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보다 더 귀한 사람(마가복음 14:22-24)
  • 2013.02.07 22:04:28
  • 사람은 경제적인 존재입니다.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물물교환을 하였습니다.
    서로 주고 받는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로빈슨크루소는 무인도 섬에서 혼자의 힘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필요한 생필품을 직접 만들거나 구해야 했습니다. 그의 불편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밥그릇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로빈슨크루소는 여러날을 허비해야만 했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가기가 힘든 것입니다.

    경제 활동은 하는데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제일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적게 투자하고 가장 많이 얻는 것"입니다. 소비자는 가장 좋은 물건을 가장 싸게 사기를 원합니다. 상인은 가장 싼 물건을 가장 비싸게 팔기를 원합니다. 이런 상충된 가치기준 때문에 상인과 소비자는 항상 열띤 흥정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책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제가 가진 물건 중에서 가장 많이 투자한 품목이 바로 책입니다. 아마 수 천 만원은 족히 투자했을 것입니다. 책은 한꺼번에 왕창 구입하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관심 있는 분야의 책들을 구입합니다. 요즘에 보통 책들은 8,000~10,000원입니다.
    1만원 미만의 책을 구입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30분에서 1시간 정도입니다. 어느 책을 구입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보통 같은 종류의 책들을 3~5권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결정합니다.
    만약 10만원대의 책을 구입한다면 서점 한곳만 가지는 않습니다. 청계천에 나가서 여러 곳을 돌아본 후 가장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에서 삽니다.

    우리는 값이 싼 물건을 구입할 때는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물건이 수 천 만원에서 수 억 원대에 이르는 것이라면 매우 심사숙고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김선애 선생님이 아파트를 구입해서 이사를 했습니다. 그 아파트를 구입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3개월 이상 걸린 것으로 압니다. 이쪽 저쪽 많은 아파트 매물을 보았을 것입니다. 비교도 했을 것입니다.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남편과 의논했을 것입니다. 또 시어머니나 친정 어머니하고도 의논했을 것입니다. 주변의 친구들에게 의논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아파트 하나를 구입하는데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아파트는 김선애 선생님의 전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고 무엇인가를 사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주고 구입하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기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생명을 주고 구입할 만큼의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과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물건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생명을 지불하고서야 구입할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있다!"
    과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생명을 지불할 만큼 값비싼 존재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너다!"
    하나님은 바로 당신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로 나와 당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보다 더 귀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구가 아닌데 자기 목숨보다 덜 귀한 것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시겠습니까? 인간들도 가장 적게 투자하고 가장 많이 얻는 것을 경제의 지혜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보다 가치 없는 것을 위해서 생명을 투자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2-24)

    나와 여러분의  존재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인식하십시오.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가치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도 어머니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잘될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너는 싹수가 노랗다"
    "나가 죽어라!"
    물론 얼마나 속을 썩여드렸으면 어머니가 이런 욕을 하셨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욕들이 어린 저에게는 많은 상처로 남게되었고, 매우 낮은 자존감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던지 제 아내와 연애할 때 다방에서 혼자 기다리지를 못했습니다. 10분만 혼자 있어도 모든 사람들이 저만 쳐다보는 것 같고 창피해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연세대학교를 다니는 어떤 청년은 늘 자신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일류대학을 다니는 청년이 왜 자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너무나 부족하다는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화장실에 가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들어오시던 어머니와 마주쳤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저에게 소리치셨습니다. '아니, 너 화장실에 가는데 무슨 휴지를 이렇게 많이 가져가니? ' 그러면서 자신이 가지고 가던 휴지를 빼앗은 후 서너장의 휴지만 다시 건네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화장실에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휴지만도 못한 인간이구나. 그 후부터 나는 매우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마음속 깊이 갖게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도 때에 따라서는 그의 내면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이와 같은 많은 일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결국은 우리를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도록 만드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머리를 완전히 빡빡으로 깎던 시절에 살았습니다. 그 멋있던 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리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저는 완전히 밀린 머리를 보면서 제가 못생겼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은 항상 거울을 볼 때마다 사라지지 않고 기억났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던 고등학교 때는 제가 못생겼다는 생각이 더욱 크게 자리잡았습니다. 이리보고 저리 보아도 틀림없이 못생겼습니다. 저는 혼자 있을 때는 이리저리 거울을 드려다 보았지만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거울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학생들만 보면 도망다녔습니다. 가로등 밑으로 지나가는 것조차 싫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못생긴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독특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도록 독특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비교하려면 똑같은 것이 여러 개 있을 때 비교합니다. 똑같은 종류의 물건이라야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누구와 누구를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온 세상에 나와 같은 인간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매우 독보적이고 독특한 존재인 것입니다. 절대로 누구와 비교해서 열등감을 갖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신 후 매우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나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하나님은 자신의 목숨을 지불하셔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생명을 투자할 만큼 대단한 존재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우주보다 귀한, 예수님보다 귀한 존재가 바로 납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3일동안 청주 CCC아카데미센타에서 열렸던 '내적체유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내 마음속에 울고있는 내가 있어요'의 저자인 주서택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함께 3일동안 생활하면서 참 순수하고 맑은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처럼 순수하고 맑은 분은 별로 만난 기억이 없습니다. 강의 내용보다도 그분의 인격과 신앙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분에 대해서 더욱 친밀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 중에는 제 신학교 선배였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주서택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울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청주로 내려오면서 강남고속터미날에서 어느날 장미를 100송이 샀다고 합니다. 함께 가던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아니, 누구에게 줄려고 장미 100송이나 삽니까?"
    그때 주서택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바로 나에게 주려고 삽니다!"
    주 목사님은 장미 100송이를 자신의 가슴에 앉고서 말했다고 합니다.
    "서택아, 너는 존귀한 존재란다. 예수님이 생명을 주고 구원 할 만큼 너는 대단한 존재란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위대한 존재로 바라보십니다. 우리는 결코 못난 존재가 아입니다. 싹수가 없는 존재도 아니고, 재수없는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못생긴 존재도 아니고, 무능한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온 우주에서 가장 독특하고 위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지불하고 구원할 만큼 값비싼 존재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존재인 내가 위대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영적 비밀이 있습니다. 이 비밀을 모르면 우리의 위대한 생명은 항상 싸구려 인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비밀은 바로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이 말씀을 마음에 꽉 새겨두십시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주에서 가장 독특한 존재이며, 천하보다 귀한 나의 존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비밀입니다.

    왜 우리의 삶이 행복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삶이 근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습니까?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삶이 답답합니까?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삶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처럼 흔들립니까?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행과 모든 아픔이 다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고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께 붙어있다면 성도의 삶이 메마를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불행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삶은 항상 생수가 흘러야 하고, 배부름과 행복감이 넘쳐야 합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왜 예수님게 붙어 있으면 항상 목마르지 않고 배부릅니까?
    요한복은 6장 3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떡이며 생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풍성하고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난하되 낙심하지 않으며, 병들 었어도 절망하지 않으며, 지식이 없어도 열등함을 갖지 않으며, 명예가 없어도 부끄럽지 않고,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소망이 없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이러한 삶은 살아가는 사람이 송명희 시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송명희 시인의 이 복음송을 좋아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자긴 지식 업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송명희 시인은 초등학교도 못나온 사람입니다. 초등학교를 진학하지 못 할만큼 매우 큰 장애를 입고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항상 집안에 갇혀 지내야 했으며 집안에 부끄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손님이 오면 그녀는 자리를 피해 있어야 했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지 못할 만큼 심한 언어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말 이런 삶을 계속 살아야 하나 할만큼 비참한 장애자였습니다. 그러한 그녀가 하나님을 만난 후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평하다고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을 하나님은 송명희 시인에게 베풀어 주신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송명희 시인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제 밤에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샘 쌍둥이'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태어날 때 그들은 배나, 엉덩이나, 머리가 붙어 태어납니다. 심한 경우에는 심장이 하나밖에 없거나 간이 하나밖에 없어서 두 아이가 공유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40년간 샘 쌍둥이로 살아가는 남매가 있었습니다. 남아(男兒)는 머리와 몸이 정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아의 머리에 여아가 붙어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안거나 바퀴달린 의자에 누이를 앉히고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그냥 서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전에는 누이가 미용실에 사는데 시간을 사용하면, 오후에는 오빠가 볼링장에 가서 운동을 하는 식으로 서로를 위해서 반반씩 하루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괴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붙어서 태어난 것뿐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끔찍한 모습이었고, 너무나 가슴하픈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였을뿐 오히려 당사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처럼 샘 쌍둥이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왜 그들을 샘 쌍둥이로 태어나게 했을까요?
    그 대답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고백할 뿐입니다.
    샘 쌍둥이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공평하신 하나님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울고 싶을 뿐입니다. 왜 그런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처럼 알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에 노출된 삶을 살아가면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붙어있는 삶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다는 것은 바로 믿음이 있다는 것고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버리고 우리의 상식이나 합리적인 경험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예수님을 떠나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한 삶은 포도나무 가지가 꺽인 것처럼 메말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왜 우리의 위해서 죽으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몸과 피를 다 흘리시면서까지 십자가에서 죽으셨겠습니까?
    아! 이것을 우리가 알았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아직도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아직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합니까?
    말도 안됩니다. 우리의 삶이 수고와 슬픔과 고통의 삶이 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도적놈 마귀에게 속아서 수고와 슬픔과 고통의 삶을 살지 마십시오.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으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더 존귀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값싼 물건을 비싸게 사는 사람이 없듯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보다 더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헛되지 않도록 존귀하게 살아갑시다.
    예수님께 붙어 있으세요. 떨어지지 마세요.
    우리들의 삶은 생명과 풍성함으로 넘칠 것입니다.
    더 이상 목마르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수이며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있습니다.
    세상에 돈이나 사랑은 우리의 생수가 될 수없습니다. 세상에 직장이나 사업은 우리의 떡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 예수님을 매일 매 순간 내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갑시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2-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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