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를 위한 부모의 일(마가복음 15장 21∼23절)
  • 2013.02.07 22:44:05
  •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제가 얼마 전에 책을 정리하다가 제가 쓴 20여년 전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일기장을 보니까 제가 올 봄이 제 목회한지 21년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굳이 더 정확히 말한다면 식목일 날 제가 짐을 싸들고 집에서 교회라는 곳으로 나왔으니 이 앞 식목일이 제가 목회한지 만 21년이 되는 셈이 되었습니다. 21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그 21년, 어지간하면 목회에 이력이 붙을 만도 한데 저는 아직도 목회가 아주 힘들고 어렵고 날마다 이 단에 설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오히려 점점 더해 가는 것 같습니다. 그 21년 동안 저는 목회를 잘해보려고 꽤나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먹은 대로 결코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 마음에는 40이 넘으면서부터 초조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 여기 많이 계셔서 죄송합니다만 나이는 먹어 가는데 하나님 앞에 선 제 인생의 모습이 너무나도 보잘것없고 허물과 실수와 죄악 투성이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나는 이제 별볼일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이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제가 앞으로 큰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일하는 큰 일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구나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초조한 40대를 쭉 보내오다가 저는 요즘 이제 마음 속에 목회를 잘해야 되겠다 크게 목회를 해야되겠다 이런 생각이 점점 사라지고 대신 그것보다도 목회를 바르게 해야되겠구나 어떻게 목회를 하는 것이 바르게 하는 것일까 정말 이 생각에 골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잘하고 크게 하는 일은 실패해도 괜찮은데 그런데 목회를 바르게 하고 내 인생을 실패한다는 것은 내 모든 인생 자체가 헛되고 실패한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목회를 잘하려고 힘썼던 것 애썼던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열심히 정말로 더 힘을 써서 목회를 바르게 하는 일에 힘써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그런 욕심을 품고 요즘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기 이와 같은 생각과 함께 제 인생에 남은 인생살이 욕심 내어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한 것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제게 주신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두 아들에게 바른 아빠,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다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아들들에게만은 부끄럽지 않고 내 자식들에게만은 정말로 존경받는 아빠로 살고싶다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저께 금요일 날 우리 집 둘째, 학교에서 이름은 정경이, 집에서는 오뚝이라고 부르는 오뚝이가 다니는 신흥학교에서 저에게 2시간 동안 아이들에게 좋은 말 좀 해달라고 해서 학교에 갔습니다. 갔는데 제가 속으로 걱정이 되고 또 떨리기도 했습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도 전혀 떨리지 않았는데 오뚝이의 학교인 중학교에 가면서 떨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거기는 내 아들이 다니는 학교이기 때문에 혹시 제가 잘못하면 우리 아들에게 망신 주겠구나 그런 생각이 하나 있었고 또한 그 앞에서 오뚝이가 듣고 있으니까 아빠로서 오뚝이가 듣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제게는 어떤 의미에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분, 잘했겠습니까? 못했겠습니까? 어땠겠습니까? 제 생각에도 못했는데 제가 끝나고 나오면서 오뚝이에게 "아빠, 어땠니?" 하니까 "아빠, 빵점이야." 그랬습니다. 그런데 신흥학교의 교무실에 가니까 강의하기 전이나 강의 끝나고 교무실에 가니까 거기가 미션 스쿨이라 저를 아는 선생님들이 여러분 있었습니다. 그 학교 교장 선생님하고 차를 한잔 마시는데 저희 교회 밤예배를 자주 나오신다고 하시고, 여러 선생님들이 저를 보고 "아, 목사님" 정경이하고 잠깐 같이 서있으니까 "정경이가 목사님 아들입니까? 아, 요놈이 오목사님 아들이었네 오몽근 목사님 아들이었네" 이렇게들 합니다. 또 어떤 여자 선생님 한 분은 저한테 인사를 하다가 "아, 네가 주보 칼럼에 나오는 그 오뚝이구나" 이렇게 이야기도 했습니다. 아마 정광모 집사님께서 주보를 그 학교 교무실에다 갖다 놓으니까 선생님들이 주보를 다 보고 기다리고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저하고 오뚝이하고 가니까 사람들이 "아, 오뚝이 네가 오목사님 아들이냐?"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렇게 싫지 않았습니다. 저는 선생님들이 저를 알아주어서 오뚝이까지 알아준다는 것이 작은 일이지만 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뚝이는 전혀 그것이 좋은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뚝이는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종례하는 시간을 기다려서 같이 가려고 교실에서 저쪽에서 쭈삣쭈삣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 뒤에 친구들과 같이 나오면서 "오뚝이 가자" 그랬더니 퉁명스럽게 얘기하는 말이 "아빠 혼자 가서 차에서 기다려." 고맙다는 말은커녕 저보고 혼자 가서 차에서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속으로 아이들은, 우리 오뚝이는 아빠가 목사라는 것에 부담을 느낄 수도 있겠구나 아니 목사뿐만 아니라 아빠가 자기 주위에서 뭔가로 있다는 것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이들은 부모의 이름 뒤에 불리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몽근 목사의 아들, 오뚝이! 그래서 저는 할 수만 있다면 제 아이들의 이름 뒤에 붙는 누구라는 오몽근이라는 이름을 아이들에게 잘 남겨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저는 그것보다도 더 큰 욕심이 있습니다. 제가 정말 기도하고 바라는 것은 제 아이들이 '누구의 아들'이라고 불려지는 것보다도 이제 좀 시간이 지나면 제가 나중에 '누구누구의 아비'라고 제 이름이 제 자식들의 뒤에 붙어서 불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지금은 제 아이들이 누구의 아들이라고 불려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제가 저 사람은 누구의 아비다라고 우리 아이들의 이름 뒤에 제 이름을 놓고 불려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축복인 것입니다. 만약 제가 죽은 뒤에도 제 아이들을 여러분들께서 "아 저 사람은 오몽근 목사의 아들이야" 정도로만 불려진다면 저나 제 아이들이나 복 받은 것이 못됩니다. 우리 석경이 정경이가 나이가 많이 먹어 가지고도 40, 50이 되어 가지고도 "저 사람은 오몽근 목사의 아들이야" 정도로 불려진다면 아비보다 별로 잘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를 볼 때 "아 저 사람은 오석경이의 아버지래" "저 사람은 오정경이의 아버지래" 이렇게 하면 바로 저나 제 아이들이나 큰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제 자식들이 저보다 훨씬 잘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제 소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식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누구의 아비라고 오석경이의 아비라고 오정경이의 아비라고 불려질 수 있도록 내 자식들이 저보다 훨씬 잘되게 해주십시오" 저뿐만 아니라 우리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그러한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돈이 많아야 가능한 것이 아니고 세상 지위가 높아야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자녀들을 축복해 주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또 우리의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누구의 자녀라는 것은 별 것 없을지라도 그리고 또 그 희망은 점점 우리들에게 꺼져갈지라도 우리 부모들이 누구의 아비니 누구의 어미니 하는 소망은 얼마든지 앞으로 가능성이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도 훨씬 중요하고 지금 높은 어떤 지위를 얻는 것보다 중요하며 우리가 건강하고 오래 사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은 돈은 벌었으나 높은 지위는 얻었으나 자식들에게 존경이나 사랑을 받지 못한 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높은 지위를 얻고 아무리 세상 것들을 다 누려봤을지라도 아무리 오래 살았을지라도 자식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 인생은 실패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누구의 아비란 이름을 얻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를 사랑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자식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바로 이와 같이 복된 삶을 누렸던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구레네 시몬입니다. 여러분 이 구레네 시몬을 아십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쓰러지셔서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오르지 못하신 예수님을 보고 로마의 군인들이 구경꾼들 중에 차출해 가지고 억지로 십자가를 메고 간 사람이 바로 이 구레네 시몬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그 구레네 시몬을 소개하면서 그 앞에 바로 누구의 아비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쓰지 아니하고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말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여기서 알렉산더와 루포를 모르는 분들이 상당히 계실 것입니다만은 초대교회에서는 그냥 아무런 설명 없이 '알렉산더' '루포' 이렇게 이름만 대면 누구든지 다 아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마가복음의 기자인 마가는 아주 글을 잘 쓴 사람입니다. 그 마가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알렉산더 루포 이렇게 쓴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알렉산더와 루포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인물이라면 그거다 반드시 주석을 붙여서 '알렉산더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루포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교회 시절에 1세기에 그냥 알렉산더 그냥 루포 이렇게 이름만 들어도 누구든지 이름을 아는 아주 저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냥 알렉산더 루포 이렇게 쓴 것입니다. 더구나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쓴 성경입니다. 그러고 보면 다 주석가들도-저는 주석을 찾아봤는데- 이 알렉산더와 루포는 로마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알렉산더하면 누구다' '루포하면 누구다'하고 아주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명한 사람은 명함이 필요 없습니다. 이력서가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누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명함 한 장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력서를 내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아직 명함을 들고다니면 유명하지 않다는 것이고 이력서를 들고다니면 아직 유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알렉산더와 루포는 적어도 당시 초대교회에서나 1세기 로마 세계에서 이력서나 명함이 필요 없이 사람이 알렉산더나 루포하면 다 알만한 이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레네 시몬하면 잘 모르니까 여기 이 마가는 구레네 시몬이 누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유명한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를 들어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바울은 루포에게 많은 은혜를 입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알렉산더와 루포는 1세기에 로마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저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제가 앞에 말한 복을 그의 아비인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받았던 것입니다. 바로 저도 다음에 '오석경과 오정경의 아비' 이렇게 불려지길 저도 소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 자식들이 저보다 유명하다는 것이고 제 자식들이 저보다 잘 살았다는 것이고 제 자식들이 저보다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것이 진정한 저의 소원이고 그것이 큰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어떻게 생겼는가? 이런 자식들이 어떻게 나왔는가? 저는 오늘 우리 부모들이 알렉산더와 루포와 같은 자식들을 기르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 세 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이 구레네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이 쓰러지신 곳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수님의 남은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 마지막까지 올라갔습니다. 물론 이것은 자원해서 구레네 시몬이 진 것이 아니라 억지로 마지못해서 억지로 이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러나 억지지만 주님이 져야될 십자가를 그가 졌기 때문에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편안하게 안락하게 고생 없이 적당하게 살려고 합니다. 십자가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주님이 말했습니다. '나를 따라오려면 나를 믿으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그것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도 십자가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십자가 속에 있는 능력과 축복을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합니다. 십자가를 안 지려고 합니다. 편하게 안락하게 마음 고생 없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적당히 예수 믿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실은 그것은 예수 믿는 맛도 모르는 것이고 예수 믿는 진정한 축복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어떤 사람을 축복하시는지 아십니까?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고 축복은 주님이 내게 주신 내 인생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게 오는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항상 외쳤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가 없으면 축복도 없다' 오늘 우리들은 다 십자가 없이 축복만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만약에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자원해서 십자가를 졌으면 어떻게 됐을까?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그 생각을 했습니다. 억지로 져도 이렇게 축복을 많이 주셨는데 만약에 그가 자원해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여러분, 그는 더 아주 놀랍고 큰 축복을 받아서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초대교회 1세기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알렉산더! 루포! 하면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아주 엄청나게 유명한 축복을 받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억지로 져도 하나님이 복주시지만 자원해서 지면 하나님께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들 중에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있는 분이 있고 심지어 억지로 예수 믿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그 십자가 놓아버리고 싶은데 놓지 못하고 마지못해 끌려 살고 있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마저도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황폐해지고 우리는 버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억지로 예수를 믿었던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큰 축복의 씨앗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새해가 되면 힘든 것이 있습니다. 마음 고생을 한 차례씩 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우리 교회 성도 분들이 일할 수 있고 봉사할 수 있는 담당할 수 있는 포지션을 세우는 일입니다. 구역장 세우고 위원장 세우고 여러 가지를 세웁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대부분 안 하려고 합니다.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자격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내가 자격이 없어도 주님께서 하라고 하니까 그리고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하도록 할 것입니다. 특별히 구역장 하면 짐이 무겁습니다. 구역에 협조 안 해주고 구역예배 드릴 때 어떨 때 보면 구역장 인도자 혼자 또는 둘이 드리는 그 팍팍함이란 것은 말할 수없이 힘듭니다. 사람들이 구역장이나 인도자는 하루종일 일을 놓고 구역 예배 드리려고 준비하는데 어떤 분들은 자기의 조그만 일 즉 아이를 데리러 간다 아이와 같이 어디 간다 심지어는 시장 가야된다고 구역예배를 외면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또 일년에 한차례씩 다가오는 식사 당번은 돈도 들어가고 하루종일 수고해야 되고 힘써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역장이나 인도자라는 이 멍에를 매고 이 십자가 맨다는 것은 쉽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안 하려고 합니다. 전에 어떤 분은 저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전 인도자 못하겠습니다" "아니 왜요?" "저의 구역에 똑똑한 집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제가 설교만 하고 무슨 일인가만 하면 꼬치꼬치 단어까지 틀린 것 찾아 가지고 이것이 어떠냐고 이것도 모르냐고 따지고 물어서 그 사람 앞에만 가면 오그라들어 가지고 못하겠습니다" 그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힘들고 그것이 우리에게 괴로운 것이지만 그것 끝까지 매고 가는 사람은 축복인 것입니다. 힘드니까 십자가입니다. 부끄러우니까 십자가입니다. 괴로우니까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나고 재미있으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님 때문에 좁은 길을 걸으며 주님 때문에 사랑하고 주님 때문에 참고 주님 때문에 용서하고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땀 흘리는 것은 그것이 십자가인데 그것을 잘 감당하는 사람은 주님은 여러분과 자녀들에게 복을 주셔서 구레네 시몬처럼 누구의 아비다 하는 축복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이런 귀한 복을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 고송자 집사님 이야기를 한번 하고 싶습니다. 고송자 집사님은 바울이 '너희는 나의 자랑이라' 그렇게 성도들에게 이야기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저의 목회의 자랑이고 기쁨입니다. 교회 생활 전혀 모르다가 우리 교회 막 개척하던 때에 처음으로 초신자로 아무 것도 모르는 초신자로 우리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고집사님 때로 보면 지금 이 정도에 나오셨을 거예요? 4월 달에나? 제가 우진 아파트 405호에 살 때 이 선생님하고 같이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 하기 전부터 남편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해서 남편이 십자가였습니다. 남편을 십자가로 지고 얼마나 많이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이 애가 탔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이 마음 졸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보니 너무나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 살아 계실 때 말입니다.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 하시다가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이제 어떻겠습니까? 가난과 고독! 두 아들 데리고 사시면서 가난과 고독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가 또 엄청납니다. 그러나 우리 고집사님 보면 아무 말 없이, 고집사님 말씀 한마디하시는 것 봤습니까? 말없이 그 남편이 그렇게, 정말로 제가 봐도 도망가버리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남편에 대해서 한 마디의 불평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지금은 가난과 고독 속에 살아도 힘들다 괴롭다 말 한마디 아니하고 신앙 생활 하십니다. 그런데 고집사님 그런 줄 알면서도 저에게는 믿는 사람, 저하고 가까운 사람한테는 무관심한 못된 버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번 살펴보지도 못하고 전화 한번 못하고 고집사님한테 늘 마음으로는 죄송한데 그냥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지금까지 비춰본 적도 없습니다. 한번도 다른 교회 가겠다고 이렇게 해본 적도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고집사님에게는 이 무심하고 못난 목사도 어떤 의미에서 섭섭한 십자가인지도 모릅니다. 저렇게 고독하고 저렇게 힘든데 제가 이렇게 관심을 안 가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리 고집사님은 아무런 말없이 한번도 불평한 것도 없이 한번도 괴롭다는 말도 없이 묵묵히 그 십자가를 지고 흔연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몸이 아파서 일어서서 걷지를 못하는 권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그 권사님께 심방을 갔더니 그 권사님이 그럽니다. "목사님, 목사님, 고송자 집사님은 하늘이 보낸 천사입니다" "왜 그래요?" "죄송합니다만 자식들도 잘 안 하는데 우리 집에 와서 몸 거동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는 나를 다 씻겨주시고 목욕시켜 주십니다." 그 노인 양반, 몸 불편해서 누워있는 그 노인양반을 고집사님이 아무도 모르게 가서 씻겨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그렇게 자기 인생이 힘들고 아파도 그 십자가 지고 묵묵히 가니까 다른 사람이 천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고송자 집사님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하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죄송하지만 여기에 제가 부러워하는 사람 몇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고송자 집사님 부럽습니다. 저렇게 되고 싶습니다. 고집사님에게는 자식들이 영근이와 상훈이 두 아들이 있는데 알렉산더와 루포와 같이 될 수 있고 그들이 그럴 것입니다. 지금은 철이 없어서 모르지만 "야 우리 엄마는 위대하다. 우리 엄마는 참으로 훌륭했다. 우리도 우리 엄마처럼 굳세게 살자. 우리 엄마의 눈물이 헛되지 않게 살자."해서 영근이와 상훈이가 알렉산더와 루포처럼 될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만 이야기했지만 우리 교회에 여러분 계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 지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복이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참으로 기대하는 자에게 이런 크고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주는 것이고 이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우리 자식들을 책임져주십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질 수 있으면 그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기쁘게 질 수 있다면 더 크고 위대한 은혜를 우리가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진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강하게 키워야 합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다섯 명에서 열 명, 열두 명까지 낳았습니다. 귀한 것도 몰랐고 경제력도 없었습니다. 저는 제 기억에 어머니가 안아주고 어떻게 해준 기억이 없습니다. 요즘은 한 명, 두 명 많으면 세 명 정도 낳아서, 적으니까 귀하게 키우고 경제력도 있기 때문에 '오냐 오냐' 귀하게 키웁니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귀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자녀 다루는 방법에 대해 오해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귀한 것은 무조건 오냐오냐 해주고 편하게 안락하게 아무 고생도 힘든 것도 안 하게 해주면 그것이 귀하게 하는 것인 줄 아는데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귀한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보석이 귀합니다. 그런데 보석은 귀하다고 싸놓고만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보석은 귀하게 되려면 정에 맞아 깨어지고 칼에 찢겨나가서 다듬어져야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 자식들이 정말 귀하다면 귀하게 만들려면 우리 자식을 강하게 키워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면역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몸에만 면역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도 면역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몸에 나쁜 균을 일부러 적당히 넣어 항체를 만들어 면역성을 기르듯이, 그래야 큰 병을 이기듯이 우리 정신에도 그런 면역성을 길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면 고생을 시켜서 고생을 자녀들에게 넣어주어 정신이 강해져서 어떤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는 면역성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감염 예방주사는 맞으면서 고난 예방주사는 왜 안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식들에게 안 놓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강하게 키워야 됩니다. 일부러 고생을 시켜야 됩니다. 그래야 커서 시련이 올 때 그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항체가 우리의 정신 속에 우리 영혼 속에 들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안락하게 오냐오냐하고 키워놓으면 시련이 콱 밀려오면 그 아이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아무리 경험이 많고 세상의 많은 돈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맥없이 피그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어떤 부모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 그러면 평생 시련 없이 살게 하면 되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긴 인생을 살면서 시련을 안 겪을 수가 없습니다. 환경적인 시련이든지 사람에 대한 시련이든지 사람은 긴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시련을 겪습니다. 또 더더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이 큰 일을 할 때는 큰 일 속에는 반드시 시련이 오는 법인데 시련을 겪지 않게 하려는 것은 바로 큰 일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일 큰 일 중요한 일에는 반드시 어떤 시련이 옵니다. 반드시 어려움이 옵니다. 반드시 고통이 옵니다. 사람이 그것을 감당해야만 어려운 일 중요한 일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일, 그것을 잘 이겨내면 사람이 한 계단 올라가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 자녀들 시련의 때에 피그르르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어렸을 때 고난의 면역성을 길러줘야 합니다. 그것이 귀하게 키운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강하게 우리 자녀들을 키워야 됩니다. 제가 보면 무분별한 사랑 과잉 보호 때문에 자녀들을 망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 가지 여러분에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다 할 수가 있는데 제일 하기 어려운 일이 뭐냐면 자식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심지어 부부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무슨 직장 이야기 가치관 이야기 인생의 처세 이야기 친구 이야기 다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자녀 이야기만 하면 아주 예민하고 자녀 이야기만 하면 아주 자기가 탁 보호하고 나섭니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봅시다. 자식이 밥 안 먹는다고 초등하교 다니는 아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도 그럽니다. 두 살 짜리 세 살 짜리만 돼도 그럽니다. 밥 안 먹는다고 밥 떠먹여주고 "먹어라 먹어라" 그럽니다. 여러분, 하루 한 끼 이틀 삼일 굶어도 자식 죽지도 않고 영양부족 문제도 안 생깁니다. 밥 안 먹으려면 자기가 안 먹으려고 떼를 쓰면 먹여주지 마십시오. 그것이 사랑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지 말고 그대로 굶도록 놔두십시오. 버릇 고쳐야지요? 밥 떠 먹여주고 학교 늦는다고 가방 챙겨주고. 여러분, 학교 늦으라고 해요. 지각하라고 해요. 선생님께 두들겨 맞으라고 해요. 창피도 당하라고 해요. 괜찮아요, 여러분? 왜 그렇게 가방도 챙겨주고 오냐오냐 난리인지. 죄송합니다만 저도 그렇고 우리 집사람도 그런 편인데 조금만 자식 걸어온다고 쪼르르 가서 차 태우고 달려가고 비온다고 오냐오냐 우산 들고 마중 가고. 그래서 제가 그러지 말라고 그랬더니 그러면 기죽는 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기죽는 것 아닙니다. 그런 기는 죽여야 돼요. 비 맞고 걸어도 보고 저는 학교 다닐 때 형제들이 많아서 납부금을 못 내서 여러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비가 오는 길을 10리, 20리를 걸어다니고 했어요. 그래도 기 하나 안 죽고 죄송합니다만 펄펄 기 살아서 살았어요, 여러분. 그것은 기가 죽는 것이 아니에요. 모르는 소리지. 우리가 '거인'과 '거물'은 달라요. 거인은 뭐냐하면 키만 덩치만 큰 거예요. 힘만 센 거예요. 거물은 어때요? 키나 덩치에 관계없이 속이 크고 강한 거예요. 속 힘이 센 거예요. 여러분, 거인 만들어 놓으면 그것 처치 곤란한 거예요. 거인은 삐딱하면 부모도 때려버려요. 그런 자식들 많잖아요? 우리는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영양 부족이다 키 커라 뭣해라 뭣해라 하며 오냐오냐 해 갖고 거인을 만들지만 거물은 만들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 자녀들 거물처럼 키워야 돼요. 속 사람의 크기를 보고 속 사람의 건강을 보고 키워야 된다 그 말이에요. 어느 통계에 보니까 서울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80% 정도가 과일을 깎을 줄 모른다고 해요. 여자아이들은 자기 속옷도 생리하는 여자아이들이 속옷도 안 빨아 입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남학생들은 못 박을 줄도 모른다고 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러분, 이스라엘 아이들은 초등학교 졸업할 때 못 박을 줄 모르면 과일 깎을 줄 모르면 치즈 만들 줄 모르면 졸업을 안 시켜요. 이것을 알아야 돼요. 그것이 쪼잖한 것이 아니에요. 남자들도 다 해야 돼요. 여러분, 고생은 사서라도 시켜야 돼요. 저도 걱정이 많아요. 가만히 보니까 이렇대요. 우리 집 석경이는 큰아들은 어렸을 때 개척하면서 시골에서 낳아서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장난감 하나 사 줄 줄 몰랐어요. 진짜 여러분, 먹을 것 하나 제대로 못 사줬어요, 석경이에게는.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때 석경이가 세 살 때인가 제가 자동차를 하나 사줬어요. 그런데 석경이가 저번에 저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고 석경이는 "아빠 감사해요" 그러더라구요. 한번도 안 사주다가 크리스마스 때 자동차 하나 사준 것을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감사해요. 오뚝이는 어떻겠어요? 오뚝이는 조금 나을 때 컸어요. 그래서 대부분 장난감 많이 사줬어요. 해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오석경이 보다는 훨씬 많이 해줬는데 지금 오뚝이가 저보고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아빠가 나한테 뭘 해줬냐는 거예요. 지금 컴퓨터 안 사줬다고 아빠가 나한테 뭘 해줬냐고 대들고 있어요. 문제가 많아요. 보세요. 석경이는 장난감 하나 사준 것을 기억하고 아빠한테 감사하는데 오뚝이는 다 사주고 컴퓨터 하나 안 사주니까 뭐해줬냐고 불평하고 있어요. 우리 자녀들 그것 하나의 샘플이에요. 자녀에게 대접 잘 받으려면 오히려 자녀에게 대접 잘 하면 안돼요. 아니 대접 잘 하는 것이 방법이 있어야 돼요. 무조건 오냐오냐 편안하게 안락하게 다 원하는 대로 기 안 죽이겠다고 다 해주면 그 자녀들이 우리에게 불평하게 돼요, 오히려. 그러나 강하게 굳세게 키우면 매를 때려서 속사람을 키워주면 그 아이들이 커서 부모에게 감사하는 거예요. 여러분, 참 이상하게 강하게 키운 아이들은 효도해요. 오냐오냐 키운 아이들은 불효막심해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래요. 특히 여러분, 명심하세요. 제가 자녀 교육을 많이 보면서 겪은 것인데 특히 여러분이 명심할 것을 무엇이야 그러면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일수록 고생 안 시키면 부모에게 큰 불효해요. 그리고 우리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오냐오냐하고 무조건 부모하고 다르게 키운 자식들 잘 생각해야지 굉장히 잘못하면 힘들고 어려워요. 여러분, 우리 자녀들 굳세게 키워야 돼요. 거인이 아니라 거물을 만들고 속사람을 강하고 굳세게, 그래야 인생의 큰 일을 할 때 그것에 놀라서 벌벌벌 떨지 않고 굳세게 하는 면역성을 고난의 항체를 우리 영혼 속에 우리 아이들 속에 길러줘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 시간이 가서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앙으로 키워야 해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십 년 후 아니면 이십 년 후 살아갈 세상은 어떤지 상상해 봤어요? 1970년도에 이혼 부부가 14쌍 중 1쌍 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된줄 아세요? 전국 공식 통계가 5.7쌍 당 한사람 이혼해요. 그런데 실제로는 가정 법률 연구소에서는 4.6쌍 당 한사람당 이혼해요. 세상이 확 몇배로 급격히 바꾸어지고 가족 구조가 바꾸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앞으로 우리가 10년 혹은 20년 후면 우리도 미국과 똑같이 절반 이혼하고 그래서 두 번 세 번 결혼한 사람들이 한번 결혼한 사람보다 훨씬 많을 거예요. 그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에요. 그리고 이세상에는 도덕과 윤리가 아무런 기준이 없이 난무하고 알코올 마약 이런 것들이 난무하고 정신병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늘어날 거예요. 미국에서 제일 인기 있는 의료분야가 무엇인지 아세요? 정신과 의사예요. 정신과 의사들이 제일 인기가 있고 최고로 많이 돈을 버는 거예요. 아주 이 세상이 무섭고 험하고 참으로 20년 후의 세상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무서운 세상이 되고 우리가 상상도 못할 도덕 윤리가 황폐화된 그야말로 포스트 모던한 사회가 되요. 여러분, 기준이 없고 가치가 없어요. 도덕 윤리가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세대가 지금 우리 앞에 오고 있어요. 이런 세상을 살아갈 우리 자녀들 어떻게 키워야 되겠어요? 참 이것은 중요한 거예요. 가치관을 확실히 심어주지 않으면 우리 자녀들 바르게 살 수 없고 믿음 지켜 살 수 없고 깨끗이 살 수 없어요. 가치관을 확실히 심어줘야 해요. 제가 미국에 가서 남부, 영국에서 온 청교도들의 후예들 아주 하이클래스 가정에 가봤어요. 그 가정은 어떤지 아십니까? 엄격한 윤리 교육 엄격한 도덕 교육 엄격한 신앙 교육 심지어 그곳에서는 그곳 교회에서는 여자가 치마 안 입으면 교회도 못 오게 하고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하고 남자가 양복 넥타이 안 매면 교회도 못 오게 하고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해요. 요즘 어떤 분들이 우리 나라에 오면 그래요. 간단한 예인데, 커피를 마시면 블랙 커피가 사모님 커피고 프림을 타면 파출부 커피라고 그렇게 말해요. 그런데 그것은 거꾸로 예요. 머그잔에다 먹는 블랙 커피는 LA에서 온 문화예요. LA문화는 미국 서부 문화, 하급 문화예요. 거기서 총잡이들이 탕탕하는 건맨들이 카우보이들이 커피는 인이 박혔는데 뜨거우니까 먹을 수 없고 그러니까 머그잔이라는 큰잔에다 커피만 끓여 들고 다니면서 프림도 없이 쭈르르 마시는 거예요. 그것이 물론 좋은 점도 있어요. 콜레스테롤이랄지 여러 좋은 점도 있지만 그래가지고 그 문화가 LA 서부 쪽으로 간 것이 우리 나라에서 LA 이민 간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 나라에 들어온 거예요. 그것은 하급 문화예요. 사실. 남부에 가니까 찻잔 하나까지 티스푼 하나까지도 신경을 쓰고 차에다 프림도 서너 가지로 액상 프림이 있고 분말 프림이 있고 또 된장 같은 프림이 있고 여러 가지 프림 맛도 다르고 초코렛이나 여러 가지를 넣어서 굉장히 예절을 갖추어서 먹는 것을 보았어요. 제가 무슨 말을 하냐면 그들은 굉장히 그런 철저한 교육 철저한 신앙 생활을 시켜요. 잘 때 기도하지 않으면 잠을 못자게해요. 그런데 그렇게 확실한 가치 의식을 확실한 신앙 교육을 확실한 예절 교육을 시킨 아이들이 미국의 상류층을 잡고 있는 거예요. 아무렇게나 키워요? 정말로 우리 자녀들 앞에 말한 대로 불안한 세상을 살고 있는 거예요. 명심해야 됩니다. 지금 우리가 자녀들 교회 다니는 것 적당한 것만 넘어서 우리 자녀들 머리 속에 진짜 복음을 심어주지 않으면 다 무너져 내릴 거예요. 다 세상에 더러워져 버리고 다 세상에 적당히 음침하게 살아버리고 그렇게 말해요, 여러분. 우리 자녀들 바르게 깨끗이 키우려면 신앙 교육 가치관 교육 분명히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공부를 잘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 물어보겠어요? 공부가 우선이에요? 신앙이 우선이에요? 대부분 제가 다 알아요. 십중팔구는 공부가 우선이죠. 어떤 사람은 그래요. 공부는 때가 있고 신앙에는 때가 없다고. 큰 착각이에요. 여러분, 지식 습득은 시기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가 깨닫기만 하면 나이 들어서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고 지금은 컴퓨터에만 들어가면 사이버 대학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기서 미국 학위도 얼마든지 딸 수가 있어요.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고 지금은 능력 사회예요. 그런데 인격 습득 가치관 습득은 한번 시기를 놓쳐버리면 대학 이상 넘어가 버리면 바꿀 수가 없어요. 고칠 수가 없어요. 변경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그것을 변경하려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되는 거예요. 뭐가 더 문제예요, 여러분? 정말로 후회하지 마세요. 신앙 교육이 먼저예요. 가치관 교육이 먼저예요. 후회하지 마세요. 우리 자녀들이 살아야 될 10년 20년 후는 엄청난 무서운 세대예요. 그래서 신앙 교육 지금 해야 돼요. 우리 교회 아침에 예배드릴 때는 아이들이 조금 많이 나왔다가 오후에 예배드리니까 왜 어린아이들이 줄어들어요? 아, 부모들이 차에 태우고 자녀들을 좀 데리고 오면 안돼는 것인가요? 자녀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자녀들 점심 때 밥 먹고 아빠랑 엄마랑 주일날은 교회 와서든지 다른 곳에서든지 같이 밥 먹고 차 태워서 교회에 데려오면 그것이 어린아이들에게 엄청난 신앙 교육이요 추억이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신앙교육 해야해요. 10년 20년 후를 봐서 신앙 가치관을 심어주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다 저 사이버 속에 익명 속에 빠져서 정말로 퇴폐적이고 어둡고 더러운 인생 살 수밖에 없어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자녀 교육 그 누가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지만 십자가를 졌습니다. 우리 부모가 아이들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시련에 넘어지지 않도록 강하게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온누리 교회의 모든 성도가 신앙 교육의 시기를 놓치지 않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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