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자고 쉬라 이제는 그만이다(마가복음 14:32-47)
  • 2013.02.07 22:08:52
  • 「이제는 자고 쉬라 이제는 그만이다」이런 제목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기독인들의 가장 보수적인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다른 여러 제자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평소에 늘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도하기를 즐겨하셨던 제자 3인과 산으로 올라가서 특별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하시러 가시다가 심히 놀라시면서 슬퍼했습니다. 33절에 있는 말씀이지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14:33-34)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왜 이렇게 갑자가 올라가시다가 깜짝 놀라고 이렇게 마음이 슬퍼하셨는지? 얼마나 고민되었던지 '죽게되었노라'고 선생님 치고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하기 좀 어려운데 아주 이때 순간에는 체면이고 뭐고 없고, 그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이 출발하기 조금 전 27절부터에 보면 좀 여유가 있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14:27)

    이런 말씀을 하시고서 기도하러 가시다가 깜짝 놀라게 된 것입니다. 이 장면을 조금 설명을 드려본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라 지금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예수님이 만백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그저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너희들 다 흩어질 것이다.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어도 3일 후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나서 먼저 갈릴리로 가라니 너희가 빨리 와야 갈릴리에서 나를 만날 것이다." 하면서 이때만 하더라도 상당히 여유가 좀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을 의지해서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으니까요. 이런 말씀을 하실 때까지는 여유가 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고서 이런 일이 이번에 당할 것인지, 내년에 당할 것인지, 한달 후에 당할 것인지는, 그 때와 기한에 관하여는 주님께서 잘 모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져야 되겠는데 이것이 언젠가는 내게 닥칠 것이다' 하고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려 가시다가 심히 놀라시며 아주 당황해 하시면서 슬퍼하셨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부터 알았는데 왜 당황했을까' 아마 그런 생각을 하시겠지만 한 예를 들어서 제가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군대 갔다오신 분들, 또 앞으로 갈 분들 있습니다. 남자 분들이요. 군대를 가시게 되는데, 나이가 이제 20세가 넘어서게 되면 영장이 나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군에 입대하라는 명령서가 올 것으로 알고, 이제 아들 가진 집안에서는 아이고 쑥쑥 자라서 좋기는 좋지만 저놈 군대 보낼 것을 생각하니 고민이다 하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딱 어느 순간에 우체부가 와서 명령서를 하나 던져주는데 펴 보니까 '내일 모래 입대 논산 훈련소' '창원훈련소' '진해훈련소 입대'하고 딱 나오면, 그만 갈줄 알고 있었지만 반드시 대한민국 남아로 태어나서 이 나이 때쯤 되면 갈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간다'라고 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지금 이 예는 여성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저처럼 다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래서 으례이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바로 '그때가 내일이다. 오늘이다.' 이렇게 딱 주어졌을 때 충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바로 이와같은 심정이었지요. 그래서 항상 "이때가 예루살렘 이스라엘 회복할 때입니까?" 라고 하였을 때 "글쎄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실 때에는 하시지만 그 때와 기한은 내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으니 나의 알바 아니요, 너희는 그저 그렇게 될 줄만 믿고 기다려라." 이렇게 말씀하셨던 주님의 그 심정과 주님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언제쯤 그런 일이 올 것인가 생각하던 주님께서 막상 지금 돌아가실 때가 이제 다 된 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제자 세 사람 데리고 기도하려 올라갈 때에는 예수님의 표현에 뭔가 그 날짜가 가까워 왔고, 분위기가 좀 두렵다기 보다도 심령이 민망해졌다고 그랬지요. 민망해지고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슬픈 마음이 있고 하니까 서로 기도로 좀 도와주기를 바라고 이래서 올라갔습니다. 뭔가 자기의 때가 가까이 가까이 온 줄을 이미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올라가는데 이번 기도하고 내려와서 '그저 내년쯤 걸릴 것인가' 그렇게 생각했더니 '바로 내일이다' 이런 뭔가 느낌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히 놀라고 아주 슬퍼하면서 "내가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심각해졌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올라가셔서 "너희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심히 고민에 빠졌는데 함께 기도하자."" 해서 기도하러 들어가십니다.

    그래서 36절에 주님의 기도가 나오는데 아주 절박한 기도이지요.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이제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변경도 할 수도 있고 연장도 할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니까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를 '쓴잔의 고배를 마신다' 이런 말들 때문에 "고통을 면케하여 주소서. 이 십자가의 고난을 면케하여 주소서." 이렇게 이 잔에 대해서 쓴잔으로만 늘 생각해서 '예수님은 그 쓴잔을 피하려는데 관심을 많이 두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물론 그러한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한 이 잔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한 것, 이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한 것은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십자가 지지 않게 해 주소서' 이런 뜻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에서 분명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35절을 보실까요?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마14:35-36)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의 내용은 무엇을 구한겁니까? "이때가 지나가게 해 주소서." 이 고난의 때, 슬퍼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이 땅에 오실 때 이미 알고 오셨지만 기록된 말씀대로 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지금이다'라고 왔을 때 굉장히 충격 받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을 어떻게 우리가 이해해야 됩니까? 주님은 신이시면서 사람입니다. 인성과 신성을 겸하여 오셨기 때문에 참 사람의 모습으로 지금 충격을 받으시고 당황해 하시면서 슬퍼하셨다 라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잔이 지나가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고통받으시는 그 고통도 고통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때가 꼭 오늘이어야 됩니까? 내일이어야 됩니까? 좀 지나가게 해 주소서."라는 것을 기도하기 위해서 한 기도의 내용이 "이 잔이 지나가게 해 주소서." 그랬다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지요. 성경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사형, 이 '사형언도' 얘기를 해서 죄송한데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이 감옥에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고를 받았으니 돌일킬 수 없어 언젠가는 죽을 줄 압니다. 죽을 줄 압니다. 그런데 이 사형선고 받은 사람을 이제 그 간수가 와서 '아무게 몇 번 나오시오' 이렇게 할 때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 철렁'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가보면 예방 주사 맞도록 나오라는 때도 있고, 면회를 왔으니 나오라는 때도 있고 이렇게 하는데 가다가 보면 이쪽으로 가느냐, 저쪽으로 가느냐에 따라서 그냥 '하루 더 살았구나'

    그래서 선고를 받아서 당연히 죽을 사람이지만 하루라도 더 살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도를 따라오다가 왼편으로 가면 면회를 하거나 무슨 다른 상담이 있고, 오른편으로 확 꺾어 버리면 그냥 집행장으로 가는 것이지요. 가다가 오른편으로 착 꺾어 돌릴 때 죽을 것은 틀림없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요. 또 큰 죄를 지어서 누가 계산해도, 아무리 변호사를 사도 '너는 사형밖에 다른 가벼운 벌이 없다' 해서 사형언도 받을 줄 분명히 알고 갔지만 '사형을 선고하라' 하면 주저앉게되는 이런 감정 '주님의 그러한 모습을 여기에서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주 극한 고난이 바로 당신 앞에 다가선 줄을 알고서 참 하나님이시면서, 신이시면서,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된 형편에서 심각한 기도를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기도를 합니다. 제자들에게도 부탁을 합니다. "깨어서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마음이 슬퍼지는구나. 내가 심히 당황해지는구나. 때가 막상 왔다고 하니 어렵구나. 함께 깨어있어 기도하세" 하고서 기도하러 올라가서 주님께서 "아바 아버지여!" 보통 때 "아버지여." 이렇게 말씀 많이 했는데 얼마나 심각했던지 "아바 아버지여!" 좀 들어 주실까 싶어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소서…."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는데, 올라갈 때 이제 죽으실 것이라는 어떤 그때를 알게된 그런 계시가 온 것 말고는 이 기도에 아무 응답이 없어서 '혹시 베드로에게 답이 왔나. 야고보에게 왔나' 싶어서 내려 와봅니다. '때를 넘겨 주신다든가, 음성을 들었는가?' 이런 마음으로 와 보니 그냥 피곤해서 자고 있습니다. "제발 좀 깨어서 기도하라. 시험 들겠다. 우리 육신이 약해서 시험 들겠다." 하면서 또 가서 동일한 말씀으로 "아바 아버지여,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여 주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두 번을 기도해도 똑같이 세 번을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아무 응답이 없으시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슨 답이나 왔나' 싶어서 '계시나 왔나' 싶어서 확인을 하러 와 보니 제자들이 피곤해서 그냥 눈을 내리 깔고서 아주 어쩔 줄 모르고 하고 있습니다.

    또 제자들을 깨우니 제자들이 미안해서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아주 당황해 하는 그런 모습을 보시던 주님께서 "이제는 자고 쉬라. 이제는 그만이다. 이제는 그만이다." 참 처절한 말씀을 합니다.

    더 이상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세 번 기도해 보셨으나 아무 대답이 없고, 기도의 응원군을 데리고 갔으나 그들에게도 아무 대답이 없고, 그들의 기도에 힘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도도 그냥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에 힘을 얻으면 기도가 절로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급해서 축복을 해 주시거나 응답을 주시거나 혹은 복을 주시려고 할 때 기도하게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순간에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졸도록 기도의 힘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주시지 아니한 것을 보니 참 외로워졌지 않겠습니까? 아무 응답도 없으시니 "이제는 끝이다. 그만이다 기도할 것 없다. 자고 쉬라." 이렇게 말씀하고서 제자들과 함께 내려오시면서 "때가 가까웠느니라. 돌이킬 수 없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으로서는 그때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 잔을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해 보았더니 주님의 뜻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달랐습니다. 주님의 원하는 때는 오늘 내일이 아니고, 내년쯤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이번에 닥칠 이 어려움이 지나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다른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변경할 뜻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서는 더 이상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맡겨버립니다. 자기의 운명을 하나님에게 다 맡겨버립니다. 왜? "내 뜻대로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될 것이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 유월절에 죽기를 원하시고 때를 정하셨으니 하나님이 정한 때를 하나님이 바꾸지 아니하시니 나는 그냥 따라야지. 그냥 따라야지."

    그래서 자기의 목숨도, 자기의 운명도, 자기의 다시 살아날 것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권한에 맡겨 버립니다. 기도도 "이제는 그 일로 하지 말라"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합니다. 이것을 자포자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절대 권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나의 소원은 이렇지만 내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이 다르다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이것이 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비슷한 일이 있었지요. 사람 가운데 다윗이란 사람이 자기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자기 처로 삼았습니다. 나단 선지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책망합니다. "네가 이같은 일을 하였으니 그 여자에게서 나는 아이가 온전치 못할 것이고, 하나님이 칠 것이라" 그런 예언을 했습니다. 책망을 했습니다.

    이 밧세바에게서 아이가 났는데 솔로몬 형이지요. 솔로몬보다 먼저 아이가 났는데, 잘 자라납니다. 얼마나 귀엽게 자라나는지, 다윗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참 웬만큼 좋았으면 그렇게 충성스러운 신하에게서 여자 빼앗아 오겠습니까? 그 무례하게도 그 여인을 빼앗아 그 여인에게서 아들이 났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자라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칩니다. 시름, 시름 아프기 시작하고, 열이 나면서 이제는 죽어갑니다. 이때 다윗이 그저 굵은 배옷을 입고 금식을 하면서, 재에 앉아서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신하들이 와서 "왕이여, 왕이 이렇게 하시면 아이보다 왕이 먼저 죽겠습니다." 아무 말 듣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내 아이를 살려 주시옵소서. 내 아이를 살려주시옵소서." 해서 머리를 땅바닥에 쳐 박고 진심으로 그저 아무 것도 먹지 않고서 구하고 있습니다.

    신하가 아이를 보니 아이가 점점 죽어들어 갑니다. 숨이 그냥 넘어가 버렸습니다. 신하들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살아있을 때에도 저렇게 왕이 애를 쓰면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기도를 했는데, 지금 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면 임금은 그냥 죽을 것 같다. 그러니 누가 이 소식을 전해주랴?" 그래서 모두가 걱정할 만큼 이 다윗이 그렇게 열심히,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그러나 소식을 아니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하가 가서 "왕이여, 아이가… 왕자님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때 이 신하들은 생각하기를 이 임금이 그냥 죽을 줄 알았습니다. 기절하거나 죽을 줄 알고, 이제는 음식을 먹지 않고 그냥 야단법석이 날줄 알았습니다. 임금이 고개를 들고 "야, 뭐라고 그랬느냐. 살아났느냐?" "아니올시다." "그러면 죽었느냐?" "예." "확실히 죽었느냐?" "예." "그러냐. 빨리 밥 가져오너라. 그리고 세수할 물 떠오너라. 머리에 기름을 바를테다. 기름을 가져오너라.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해서 다 벗어 던지고 새 옷으로 왕복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으면서 머리 기름 바르고 왕좌에 올라가서 "여봐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신하들이 생각하기를 '왕이 실성했다. 왕이 아들 하나 잃고서 저렇게 약간 돌았다' 이렇게 생각할 만큼 되었습니다만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하다." 라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느날 자기의 죄를 보시고 이 아이를 치시겠다고 선지자를 통해, 나단을 통해 말씀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것이 자기에게로 왔습니다. 고민하던 중에 그 일이 자기 아들에게 오니 "혹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가능하시오매 내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진심으로 매달리면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니, 인자가 크시니 마음을 돌이키사 하나님이 내 아이를 살려 주실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전에 시대에 보면 죽을 자도 회개하면 살려주신 적이 있었으니 하나님께서 혹시 살려주지 않겠는가"해서 진심을 다해서 기도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소식이 오니까 "아하, 하나님이 이 아이는 한번 치시기로 당신의 선지자를 통해서, 종을 통해서, 나단을 통해서 말씀하신 이 말씀을 굽히지 않으시려는구나. 변경치 아니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기어이 데리고 가셨구나. 그렇다면 내가 더 이상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고 싶어서 하신 일을 두고서 "안됩니다. 죽은지 나흘 만에도 사흘 만에도 살리시는 능력이 있사오니 살려 주시옵소서." 하고 더 매달리면 좋을 마음이나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리 결정 되셨다면 하나님 괴롭혀 드리지 않아야지, 하나님 편하게 해 드려야지. 내가 그런 일없었던 것처럼 해야지." 바로 그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이 실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해 드렸던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내게 대하여 이렇게 해 주실까 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하나님께서 '아니' 했을 때에는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나님 영광 받으시옵소서." 바로 이 마음이나 예수님의 마음이 같았던 것입니다.

    알고는 이 땅에 왔지만, 만백성을 위하여 주님을 희생의 재물로 버린다는 아버지의 뜻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것이 이 시간인 줄을 몰랐습니다. '웬만하면 이때가 오늘이 아니고, 1달 후 1년 후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 고통 때문에 마음이 고민하게 되어서 기도를 해 보았으나 제자에게도 대답이 없고 당신에게도 아무 대답이 없으시니 알아차렸습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조금 전에 내게 때를 알려 주셨는데 하나님이 때를 변경하시기 싫으시구나'하니까 그저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이제는 자고 쉬라. 이제는 그만이다. 그만이다."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이면 움직일 수 없으면 더 이상 내 아버지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리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시옵소서."

    예수님께서 내려오십니다. 가룟 유다가 옵니다. 입을 맞춥니다. 병정들이 와서 잡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뽑습니다. "예수님 뭐 하십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12영도 더 되는 천사들를 부르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네. 내가 12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서 여기에 다가오는 병정들을 날려 버릴 수도 있으며, 십자가를 뿌리채 뽑을 수도 있도다. 그러나 내 원대로 될 것이 아니라, 내가 힘있다고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원대로 되어야지." 그렇게 말씀을 하는데도 베드로가 칼을 뽑아서 그 제사장의 종을 칩니다. 목이 댕강 날라가지 아니하고 귀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귀를 붙여주시고서 베드로를 향하여 뭐라고 했습니까? "사단은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어찌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느냐."그랬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날 지금 잡혀가기를 원하시는 것 아니냐. 내가 지금 묶이기를 원하시는 것 아니냐. 베드로야, 네게 칼이 있느냐. 내게는 능력이 있어. 천사를 부를 능력이 있고, 바람을 움직일 능력이 있고, 이 나라를 뒤엎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러나 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냐. 지금 붙들리는 것 아닌가? 그런데 네가 칼을 들어. 하나님께서는 날 붙잡히기를 원하셔서 이때를 주셨는데 네가 그것을 거역하겠다고 칼을 들다니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버텨 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단이라는 겁니다. "내가 힘이 없어서 이 병정 몇 사람에게 붙들려서 끌려가겠느냐. 나는 얼마든지 힘이 있도다.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내 붙잡히기를 원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를 원하시니 나는 힘이 있어도 쓰지 않고, 붙들려서 그냥 끌려가겠노라.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말없이 깎이고 있는 양처럼 가만히 있어 드려서 하나님 한번 마음 잡수신 것, 그대로 되기를 원하는데 네가 칼을 뽑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거역하고 네 뜻대로 되기를 원하느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보시던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를 기뻐 하셨겠습니까? B면

    귀한 모습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받아들이는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때가 이른 줄 알고 돌아서서 내려오는데 이제 병정들이 와서 잡습니다. 가룟 유다는 입을 맞춥니다. 잡히게 됩니다. 끌려갑니다. 그래서 십자가에까지 가시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무 때라도 잡히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7장 25절-30절 사이에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집권자들이 있는데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나타남을 보고 "저 사람은 나사렛 예수다. 저 사람을 죽여야 한다. 찾는 사람이 저 사람입니다" 해도 아무도 예수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잡아죽이려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나사렛 예수 나타났습니다. 저 사람입니다." 했는데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무서워서입니까? "때가 아니더라" 그랬습니다. 때가 아니면 사람이 잡으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4장 29절-30절 사이에 보면 고향에 가서 나사렛 동네 사람들을 향하여 강하게 책망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듣고서 화가 나서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낭떠러지로 갔습니다. 거기에 가서 밀어버리면 그저 수십층 되는 높이니까 떨어지면 그냥 죽습니다. 밀어버리려고 끌고 가서 밀려고 하는데 그들의 손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지나쳐 가시더라" 그랬습니다.

    거기에도 분명히 말씀하기를 "때가 아니더라."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시면 반드시 하나님은 뜻대로 이루십니다. 그것을 사람이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과 조건은 내가 죽게 되어 있어도 하나님께서 죽을 때로 정하지 않았으면 살아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리라. 언제는 내가 무엇 바라던 것이 되리라' 아니요. 내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 주시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하나님 마음 편하도록 그일 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괴롭혀 드리지 않았습니다. 천사를 부를 수 있어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이 에수님을 죽이려고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다 죽이는 이런 일을 저질렀지만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을 죽게 하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헤롯의 병정들도, 그 칼도 모든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죽는 그런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아무 일 없었던 것을 여러분 기억하십시요.

    사랑하는 여러분, 내 뜻대로 무엇을 할 것 같아도, 내 능력이 있어서 무엇을 꾸밀 것 같아도 하나님의 때가 아니면 어렵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가능한때로 세우셨다면 가능하게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노력해서 전쟁을 만들기도 하고, 사람들이 노력해서 전쟁을 안 만들기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께서 섭리하고 계신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때가 이른 줄 알고 "이제는 자고 쉬라 이제는 그만이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기 몸에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성도들 보기에도 민망하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주의 종으로서 이래서야 되겠는가? 무슨 죄가 해결되지 않았을까'해서 하나님 앞에 큰 기도를 세 번했습니다. 동일한 기도를 했습니다.

    이 바울은 믿습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 한 번을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들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 번을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뜻은 이 가시가 내 몸에 있기를 원하시는구나. 이것이 은혜라고 하는구나." 해서 그 기도를 더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이 가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아프다가 보면 한번 기도하다가 내년에도 기도하고, 그 후년에도 기도할 수 있는데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 몸에 있기를 바라신 것이니 내가 아프리라." 왜? "하나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서 내가 이 고통을 짊어지고 있으리라." 이것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우리의 목숨도, 우리의 사업도, 우리의 자녀도, 교회 문제도, 건축도, 주의 종들의 오고가는 거취도, 사람의 마음으로 자기의 어떤 기분과 환경을 따라 꾸며 옮기려 하지 마시고 주님의 때가 어디인지를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사업에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 문제를 가지고 진실하게 기도해 보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해 보십시오. 혹시 발견되지 아니했다 하더라도, 간절히 기도했으나 이루어지지 않거든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여, 응답하지 아니한 것을 응답으로 생각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되시옵소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시옵소서." 우리가 직분을 맡는 것도 그러하고, 직분을 맡았다가 그만 두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되는 것입니다. 우연한 것이 결코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하기를 심히 싫어했습니다. 말을 못한다고 사양하고, 나이가 늙었다고 사양하고, 그 바로는 나와 원수이니 내가 그곳에 갈수 없다고 사양했으나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네가 가야한다."라고 했을 때 그는 애굽에 들어가서 내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언정 행복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겠다." 해서 죽을 때까지 쓰임 받아서 자기 집에서 한번 잠자지 못하고 저 산에서 자기의 인생을 마감하면서까지 던져버렸습니다. 그는 어떤 자세입니까?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었습니다.

    예레미야도 아무리 하기 싫었지만 사명이 왔을 때, 말씀이 왔을 때 "슬프도소이다. 나는 덩치만 크고 나이만 먹었지 실제로 아이와 같사온데 이 사명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아니다. 네가 맡아야 한다." 라고 했을 때 그는 일생에 눈물로서 사역을 감당하는 종으로서 나갔던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 중에 바울은 또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서 선교하기를 원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당당하게 멋지게 굉장한 인기를 얻으면서, 주의 일을 하면서 자기 민족을 구원해 보겠다는 그 결심이 불일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막으시니 돌아서서 이방인들에게만 돌아다녀서 명예도 잃고, 어려움도 당하면서 이방인의 지역에 가서 순교까지 하는 것을 슬프게 생각하지 않고 따라버렸으니, 주께서 결심하신 것을 깨닫게 되면, 주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서 내 인생이 완전히 뒤집혀져도 주의 영광만을 위하여 주님을 괴롭히지 않는 바로 아들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죽어 가는 자식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다가 하나님께서 기어이 그 아이를 말씀하신 대로 치시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고서 죽은 것을 알고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 후에 하나님을 만나 뵈어도 하나님께서 그 뒷날 오셨어도 '하나님, 세상에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데리고 가시다니…' 그것은 입에도 담지 않았습니다. 인상도 쓰지 않았습니다. 얼굴도 슬프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로 인하여 나 때문에 근심하실까봐…." 이것이 바로 참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 권리를 인정해 드리는 백성의 모습이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이리 이리 하도록 원하시는데, 나는 나대로 내 뜻대로 저리 저리 해 가는 일이 있었다면 이제 그만하시고, 저와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죽은 것 같으나 살아났습니다. 다윗이 아들을 잃은 것 같으나 유명한 솔로몬을 얻었으며, 예수님은 참으로 마음 슬프고 당황하여 고민에 빠졌었지만 그를 오늘날까지 구세주로 세워 놓았습니다. 하늘의 보좌에 앉게하는 축복이 있었으니 하나님 뜻대로 이면 영생이고, 사람의 뜻 대로이면 멸망인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베드로가 가졌던 칼이 있을지라도, 예수님에게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부를 수 있는 능력과 권세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아니라시면 아무 힘을 쓰지 않고, 기도 마저 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던 아들의 모습이 다윗의 모습이요. 바울의 모습이요. 모세의 모습이었은즉 우리도 이 세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되옵소서! 뜻이 땅에서 이룬 것같이 하늘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뜻이 하늘에 이룬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옵소서. 내 인생의 명예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시옵소서. 내 생애 부요가 문제가 아니라 가난이 있어도 좋사오니 내가 가난에 있는 것이 주의 뜻이면 나를 가난에 두시고 주님 만족하시옵소서. 나를 부요한데 두시기 원하시오면 주여, 내가 부족하여도 부요케하여 주시옵시사 내가 나로서 만족하지 말고 나로서 하나님이 만족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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