발을 씻기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나섰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는 예수님의 책망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에 살펴본 것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사 기도하시는 중에도 그는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잠에 취해 있던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는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갈2:12에도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자들이 이를 때에,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는 외식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실패하였던 모습도 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수제자요, 위대한 사도요, 주를 위해 기꺼이 순교의 잔을 마시기까지 했던 성공한 베드로의 실패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러한 실수와 실패의 절정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대로, 그는 아주 자신 만만했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자신하던 그였습니다. 하지만,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그는 주를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리고 그는 주를 부인하였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리고 주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말입니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그리고 오늘 본문, 72절에 보면, 닭이 두 번째 울 때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심히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마26:75, 눅22:62에 보면,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실패투성이인 것처럼 보이는 삶을 살았던 베드로이지만, 그의 실패는 단지 실패 그 자체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패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의 이러한 수많은 실패들은 그의 더 나은 모습, 더 성숙한 신앙을 위한 받침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실패들로 인해 훗날 베드로가 어떠한 삶과 사역을 감당하였는지는 누구보다 우리들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이 실패와 그의 슬픔에 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요, 위대한 사도요, 순교자인 베드로, 그의 실패하는 적나라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가를 통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뿐만 아니라, 그러한 베드로의 실패와 슬픔을 다루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신앙의 실패는 기도의 실패로부터 시작된다.
      우선, 오늘 베드로의 실패는 무엇보다도 기도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게 된 이유는 그에게 결연한 각오나 마음의 준비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 본 것처럼, 그에게는 남다른 결연한 의지와 각오가 있었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그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실 때에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자신있게 대답하던 그였습니다.하지만, 그의 이러한 결연한 각오나 마음의 다짐으로도 오늘 그의 실패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그가 실패한 것이 용기 부족 때문이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막14:46-47절을 읽겠습니다.
     '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요18:10에 보면, 그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음을 사도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이처럼, 분명 베드로에게는 칼을 뽑아 예수님을 잡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리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 종 말고는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수많은 무리들 중에 있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러한 베드로의 용기도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실패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혹시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열정이 식어버렸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막14:54절에 보면, 비록 처음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던 베드로가 다시 돌이켜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비록 그것이 멀찍이, 멀리 떨어져서 좇아간 것이긴 했지만, 그는 예수님이 잡혀가신 대제사장의 집 뜰 안에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예수님이 어떻게 되시는가 궁금해서, 호기심이 발동해서요? 구경이나 하려구요?
      아니지요!
      예수님이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비록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지만, 그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걱정스럽고, 안타까워서 자신이 위험한 지도 모른 채, 주님을 따라 들어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주님을 향한 이러한 사랑의 열정 또한 그가 주님을 부인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결정적으로 실패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는 그렇게 비참하게 실패하고 맙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기도에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에서, 바로 조금 전에 주님과 함께 있던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일에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힘쓰고 애써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간절히 기도하시던 그 밤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잠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몇 번이나요? 그래요,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며 실패했던 그 숫자 만큼이나요.
      그래서, 그토록 주님께서 안타까워 하시면서 잠들어 있던 그들을 깨우시지 않았습니까?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깨어 기도하는 대신 잠에 취해 있었고, 끝까지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하지 않는 삶 자체가 바로 신앙의 실패요, 기도 없는 다짐과 각오, 기도 없는 용기, 기도 없는 사랑의 열정 또한 그 자체가 실패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시험과 실수들, 그리고 실패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마음의 각오나 다짐이 없어서일까요? 용기가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 식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수준은 아닐지라도, 나름대로 주님을 향한 마음의 각오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겠다는 용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를 향한 사랑의 열정도 뜨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기도하지 않는 삶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 없는 각오, 기도 없는 용기, 기도 없는 열정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토록 간절하게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눅22: 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나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리고, 훗날 베드로도 역시 이렇게 간절하게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와 같이 신앙의 삶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성도, 근신하여 깨어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신앙의 실패는 가장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의 신앙의 실패는 가장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실패하게 된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그가 어떤 계기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게 되었습니까? 뭔가 크고 막대한 위협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의 비자가 던진 말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여기 본문에 등장하는 비자란, 대제사장의 저택에서 일하는 계집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작고 보잘 것 없는, 계집종이 던진 말 한마디에 그만 베드로는 넘어지고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이 여러분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지십니까? 정말 초라하고 불쌍하기 그지없는 모습 아닙니까? 아니 글쎄, 주님의 수제자요, 12제자중 가장 대표적인 큰 사도가 아닙니까? 거의 3년 동안이나 주님과 동고동락하며 하나님 나라의 깊은 비밀을 듣고 깨달았던 그가 아니었습니까?
      그의 입과 손을 통해 전해졌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그 복음의 권세는 또 어떻습니까? 게다가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 용기, 마음의 각오로 치면 그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던 그가 아니었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검을 빼어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떨어뜨리던 그가 아니었습니까?
      그런 그가, 글쎄 다른 사람도 아닌 작은 비자의 말 한마디에 넘어지고 실패하다니요? 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입니까? 혹시, 그가 예수님처럼 대제사장들 앞에, 그 무시무시한 권세와 위엄을 지니고 있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 앞에서 심문을 당하다가 그러했다면, 그래도 조금 이해할 만한 여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혹시 칼과 몽둥이를 앞세운 덩치 좋은 장정들의 모진 고문과 핍박, 그리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 어쩔 수 없어 그러했다면, 그 역시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아무런 힘도, 권세도 없는 작은 비자가 던진 말 한마디 때문에 주님을 모른다고,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실패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우리는 뭔가 크고 엄청난 세력 앞에서, 그리고 뭔가 대단한 명분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아주 작은 일, 아주 사소한 문제들로 인해 종종 쓰러지고 넘어지며, 실패하게 됩니다.한 번 돌아보십시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리고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여러분들이 넘어지고 쓰러졌던, 실패했던 순간들을 더듬어 보십시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넘어지고 쓰러진 것 같습니까? 뭔가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외부의 압력이나 물리적인 핍박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도무지 우리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엄청난 세력이나 상대와의 싸움 때문에 넘어지고 실패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문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다른 형제나 자매들이 던진 말 때문일 수도 있고, 괜히 부리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불쑥 올라오는 우리의 자존심이나 성급한 감정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세 치 밖에 되지 않는 우리의 혀에서 내뱉어진 무절제한 언어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이제까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우리를 넘어뜨리고 쓰러지게 했던 것들은 다름 아닌 아주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의 영적인 적은 아주 먼 곳에, 아주 크고 위협적인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그것도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늘 깨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베드로의 슬픔과 통곡 뒤에는 주님의 바라보심이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베드로가 실패하는 모습을 통해 귀한 교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실패- 그것도 주님을 맹세하며 저주하며 부인하는 비극적인 종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마가는 마지막 72절에서 베드로가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마태와 누가 역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베드로의 슬픔과 울음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가 울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도대체 이 울음, 이 슬픔은 어떤 종류의 슬픔이며 울음입니까? 그저, 후회와 한탄, 탄식의 슬픔이요, 눈물입니까? 그리고 그 후회와 한탄, 탄식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난 후에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까?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베드로가 어떻게 울게 되었는가? 왜 그는 울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누가는 자신의 성격과 직업에 맞게 이 부분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22:61-62절입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여기에 보면,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특이한 구절이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마가는 그냥 베드로가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다고 기록하였고, 마태 역시 그냥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누가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생각하게 된 근본적인 계기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그렇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돌이켜 보셨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서 있는 곳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오신 대제사장의 집 앞 뜰, 뜰 안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 뜰 안에, 그 앞뜰에 지금 베드로와 예수님이 같이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침 뱉음을 당하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침을 당하는 치욕을 겪고 계신 바로 그 장소에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것도 맹세하며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주님이 베드로를 돌이켜 보신 것이었습니다.; 이 때 우리 주님의 시선은 어떠하였을까요? 베드로의 배신과 실패를 야속한 눈으로 책망하시듯 바라보시는 정죄와 심판의 싸늘한 시선이었을까요? 아니면, 오늘 본문의 비자처럼 의혹과 불신의 눈으로 빤히 노려보시는 미움과 정죄의 차가운 시선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관용과 사랑의 시선이었습니다. 그것은 용서와 화해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실패 후에 꼭 필요한 회복과 소망의 시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은 베드로가 어떻게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패할 것인가를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당당하고, 그렇게도 용기있고, 그렇게도 사랑의 정열이 있었건만 그래도 쓰러지고 넘어진 베드로를 주님은 돌이켜 보셨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리고 넘어진 그를 관용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용서하고 일으키며 소망을 주시기 위해 그를 돌이켜 보신 것입니다.
     베드로야, 괜찮다. 나는 괜찮다. 그래 내가 이미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단다. 너무 절망하지 말아라. 내가 네 마음을 안다.
     그래도, 나는 아직 네가 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던 그 사랑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 나를 떠나 아주 멀리 도망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돌이켜 멀찍이 따라와서 이 곳에까지 들어온 네 마음을 안다.
     그래, 지금은 비록 네가 이렇게 실패했지만, 그래도 너는 내가 준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고 나를 위해 죽기까지 할 것을 알고 있단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주님은 베드로를 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주님의 시선을 통해 알았기에 베드로 역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베드로의 이 슬픔은, 그리고 이 통곡은 가롯 유다의 그것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참된 회개의 눈물이었고, 사랑과 용서의 눈물이었고, 소망과 비전의 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어김없이 실패의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절대 실패하지 않고, 절대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고 승리만 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 실패와 넘어짐 후에 취하는 우리의 반응과 태도입니다.가룟 유다처럼, 그저 후회와 한탄에 젖어 더욱 더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실패의 길로 떨어질 것인지, 아니면, 베드로처럼, 우리 주님의 사랑과 용서, 회복과 소망의 시선을 바라보고 다시금 그 자리에서 일어날 것인지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부디 원하기는 오늘 이 자리에 예배하는 우리 상암의 성도들 모두 주님의 시선, 주님의 눈길을 바라보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실패하고 넘어졌어도, 자꾸 쓰러지고 또 쓰러져서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도, 여전히 사랑과 관용의 눈길로, 용서와 화해의 눈길로, 회복과 소망의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마주함으로, 다시 소망 가운데 일어나서 맡겨진 삶과 사역의 현장에서 승리하시는 상암의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신앙의 삶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성도, 근신하여 깨어있는 성도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의 영적인 적이 아주 먼 곳에, 아주 크고 위협적인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그것도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늘 깨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여전히 사랑과 관용의 눈길로, 용서와 화해의 눈길로, 회복과 소망의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을 마주함으로, 다시 소망 가운데 일어나서 맡겨진 삶과 사역의 현장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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