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막14:32-42)
  • 2013.02.07 22:07:40
  •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삼주 뒤에는 고난 주간이 맞이하게 되겠고, 이 사순절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우리 자신이 경건 훈련과 감사함을 생각하면서 21일 작정 새벽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 사순절을 우리는 뜻 있게 보내서 우리 신앙과 생활에 유익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상황을 복음서를 배경으로 해서 살펴보면서 사순절의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들어 가셔서 식사를 하시고 거기서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발을 씻겨 주심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고가의 향유이지만 그 여인은 그것을 예수님께 받쳐 드렸고, 이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해 드린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 날은 바로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함께 하시고 거기서 제자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요한 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성찬을 마치신 주님은 감람산을 향하여 찬미하며 가셨다고 했습니다. 그 뒤를 제자들이 따라 갔습니다.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달빛을 밟아가며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벽을 따라 나 있는 기드론 시내로 내려가는 비탈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과 감람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조그마한 개천입니다. 저도 가 보았지만, 아주 볼품없는 작은  골짜기입니다. 지금은 개천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개천입니다.

     예수님께서 건너신 기드론 시냇가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더욱이 그 날이 유월절이라는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기드론 시냇가! 그 날은 양을 잡는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서 불과 몇 시간 전에 그 성전 마당에서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자신의 죄와 나라의 죄를 어린양에게 짊어지우고는 제단에서 그 양을 잡아 피를 흘려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수많은 양들이 피를 흘렸을 것입니다.

    성전 뜰에서 양을 잡을 때 흘린 피는 하수구를 통해 곧 바로 기드론 시내로 흘러들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널 때쯤에는  아마 달빛에 검붉은 피가 섞인 물이 흘러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시내를 예수님께서 건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제 불과 몇 시간 후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될 것이고, 그가 흘리신 의로운 피가 짐승의 피를 대신해서 기드론 시내로 흘러 내려 갈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짐승을 가지고 드리던 불완전한 제사를 완전히 끝내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지금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계십니다.

    Ⅰ. 겟세마네에서!

    이제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의 예수님의 심정은 슬프셨고, 심한 고민과 괴로움으로 죽을 지경이 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모든 것이 가능하시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그 잔을 마시는 문제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잔을 요한 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라고 하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쓰디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셔야 할 잔이셨습니다. 지금 그 잔을 놓고 예수님은 씨름하고 계신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왜 보내셨습니까? 십자가에 죽으라고! 그 쓴잔을 마시게 하려고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그 잔을 마시는 것을 괴로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잔을 놓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 잔은 고난의 잔이요, 슬픔의 잔이요, 저주의 잔이기 때문입니다.(애3:19)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이 같은 쓴잔이었습니다. 기도 없이는 마실 수 없는 쓴잔이기에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 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예수님은 이렇게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으면 땀방울에 피가 섞여 나오겠습니까? 얼마나 그 속이 탔으면, 얼마나 진액을 쏟아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으면 그렇게 되었을까요? 우리도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분들을 보지만  이처럼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힘쓰고 애써 기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마치 쑥물과 같이! 아니 쓸개즙과 같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으로서도 그 십자가의 고통을 견딜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 쓴잔을 마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땀이 피가 되도록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장소를 겟세마네라고 부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름틀"이라고 뜻입니다.  아마도 그곳에 감람유를 짜는 기름 집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치 기름 틀 속에 들어 간 올리브 열매가 으스러지면서, 깨어지고 부스러지는 것처럼 예수님은 그 몸이 으깨어지는 것처럼 처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이 이처럼 무서운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필리핀에서는 부활절만 되면 예수님의 고통을 체험해 보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십자가에 못을 박혀 봅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와 똑같은 것에! 예수님께서 받으신 못과 똑같은 규격의 못을 양손과 발에 직접 박아 봅니다. 물론 마취 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공중에 높이 세웁니다. 몸의 하중으로 인해 손이 찢어집니다. 발에 쇳독이 퍼져 갑니다. 그리고 불과 5분도 채 있지 못해 살려 달라고! 내려 달라고 고함을 치며, 울부짖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십자가에 세시간을 계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되겠느냐고 하시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처절하게 부르짖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Ⅱ. 자원해서 마신 쓴잔.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이 쓰디쓴 잔을 누가 억지로 마시게 해 드린 것은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자원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이 잔을 피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육신으로는 피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하는 것이 죄악인줄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당신 앞에 어떤 일이 벌어 질 것을 다 알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피하려면 피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자기를 팔려고 대 제사장과 흥정하고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이 기회를 찾고 있다는 것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 가셨고 거기서 가롯 유다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군병들을 앞세워 올라 왔습니다. 그리고 그 철면피 한 얼굴을 하고서 "랍비여, 안녕하시옵나이까"하면서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친구여, 네 할 일을 해라.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요18:4) 군병들이 말하기를 "예수를 찾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예수님은 선뜻 나서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로라(I am He)"라고 자신이 예수인 것을 밝히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군병들은 그 자리에 엎드려져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초라한 예수 그리스도 속에 계신 영광스런 위엄과 영광 앞에 굴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잔을 피하시기로 원하셨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늘에 있는 12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그  원수들을 쫓아  버리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마26:53) 그러나 그 권세를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십자가의 잔을 마시는 것이기에 묵묵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자원하신 고난의 잔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잡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목숨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준비하고 잡으러 오는 자를 기다리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기꺼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던져서  그들의 손에 잡히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요한은 기록하기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자원해서 내어놓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0: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하셨으니 주님은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버리는 것입니다. 또 요10:18절에서는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라고 하셨으니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저주와 심판의 잔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기꺼이 다 마시신 것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께서 고난의 잔을, 슬픔의 잔을, 저주의 잔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시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Ⅲ. 예수님만 마셔야 하는 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게 되겠다고 하실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극구 만류했습니다. 그리고 죽는 데까지 가고,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는 결단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서 고난의 잔을 자기가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도망을 갔고, 계집종의 말이 두려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양심에 찔림이 있어서 아주 도망가지는 못하고 예수님을 멀찌기라도 따라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였고, 도움을 드리지도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잔은 아무도 대신해서 마실 수 없는 잔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는  흠없고, 점없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중보자는 오직 예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독생자이십니다. 둘도 없는 한분 구원자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의 잔이요 심판의 잔인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 잔은 아무도 나누어 마실 수 없는 잔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가까이 까지 갔으나 그 잔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베드로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잔은 예수님이 마셔야 하는 잔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것을 대신 하실 수 없으신 잔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를 찾고 엘리, 엘리를 외치실 때에도 얼굴을 돌려버리시고 말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마시는  저주의 잔이요, 심판의 잔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받을 형벌과 저주와 진노를 위해 그분이 홀로 이 잔을 마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고 하셨으니 유일한 우리의 구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Ⅳ. 억울한 잔을 묵묵히 드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한밤중에 안나스에게  끌려 가셨습니다. 그는 면직된 대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체포해서 끌고 오게 했습니다. 그렇게 할 권리도  없는 사람이, 그것도 밤중에 어떤 사람을 체포하고 심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불법인 줄 아시는 예수님은 묵비권을 행사하셨습니다. 이어서 안나스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사위 되는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호송했습니다. 예수님이 끌려오신 시각은 아직 새벽녘이었습니다. 가야바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했고 정식 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가 정확하게 주후 30년 4월 5일 보름밤이었습니다. 재판은 아직 날도 밝지 않은 새벽녘에 벌어졌습니다. 유대의 탈무드에 보면 재판을 열어도 반드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낮 시간에 재판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두운 밤에 재판하는 것은 불법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판은 불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소하기 위해 증인을 세웠는데 모두 거짓 증인으로 이것도 불법이었습니다. 그들은 불법 재판을 감행하면서까지 죄를 씌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만 것입니다. 나중에는 유도 심문까지 함으로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냐?"면서 옷을 찢고 법석을 떨면서 사형을 언도했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집단 폭행을 했습니다. 어찌 말로 다 억울한 일들을 형용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불법이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도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죄목을 찾지 못하였고, 명령에 의해 예수를 처형했던 백부장도 그는 의인이었다고 고백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불법을 자행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으나 이사야가 말씀하신 대로 털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과 같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시고 잠잠히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잔을 다 마시셨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벧전2:22-23)

    아마도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구원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억울해도 괜찮다. 네가 복을 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시켜 주시려고 그 쓴 고난의 잔을 다 마시셨습니다. 내 손에 들려진 죽음과 진노의 잔을 빼앗아 자신이 마시고 대신 우리에게 영생의 잔과 축복의 잔을 선물로 예수님께서 주셨습니다.

    얼마나 그 잔이 쓴잔이었으면 "아버지여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하셨을까요? 얼마나 괴로운 잔이면 그 예수님께서 내가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하셨을까요?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죽음의 잔, 고난의 잔, 그 슬픔의 잔을 예수님은 자원해서 홀로 억울해도 마신 것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쓰고 지독한 잔을 마셔 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고민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분이 계시면, 이 시간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주님께서 마신 그 저주의 잔을 결국  여러분이 마셔야 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망합니다. 지금 그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을 모시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는 분들은 나대신 이 고난의 잔! 죽음의 저주의 잔을 마셔 주신 그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여 은혜를 보답하고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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