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 밑에서(막15:21-32)
  • 2013.02.07 22:34:20
  •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십자가 밑에서'라고 정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걸이가 떠오르는 분도 계실 것이고, 공포 영화에 나오는 드라큐라를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마 대부분의 성도들은 '고난주간'에 받으신 '주님의 고난', 또는 '성찬식'에서의 '주님의 피와 살' 등을 생각하며 떠올리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십자가와 고난주간', '십자가와 성만찬' 등과 같이, 특별한 절기나 행사와 연관되어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아니, 그것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십자가'는 그렇게 단지 어떤 기독교 절기 때나 아니면, 어떤 이벤트성 행사 때에만 특별히 생각되어지고 떠올려지는 그런 기념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뜨거운 가슴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매일 매일의 치열한 삶의 한 복판에서 살아 숨쉬고 있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어야만 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명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밑으로 파고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토마스 아 켐피스의 이 말이 정말 가슴 깊이 다가오십니까?
     정말 이렇게 늘 십자가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올 고난주간이 언제였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때 들었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말씀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살아 있습니까? 그리고, 그때 그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의 우리의 신앙의 다짐은 무엇이었습니까?
     고난주간이 지나간 지 채 두 달이 흘러가기도 전에, 이미 우리 머리와 가슴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사라져 버린 십자가는 우리의 큰 아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지나가 버린 이 시점에서 다시 십자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골고다로 향하시면서, 그리고 그 위에 달리시면서 우리 주님이 당하셨던 온갖 고초와 고난의 십자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밑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가슴에 안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까지 날마다 살아 숨쉬게 하는 귀한 은혜가 회복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예수님과 고난의 십자가
    1. 골고다로 향하시며 당하셨던 고난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셨던 고난의 십자가를 주목하려고 합니다.
     그 고난은 우선, 예수님께서 골고다의 십자가로 향하시며 당하셨던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밤에 대제사장의 집에서 치욕과 배신의 밤을 지새웠던 예수님은 이제 새벽녘에 총독 빌라도에게로 넘겨지십니다.
     그곳에서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빌라도 앞에서 대제사장들의 고소에 대해 억울한 심문을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막15:3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여러 가지로 주님을 고소하였습니다.
     주님이 당시 대제사장들과 무리들로부터 당하셨던 고소의 내용을 누가는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눅23:1-2에 그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미혹하였다는 것, 다른 하나는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였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칭 스스로 왕 그리스도라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대제사장들의 고소에 대해 빌라도가 주님을 심문합니다.
     막15:2,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18:35,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마27:13,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 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빌라도의 심문 중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물음에만 '네 말이 옳도다'라고 짧게 답하셨을 뿐, 그 밖의 다른 질문과 고소에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본문 15:5에서 마가는 '빌라도가 이를 기이히 여겼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의 고소에 대해, 그리고 이에 대한 빌라도의 심문에 대해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생각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고소와 심문이 타당한 것이었다고 인정되십니까? 정말 예수님께서 그러한 고소와 심문을 당할 만 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분명 억울한 고소였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그러한 자리에서 그러한 억울한 고소와 심문을 당하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무어라 답하셨을 것 같습니까?
     아마 그러한 터무니없는 고소와 심문에 대해, 치밀한 논리를 가지고, 그리고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면서까지 철저하게 반박하고 나서는 것이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못한 듯, 겨우 '네 말이 옳도다'라고 짧게 한 마디 하셨을 뿐 그 외에 어떠한 대꾸도, 어떠한 반박도, 한마디의 변호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미 사53:7절에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왜 그러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이처럼 입을 열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을까요?
     예수님에게 우리 만한 논리적인 언변이 부족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그러한 고소와 심문을 뒤엎을만한 객관적이고 분명한 증거가 없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우리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터무니없이 고소하고 심문하기를 좋아했던 그 대제사장들과 무리들, 빌라도가 바로 우리들이, 저와 여러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처럼, 우리들도 입만 열면 다른 사람들을 터무니없이 참소하고 비난하며 헐뜯고 살아가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우리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의 허물 많은 이 혀와 입술을 정결케 하시고, 깨끗케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대신 침묵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침묵하신 주님 앞에 우리의 참소와 비난의 혀, 불평과 원망의 입술을 이 시간 다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도 주님처럼 입을 다물고 침묵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벽부터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신 주님은 이제 군병들에 의해 '브라이도리온'이라는 곳, 총독 빌라도의 관정의 뜰 안으로 끌려가십니다.
     거기서 주님은 군병들로부터 심한 멸시와 모욕의 고난을 당하십니다.
     그 멸시와 모욕의 내용이 오늘 본문 막15:16-20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병들은 우선, 주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고, 예를 갖춰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자색 옷은 왕이 입는 붉은 색의 옷이었고, 면류관 역시, 왕이 머리에 쓰는 관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가시로 엮어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가시 크기가 사람의 손가락만큼이나 긴 것이었음을 감안할 때 주님이 당하셨을 고통을 우리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그 앞에 꿇어 절한 후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끌고 갔습니다.
     여기 갈대는, 당시에 왕들이 그 손에 들고 있던 홀을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군병들은 그것을 예수님 손에 쥐어준 뒤 다시 빼앗아 그것으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군병들의 멸시와 심한 모욕을 받으시면서도 주님은 잠잠히 그 모든 수난을 다 당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모습으로 비취지기도 합니다.
     건장한 로마 군병들의 그 늠름한 체격 앞에, 그리고 그들이 지닌 무시무시한 무기앞에 아무런 대항도, 반항도 하지 못한 채 힘없이 떨고 있는 나약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예수님께서 그렇게 힘도 없고, 능력도 없어서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당하기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 역시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지난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빼들었던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26:52-3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는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열 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들까지도 부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우리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 주님 앞에 한갓 로마 군병들이야 상대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역시 그러한 로마 군병들의 멸시와 모욕 앞에서 조금도 반항하거나 대항치 않고, 그저 묵묵히 그 모든 멸시와 모욕을 당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요? 왜요?
     그것은 바로 우리들 때문이었습니다. 역시 저와 여러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며, 갈대를 빼앗아 그 머리를 내리쳤던 군병들의 손이 바로 우리들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로마 군병들이 그 손으로 왕되신 주님을 내리치고, 가시로 만든 면류관으로 주님의 머리를 눌러 씌웠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 역시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은 이러한 우리들의 손과 발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허물 많은 우리들의 손과 발을 정결케 하시기 위해 그 모든 수욕을 잠잠히 참고 견디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주님 앞에 우리들의 더러운 손과 발을, 이 손과 발로 지은 수많은 더러운 죄들을 다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이 더러운 손과 발이, 죄 가운데만 있던 이 손과 발이, 이제 주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데 사용되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던 고난
     이제, 우리는 골고다 언덕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이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를 주목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은 어떤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그 고난은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 그것도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더욱이 강도들 사이에, 그들 가운데, 중앙에 달리신 고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5:27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여기 보면, 분명 예수님께서 혼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강도 두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것도 두 강도 사이에 중앙에 못 박히신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말하려고 하는 주님의 고난은 단지 십자가에 달려 온 몸이 찢기시고, 온 피를 다 쏟아내시는 육체적인 고통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쩌면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심한 영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3:13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은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치욕스러운 저주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 본질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죽으셔야 하는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님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사랑의 관계는 깨져 버리고,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 저주의 죽음을 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극한 고통이었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 가장 순결하시고 깨끗하신 분이 두 명의 강도 사이에서, 가장 악한 자로 여김을 받아 가운데 중앙에 달리시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가장 추악한 죄인으로 여김을 받아 죽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하셔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가장 치욕스런 죽음을, 가장 저주스런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막15:32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희롱하며 말하는 것처럼, 당장이라도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없었던 것일까요?
     그저, 어쩔 수 없어 나무에 달려 계셨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충분히 그럴만한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기꺼이 지시고 그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바로 우리들 때문에, 역시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진노의 자녀들인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축복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친히 그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정죄받아 마땅한 범죄자요 죄인들인 저와 여러분을 의롭다 하시고 기업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해 친히 가장 추악한 죄인으로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 육체에 남은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갈2:20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진노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이제 더 이상 범죄자요 죄인이 아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은 자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십자가 밑의 군상들
     이제 그러면 다음으로,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참소하고 비난하는 혀, 불평하고 원망하는 입술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죄로 물든 손과 발 때문에,
     또한, 우리를 의롭다함을 얻은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기 위해,
    묵묵히, 그리고 잠잠히 그 저주의 십자가를 지시고 계시는 동안, 과연 그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1. 비겁함과 타협 
     우선, 바로 그 십자가 밑에 비겁함과 타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빌라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막15:15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내어줍니다.
     하지만, 이것은 빌라도의 본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그가 의도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자신에게 끌고 왔을 때, 그는 알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신에게 넘겨준 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그 어떠한 명백한 죄목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막15:10,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줄 앎이라'
     눅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석방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님이 헤롯의 관할 하에 있음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보기도 하고,
     눅23에 보면, 세 번이나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 그저 매질하는 선에서 그치려고 애를 써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 막15장에 있는 것처럼, 유대인의 전례를 따라 바라바 대신에 예수님을 석방하려는 시도를 감행해보기도 합니다.
     그것도 무산되자, 15:14에서 절규하듯 외쳐보기도 합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하지만, 그는 결국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에게 밀려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줍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15절 말씀입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
     마가는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로마 총독으로서 자신의 입지와 정치적인 생명의 안정을 위해, 그는 비겁하게도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의 요구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빌라도 그는, 예수님께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았고, 단지 대제사장들의 시기로 인해 자신에게 넘겨진 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비록 그 자신이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 여러 차례 수고하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의 요구에 타협해버리는 비겁함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의 터무니없고 억울한 고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비난과 참소의 혀를 깨끗케 하시기 위해 묵묵히 침묵을 지키시며 골고다로 향하시던 그 십자가 밑에서,
     빌라도는 그 혀로, 그 입술로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불의와 타협하며 주님을 못박도록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2. 이기적인 욕심 추구
     다음으로, 우리 주님의 그 십자가 밑에 이기적인 욕심의 추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로마 군병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막15:24절입니다.
     '십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나눌 쌔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무슨 내용입니까?
     군병들이 예수님을 못박은 후에, 그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이 입으시던 옷을 나누기 위해 서로 제비를 뽑고 있는 장면입니다.
     당시, 군병들에게는 사형수의 옷을 가지면 행운이 온다는 미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에 나누어 가졌고, 속옷은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으므로, 한 사람이 가지기 위해 서로 제비를 뽑았던 것입니다.
     이 어찌 한심스러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계십니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신의 구주요, 왕이신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를 엮어 만든 면류관을 씌우던 그 손 때문에, 그리고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치며 조롱하던 그 손의 죄를 위해, 지금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고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그 손으로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님이 깨끗케 하고 정결케 하시기 위해 달리신 그 십자가 밑에서
     그들은 그 손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주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말았습니다.
    3. 믿음을 저버림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의 그 십자가 밑에 주님과 믿음에 대한 저버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지켜보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막15:31-2절입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그들은 이스라엘 왕,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였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들은 또한 주님에 대한 믿음 역시 저버렸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고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지만, 설사 주님께서 당장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내려오셨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믿지 못하고 배척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도, 공생애 기간 3년 내내 주님께서 자신의 그리스도되심과 구주되심에 대하 표적을 수없이 나타내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무지 주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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