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도 질 수 있느냐?(막 15:16-27)
  • 2013.02.07 22:27:55
  • 지금 교회 절기로는 사순절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지남 3월 첫 주 성 수요일로 시작하여 부활주일 전날까지 평일로 40일, 그리고 여섯 번의 주일을 합쳐 46일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깊은 뜻과 그 은혜를 생각하며 경건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또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간은 고난주간 이라고 부르며 그 주간은 특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한 주간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의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만 마지막 고난 주일을 앞두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척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여러분들이 잘 아는 베데스타 연못에서 조금만 서쪽으로 가면 예수님께서 처음 십자가를 지시고 출발하신 곳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곳을 브라이도리온 이라고 했습니다만 금은 작은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만 누구든 구 곳에만 가면 자연히 경건해 질 수밖에 없는 그런 곳입니다. 지난번 내가 갔을 때에는 마침 카톨릭 순례자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낼 수 없도록 조용한 분위기였는데 바로 그 곳에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교회 전면에 그려진 주님이 십자가를 처음 메시는 성화를 한참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너도 질 수 있느냐?

    나는 그 말씀에 쉽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마음 속에는 믿는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정말로 질 수 있느냐?

    순간 나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쉬운 의미의 말씀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예수님이 십자가를 메시고 가셨던 그 언덕길을 다 오를 때까지 그 말씀의 의미를 찾기 위해 많은 생각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오르면서 번잡한 아랍 상인들의 모습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그들이 외쳐대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올라가면서 우리의 일행은 여러 장소에서 잠간씩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무게에 눌리어 힘을 잃고 쓰러지신 곳들이 었습니다. 어떤 곳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곳과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님에게 손수건을 드려 흐르는 땀과 피를 닦게 하였다는 곳 등 기념적인 많은 곳이 있습니다.

    그런 곳마다 수도원이 있거나 작은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었으나 일반에게는 잘 공개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발걸음을 꼭 붙잡아 놓는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쓰러지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지기 시작했다는 곳이었습니다.

    나는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너도 질 수 있느냐?'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주님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 옛날 구레네 시몬이 졌던 바로 그 십자가를 오늘 우리에게 다시 지라고 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성묘 교회에 도착할 때까지 그 시몬의 십자가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입장에 서서 생각을 했던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내가 생각했던 그것이었을까?

    정말 그런가 오늘 우리는 그 정답을 찾아 주께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1.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

    먼저 그레네 시몬의 십자가는 무슨 의미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가 자발적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막 15:21)

    이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록 짧은 말씀으로 기록했지만 성경은 그의 모든 것을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우선 그는 시골 구레네 출신라는 것(구레네는 요즘 이집트 옆 리비아 땅입니다.)그리고 아들이 두 명 있었는데 두 명의 이름을 다 밝힌 것을 보면 그들이 초대 교회 때에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나 처형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만 그냥 '지나가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십자가를 멜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누구인지 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것인지 알 이유도, 알 필요도 없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우연하게 그가 지나가던 그 자리에서 주님은 쓰러지셨고, 십자가에 못 박기전에 죽으면 안된다는 로마 군인들의 생각과 맞아 떨어져 그가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 놓고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재수 없는 일 로 여길 것이고, 그래도 성경에 조금은 호의적인 사람들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재수 없는 일이거나 우연한 일일 것입니까?
    성경에 그의 아들들 이름까지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시몬이 예수님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갔던 것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첫째로, 희생을 의미합니다.

    모든 십자가가 그렇듯이 시몬이 진 십자가도 희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시몬은 자기 스스로 십자가를 졌던 것은 아닙니다. 억지로 지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로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눈앞에서 기막히고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도 무관심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의든 타의든 십자가를 지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자기가 하던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바로 희생을 의미합니다. 시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희생으로 가장 값진 것을 얻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런 희생이 없이는 값진 것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가장 값진 것일수록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논에서 추수를 하던 한 농부가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먼 바다를 내려다보니 바닷물이 순식간에 멀리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곧 해일이 몰려 올 징조였습니다.
    그런데 언덕 밑 낮은 지대에서는 이웃 사람들이 그것도 모른 채 정신 없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곧 해일이 올 것이라고 소리쳤으나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 농부는 궁리 끝에 볏 짚단을 모아 불을 붙이고는 창고 처마 밑에 달려있는 종을 힘껏 쳐댔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언덕 쪽을 바라보았고 불을 끄려고 모두 올라왔습니다. 그들이 올라오자마자 그곳엔 큰 파도가 몰려와 순식간에 물바다를 이루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무사할 수 있었으나 대신 그 농부는 1년 동안 땀흘려 농사지은 자신의 벼가 모두 타버리는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곡식더미에 불을 놓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농작물은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귀한 많은 사람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으니 자신의 희생을 아까워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위를 둘러본다면 나의 작은 희생으로 이웃에게 큰 유익을 주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희생은 누군가 하나는 버려져야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십자가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자체가 희생인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과 용서입니다.

    나는 지난번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시몬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강제로 내키지도 않았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랐던 구레네 시몬.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을까?
    아마 처음에는 많은 불평과 원망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찼을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연민과 동정의 눈초리로, 또 어떤 사람은 저주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그 많은 구경꾼 중에 하필이면 자신이냐? 는 원망 섞인 불평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갔다는 사실로 비추어 본다면 나중에는 원망이나 불평보다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어쩌면 자기에 앞서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을지도, 아니면 자기와 함께 주님의 뒤를 따르는 여인들의 주님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를 지지 않았더라면 그런 마음이 생겼을까? 희생도, 용서하는 마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기 때문에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희생과 용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레 미제라블'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쟝발장이라는
    주인공 이름이 잘 알려진 책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아주 감동적인 모습이 연출됩니다. 탈옥수인 쟝발장을 일생 동안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지펠 형사는 마지막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쟝발장을 지지하던 청년들에게 붙잡혀 죽게 됩니다. 그 때 쟝발장은 지펠형사를 석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해 줍니다. 그러자 풀려난 지펠형사는 쟝발장을 찾아옵니다.
    당신은 내가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일텐데 왜 살려 주는 것입니까? 
    그때 장발장의 대답이 멋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넓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바닷가 땅보다 더 넓고, 하늘은
    그보다 더 넓습니다. 그러나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차갑고 냉혹한 지펠형사의 얼굴에게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깊은 상념에 빠졌습니다.

    2. 이제 주님께서 '너도 질 수 있느냐'는 물음은 우리로 무엇을 원하는 물음이신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이 물음이 바로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를 의미한다면 우리에게서 어떤 대답을 원하시는 것일까?
    아니면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까?
    앞서 살펴 본대로 그저 단순히 우리의 희생을 원하시고, 용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일까?
    물론 그런 뜻도 담겨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은 십자가 길의 맨 끝인 성묘 교회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희생을 하고 용서를 하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랐을지라도 그 마지막은 결국 주님이 다시 지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모든 것은 대신 할 수 있어도 마지막 십자가에서 못 박히는 것만은 대신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너도 질 수 있느냐? 
    바로 이 물음은 그냥 시몬처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는 소름이 끼친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 십자가를 진다는 것에 대한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이 물음에는 그저 시몬처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만이 주님께서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세베대의 아내가 자기 아들들인 야곱과 요한을 주님의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 20:22)

    그들은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마시려고 하는 잔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 주님께서 마시려고 하는 잔은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주님을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다른 제자들도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마 26:35 )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인 너도 질 수 있느냐? 는 말씀은 2000년
    전 제자들에게 하셨던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는 말씀과 똑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단순히 희생만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사랑과 용서를 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보다 더 깊고 큽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솝 우화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큰 집안에 결혼식이 있어 음식을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집 주인은 그 집에 있는 동물들을 모두 소집하여 의논을 하였습니다.
    "이번 결혼식에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잔치를 베풀려고 하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동물들은 입을 모아 "찬성이요, 대찬성이요"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집 주인이 "그럼 이 요리의 재료로 거위를 죽이기로 합시다"라고 말하자 거위는 새파랗게 질려서 소리쳤습니다.
    "나는 큼직한 알을 낳아서 이 집안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죽이려면 저기 있는 수탉을 잡으십시오."
    수탉도 외쳤습니다.
    "무슨 소리요? 나는 아침을 알려 주는 거룩한 직분을 맡고 있소. 저기 시원찮은 양이 있으니 저 녀석을 죽입시다."
    양도 외쳤습니다.
    "내 털이 주인의 가족을 따뜻하게 보호해 주고 있소."양은 말없이 개를 가리켰습니다.
    개도 소리질렀습니다. "나의 은혜를 배신하다니, 도둑을 지키고 여우나 늑대를 지키는 것이 바로 내가 아니오? 나란 말이오. 저 말을 죽입시다."
    말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멀리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의 덕분이오. 내 등은 앉기도 편해서 저기 쓸모 없는 소 같은 것하고는 질이 다르오. 그러니 소를 잡아야 하오" 
    소도 한마디 하였습니다.
    "나 없이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우화를 보면 아무도 자신이 그 일을 담당하겠다는 짐승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잔치는 꼭 해야 된다고 주장은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희생하겠다는 동물이 없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들도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까?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옛날 제자들처럼 신뢰할 수 없는 대답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로 신뢰할 수 있는 답변이어야 합니다. 그 답변은 곧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이요, 서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답변 가운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바라고 원하시는지 깨닫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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