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령한 만찬 (막14:22-24)
  • 조회 수: 86, 2013.02.07 22:03:26
  •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지켰던 통상적인 절기일에 유월절 식사를 하셨는데 그 날은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12절)로 이 해의 유월절은 예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예고해 오시던 주님의 일정 속에는 이 유월절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지키는 유월절(참조, 막 14:25)이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이기도 했습니다.
    애굽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기념하는  유월절을 이제 자신의 몸으로 유월절 양을 대신하고 그 흘리는 피로써 모든 인류의 속죄와 자유를 약속하는 영원한 절기로 승화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유월절은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실 '나의 때'(참조, 마 26:18) 속에 들어 있던 마지막 일정중의 하나였습니다.
     양을 잡아 지키는 유월절은 이제 구약 율법의 모든 제사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 승화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 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25 절). 유월절은 이 말씀으로써 성만찬으로 승화되고 유월절에 먹던 떡과 포도주, 그리고 양의 고기 등은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제물로 바쳐지는 예수의 몸과 그 흘리신 피로써 승화되어 신령한 만찬이 되었고 그것은 예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신 다음에 '성만찬'을 새롭게 제정하심으로써 상징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만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신령한 만찬은 목과 피를 예표하는 떡과 잔을 축복과 사례하심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주님은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사례하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림으로 자신의 수난으로 인해 유월절 잔치가 영원한 하나님의 구속의 잔치로 완성되어짐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킨 것입니다.
    유월절이 시작되는 명절의 저녁 식탁은 구운 어린 양고기를 떡과 함께 먹으면서 절정에 이릅니다. 수난의 대가 곧 닥쳐올 것을 아시는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교병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고 '내 몸과 피를 받으라'고 하시면서 드디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찢기실 자신의 몸을 인생의 영생 양식으로 삼을 것을 교훈하고 계십니다.

    떡을 떼어 주시며 먹으라고 하셨습니다(22절).
      먹는 것은 인생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인생은 모태로부터 무덤까지 먹으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부친의 몸을 받고 모친의 모태를 먹고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과 형제의 관심과 친구의 우정과 배우자의 애정을 먹고삽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보존을 위해 끊임없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음식은 우리의 건강을 유지시켜 주고 경건한 생명을 허락하여 줍니다. 음식이 우리의 육체를 지탱시켜 주는 중요한 요인이라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려 주는 음식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주님은 인생의 영원한 양식으로 오셨습니다.
     서로가 섭취하기를 원하여 다툼을 벌이는 이 세상에 주님은 영생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양식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섭취하는 사람은 끝없는 탐욕의 굶주림이 그치게 되고 영혼의 포만감을 얻어 남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인생의 떡으로 오신 것을 증거합니다.
    주님은 떡집이라는 이름이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주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이 증거하기를 말구유에 누운 아기가 바로 구세주라고 했는데(참조, 눅 2:12) 말구유는 말먹이 그릇이요, 갓난아기가 그 안에 담겨 있으니, '그릇에 담긴 음식'으로 구세주가 오셨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도 자기를 가리켜 하늘의 만나요, 하늘에서 내려 준 '생명의 떡'(참조, 요 6:26-35)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주님은 희생하는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의 이기주의와는 달리 주님은 온전히 희생주의적 인생관과 삶의 내용을 가지셨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로 다투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 20:28)고 하시며, 자기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 남을 섬기는 희생적인 삶을 살라고 교훈해 주셨습니다.

     잔을 주시며 마시라고 하셨습니다(23절).
     떡을 주신 후 주님은 또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신 후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4 절)고 하셨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우리가 성찬 예식을 할 때 별도로 나눠 받지만, 몸과 피가 하나인 것처럼, 이 두 가지 모두 주님의 희생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희생의 몸이 있어야 피가 있게 되고, 또한 피 흘림이 있어야 희생의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첫 언약은 구약 시대 때 동물의 피와 몸을 가지고 유한한 인간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림으로 죄 사함, 곧 구속을 얻었지만 지금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의 몸과 피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참조, 히 9:10-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주님의 속죄의 피 흘림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를 사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인정하고 주님의 구속 언약을 신뢰하며 곧, 그것이 새 언약의 피를 마시는 것이 됩니다.
      포도의 즙으로 만든 포도주를 가리켜 새 언약의 피라고 불렀습니다.
     피에 대하여 자주 언급되었는데 그의 귀한 피는 우리의 구속의 대가로 치른 것입니다.  그 피는 언약의 피로 불려지는데 그 까닭은 은혜의 약속이 하나의 언약이 되었으며 유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피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즉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흘려지는 것입니다(히 2:10).  그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바와 같이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어린 양의 피의 그 옷을 씻어 희게 하게'(계 7:9-14)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의 약속은 아직도 샘물처럼 넘쳐 흐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는 이 말씀은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보혈을 흘리셨다면 나를 위해선 그의 보혈을 흘리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죄인들 즉 이방인의 죄인들 뿐 아니라 죄인들의 괴수를 위해서까지 보혈을 흘리셨다면 나를 위해서 그 보혈을 흘리신 것임을 바로 믿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신령한 만찬은 떡과 잔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생명적 연합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22-23절)
     이스라엘의 유월절 음식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에 급히 애굽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먹었던 것이었습니다.(출12:1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감격적인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게 하기 위하여 해마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유월절 절기가 고통스러운 샹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받고 자유롭게 되어, 안전하고 자유로운 약속의 땅에서 새롭게 살게 된다는 기쁨을  해마다  되새기는 절기로서 깊이 정착되어 갔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성전과 가정에서 지켰습니다. 이같은 행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긍지를 함양하면서 더욱더 하나의 공동체로서 결속시켜 주는 일에 지대한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그때 유월절 절기를 그대로 재현하는 의미에서 성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함과 동시에 당신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과 하나됨을 다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공동체로써 결속되며 같은 생명으로 연합되는 자리에 있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성찬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와 같이 죄에 대하여 십자가 아래서 죽고, 의에 대하여 주님과 함께 성결과 거룩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악이 주님의 살과 피를 통하여 씻어지고 새롭게 변하여 거룩한 성도의 반열에 담대히 설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을 새 언약으로 다짐하게 되었습니다.(24절)
     예수님께서는 짐승의 피로 세운 옛 언약 곧 유월절 예식을 십자가 대속을 통해 피로 세운 새 언약(24절고전11:25)으로 대치 하셨습니다.

    신령한 만찬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을 기념하며 오는 복을 잊지 않도록 제정되었습니다.
     기념한다는 것은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모두 생각하는 것이 성찬  예식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보통 죽음과는 다른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나와는 중대한 연관이 있는  의미심장한 죽음이기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죽음입니다. 그러면 잊지 말고  기억해야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가 무었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인간의 범죄하였을 때부터 예정되었던(창3:15) 아버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계획입니다.
    주님의 대속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 대속의 계획이 길었던 것은 그만큼 비중있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힘이 없어서 무기력하게 죽으신 죽음이 아님을 기억 해야합니다.
    주님의 죽음이 당시에 시기하는 무리들에 의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막14:21)
    주님의 죽으심은 주님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이셨지만 우리와 다른 점은 아무 허물도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요일3:5)
    예수님의 죽으심은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신 죽음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10:17-18)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세상죄 곧, 나의 죄를 위한 죽으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1:29)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 지는 대속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죽으심은 바로 나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말로 다할수 없는 유익과 축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엡2:16)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정한 죄인의 모습으로는 결코 만나 뵈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인간의 최대의 숙제였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이 교제 회복의 어려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수의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저주와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원수의 관계를 소멸 시켰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화해의 시대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사망에서 새 생명을 얻게되는  유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써 사망을 맞아야 할 우리가  천국의 새 생명을 누릴수 있게 된 것입니다.(마20:28)
    주님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엡1:7)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의지하여 무슨 죄든지 회개하면 용서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과의 화목과  새 생명과  죄 사함의 성결을 축복으로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심을 항상 잊지 말고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성찬예식이 있는 것입니다.

    30년 동안 연극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맡은 안톤 레이지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형적인 미국 여행가들 중에서 모든 카메라 장비를 짊어진 어느 부인이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어 옮기는 자기 남편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보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그 부부가 무대에 접근하여 남편은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지만 그 십자가를 들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십자가를 가지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동안 그 유명한 배우 레인지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 여행가는 그에게“이것은 연극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사용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과 주님과 교회에서도 그와 같습니다. 내가 그러한 일에 아무런 값도 치루지 않는다면, 내가 피와 땀과 수고와 고통을 그 일에 쏟지 않는 다면 나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 내가 그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염두에 두어야 할 희생이며 값입니다. 그 희생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손과 하나님의 손에 먼지와 재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고 하십니다 (슈퍼바이블)

    신령한 만찬을 대할 때마다 인생의 생명의 떡으로 오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우리의 영혼을 채워 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함으로 그 몸을 예표하는 떡과, 피를 상징하는 잔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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