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개의 십자가 (막15:20-32)
  • 2013.02.07 22:31:05
  • 오늘은 사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 총회가 제정한 노동주일이며 남선교회 주일입니다. 오늘은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귀한 상징은 아무래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은 원어인 헬라어로 [스타우로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성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로마 사회의 교양 있는 사람들의 대화에서 금기로 삼는 몇 가지 주제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성의 문제, 죽음이나 종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세기 로마 최고의 풍자 시인인 [쥬버날]의 글을 보면 당시 상류사회에서 "십자가"라는 말을 꺼내는 것을 금기로 삼았다고 합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하고 역겹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귀족 출신 배우가 무언극을 하는데 십자가형을 받은 한 강도를 못박아 죽이는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장면을 본 시인 쥬버날은 어찌나 혐오감이 들었던지 귀족의 품위를 떨어뜨린 그 배우를 십자가에 아예 못박아 버리자는 글을 썼다고 합니다.

    로마의 귀족사회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사람을 나무에 달려 죽게 하는 십자가형은 피가 거꾸로 치솟게 하는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21:23절에"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만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이 십자가가 로마제국의 사형틀이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도 잘 아시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사형틀로 잘 사용한 사람들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페니키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카르타고에서 물려받았습니다. 이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무시무시한 사형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저주받아 죽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고대로부터 사람을 죽일 때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나무에 매달아놓는다든지, 못박아 죽을 때까지 버려 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원시적인 사형방법은 국가를 반역한 사람이나,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에게 적용하여 그를 제거할 때 본보기로 경종을 울리게 하기 위한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유대의 역사가 죠셉퍼스는 아주 끔찍한 사건을 기록해놓았습니다. 유대의 헤롯 대왕이 죽은 후에 로마의 총독 [바루스]에 의해서 2천명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티토(Titus)장군도 역시 주후 70년에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십자가에 처형시켰다고 합니다. 같은 유대인이면서 십자가의 형틀에 동족을 죽인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aeus)가 있습니다. 그는 그를 반대하고 나간 800명의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고, 그들의 처자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치는 참수형에 처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일 때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었고, 성서적이었습니다. 사람을 결코 십자가에 못박아서 처형시키지는 않았으나 죽은 사람의 시신을 십자가에 달아 놓음으로써 그가 저주를 받아 죽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신21:23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밤새도록 시체가 나무에 달려 있지 않도록 해 지기 전에 장사해야 하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신21:23)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정통 유대인에게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진리로 나아가는데 거치는 것이요, 수치의 대상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죽음이라고 하였는데, 세상을 구원한다고 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냐 하는 의심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분은 정치적인 왕으로 적과 싸워서 자기를 구원하실 것으로 보았는데 허무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였습니까? 어리석은 지혜로 보았습니다.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리란 말도 안 되는 미련한 진리로 보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지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십자가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치는 것이었으므로, 십자가를 심미적으로 미화시킬 위험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러한 잔혹한 십자가는 우리 주님의 고난을 드러내주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으로 주님의 죽음심의 의미를 알게 하며 제자 훈련의 핵심적인 교재가 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지는 것이었기에 구원과 영광의 소망을 가져다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기독교에 대한 상징으로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시대부터였습니다. 로마의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자발적으로 퇴위한 후 황제의 위를 다투는 자가 동로마 지역에 리시니어스와 막시무스-디아스 서로마 지역에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있었습니다. 황제가 4명이나 되었습니다. 로마시를 장악하고 있던 막센티우스의 학정에 시달린 로마 시민들은 영국과 프랑스 전역을 지배하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를 불렀습니다. 이제 막센티우스와 한판 승부로 결단을 내야할 시점이었습니다. 이때까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에 아주 호의적이었고, 그의 군대 안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고, 자기의 모친 헬레나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황제는 프랑스 지방 가울지방에 있었는데 로마로 진격해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 "이것으로 정복하라"는 말과 함께 밝은 햇살이 마치 십자가의 형상과 같이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군대의 군기를 십자가의 군기로 바꾸어 만들게 하였습니다. 이 군기가 유명한 [라바룸]이라는 군기입니다. 그리고 그의 군인들의 방패에는 그리스도 즉 [크리스토스]라는 헬라어의 첫 글자와 두 번째 글자인 'ΧΡ'라는 글자를 쓰게 한 다음 전쟁에 임하게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십자가마다 각기 고유한 이름이 있는데 영어의 X자와 P자를 함께 결합해서 만든 십자가를 콘스탄티니안 크로스(Constanrinian Cros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군대는 312년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 군대를 멸하고 로마로 입성하였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형상은 독수리의 형상 대신에 국가의 휘장으로 사용되었고, 로마의 화폐 속에, 군기는 물론이고, 군모와 방패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하였습니다. 동로마 지역의 황제였던 그의 처남 리시니우스가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었기에 동로마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여 리시니우스를 격파하고 완전한 통일 황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란 기독교 신앙의 패러독스한 즉 역설적인 진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십자가,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한 십자가, 진리로 인도하는데 거리끼고, 거치는 것이었습니다.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 구속하는 화목제단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사건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총독관저로 끌고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었습니다. 갈대를 가져다가 오른 손에 쥐어 주고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여 합당한 예의를 갖춘다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며 갈대를 빼앗아 주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고 채찍으로 수없이 때렸습니다. 기진맥진할 즈음에 다시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골고다로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사형수로 정죄받은 죄인은 십자가의 가로지르는 나무 약150파운드-68Kg 정도 되는 나무를 지고 시내를 거쳐 사형장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주님은 총독의 관저에서 나와 골고다로 가는 꾸불꾸불하고 비탈진 언덕으로 올라가는 [비아돌로로사]라는 골목길에서 14번이나 쓰러지셨습니다. 주님이 지시고 가야하는 십자가는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죄인들을 동정하거나 물을 준다거나 하는 것은 같은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자기네 나라에 반역하여 죽이는 죄인에 대해서는 가혹하기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도저히 감당히기 어려운 것을 알고 마침 [알랙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운 것입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횡목을 짊어지고, 뒤따르며 시몬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골고다라는 곳은 예루살렘 성밖에 조그만 언덕이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두 개의 바위는 마치 사람의 두개골이 연상케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곳 지형이 해골처럼 보이는 곳이었고, 이곳이 사형장으로 쓰여지고 보니 자연스럽게 붙여진 지명이 골고다였습니다. 그 뜻은 "해골의 곳"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중앙에 있는 십자가는 우리 구주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좌우에 강도 두 사람도 함께 처형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죄인이었다고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를 지나서 운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유형이 다양하듯이 믿음의 종류도 다양한 것을 봅니다. 물론 세 개의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 위에 서 있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수 십 종류의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대했던 3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매우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첫째는 구경하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십자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방관자들입니다. 십자가의 방관자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총독 빌라도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회피합니다. 큰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겁한 형의 전형입니다.

    세상엔 십자가를 몰라서 회피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이 모두 귀찮고, 거추장스럽고, 속박하는 것 같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십자가의 형장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고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고 외치고 다닙니다.

    여기에는 대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집중되는 백성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돌리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안감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로 결의하고, 빌라도에게로 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당시에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구주가 되시는 것을 너무나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을 파기하는 자라고 몰아붙이며 십자가를 지게 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장로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나라의 운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온 백성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백성의 원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라고 욕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남을 정죄하고, 자기는 의롭다고 여기면서 자기는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그 책임을 전가하고, 영광 받는 자리에 서기를 원합니다.

    어느 유럽의 한 성당에 유명한 성화가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성화 앞에서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성당에 들어가서 성화를 보았는데 도무지 명화 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당을 지키는 분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이 성화가 그렇게도 유명하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성당지기가 말했습니다. "그 성화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서서 보았지요", "아닙니다. 무릎을 꿇고 보십시오" 그래서 그 사람이 다시 가서 무릎을 꿇고 보았답니다. 그 성화를 보던 사람은 과연 그 십자가의 성화에 큰 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의 수혜자들을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하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보면 소위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 왔으나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생각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형제의 사랑이라는 특혜를 입고 자신의 유익은 추구하면서도 나누어 주는 데는 인색하기만 합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팔아먹은 가룟유다형 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주님의 십자가를 팔아서 자기 이권의 배를 채우는 아주 흉악한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며 그 업적은 대단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7:22절에 보면 주님 앞에서 그의 찬란한 업적을 자랑할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이 땅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위로를 받고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와 함께 만찬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금식을 같이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적에 경탄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함께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에게 핍박과 어려움이 닥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위로를 받는 동안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를 떠나 자기 자신을 숨기시거나 저들에게서 위로를 거두어 가시면 그들은 곧장 불평을 말하거나 낙담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평안만을 위해서라면 잘못 오셨습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 형통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쉽게 믿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30년 동안 연극단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맡은 [안톤 레이지]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형적인 미국 여행가들 중에서 모든 카메라 장비를 짊어진 어느 부인이, 연극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유명한 매우 [안톤 레이지]를 만났습니다. 이 여행자 남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도 한번 짊어지고 가는 것은 아내가 카메라로 담아보기를 원했습니다. 극단의 허락을 받아 쉬는 점심시간에 그 부부가 무대로 가서 남편은 십자가를 지고 아내는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지만 십자가를 들어 들어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남자가 십자가를 가지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유명한 배우 [레인지]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 여행가는 배우에게 말했습니다. "이곳은 연극장이요 당신은 배우입니다. 연극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사용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신앙이란 그와 같습니다. 우리들이 십자가를 메고 따르는데 아무런 값도 치르지 않으며, 땀과 눈물과 수고와 고통을 그 일에 쏟지 않는다면 나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 내가 그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도 기억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 희생이며 값입니다. 그런 희생이 없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며, 신앙을 액세서리로 달고 다니는 정도인 것입니다.

    셋째. 억지로 십자가를 진 사람도 생각해 보십시다.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극도로 피곤하고 쇠약해졌습니다. 가시다가 쓰러지고 일어섰다가는 또 쓰러지십니다. 그때 군병들은 시골로서 다녀가는 생면부지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뒤에서 메고 따라오게 하였습니다. 시몬은 부지중에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힘에 대하여는 구레네 시몬이 주님보다는 더 세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십자가를 힘으로 진다면 누군들 짊어지지 못하겠습니까. 자원하는 것이 아닌 억지와, 인색하고 강권에 못이기는 사랑은 그만큼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강권된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못됩니다. 강요에 못이기는 사랑이나 헌신,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모양을 갖추는 헌신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으로 져야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억지 사랑이라도 사랑은 실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레네 시몬의 경우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의 생애는 위대하게 변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시몬의 기록에 대하여서는 침묵합니다. 그분이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왔기에 그의 이름이 알려졌고, 그의 자녀들이 교회 안에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이름이 거명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의 아내나 아들은 초대교회 시절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시몬의 아내는 위대한 바울사도에게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시몬의 아들 루포는 그 이름만 불러도 모두 알아들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추아니랜드에 사는 한 원주민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듣고서는 깊은 감명을 받고 이렇게 소리쳤답니다. "예수여, 그 곳에서 비키시오. 그 곳은 내가 서야 할 자리입니다!" 정말 내가 서야할 자리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명령 일변도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서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원해야 합니다. 사랑은 온유입니다. 사랑은 인내요, 사랑은 아량입니다.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그 상처난 손길로 오늘도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의 마음 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노크하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먼저 내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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