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지로 진 십자가 (막15:16-23)
  • 2013.02.07 22:29:06
  • 여러분 추석 명절들 잘 세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고향을 다니러 가셨다가 아직 고향에 머무르면서 고향의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분들도 아마 많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이번 추석명절 동안에 고속도로를 나가보신 분들은 누구나 민족 대 이동이라는 말을 실감하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또한 TV화면들을 통해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남으로 내려 갔었다는 것을 알수가 있었습니다. 무려 10시간 20시간 이상이 걸려서라도 기어코 고향을 찾아야 겠다는 그런 극성스러움 속에서도 우리 한민족의 역동성과 가능성을 어쩌면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엄청나게 많이 내린 비로 말미암아서 빗길에서 많은 교통사고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지켜주시고 오늘까지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만큼이나 명절에 대한 극성스러움을 떠는 그런 민족이 있다면 바로 유대민족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유월절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을 찾습니다. 심지어는 이 예루살렘을 찾기 위해서 연결되는 모든 항공로선이 이 유월절 동안에는 만원이 되고 표를 구할수 없는 일들이 해마다 일어나는 것을 오늘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유대인들의 극성스러운 명절을 지키는 것을 보면 구약성경 출애굽기 23장 14절에“너는 매년 3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일년에 3번씩 절기를 지키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23장 17절에 보시면“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그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유월절 절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애굽에 그 종살이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그런 절기라고 생각하면 될 줄 믿습니다.


     니산월 10일에 그들은 처음난 어린양을 골라두었다가 14일날 밤에 그 어린양을 잡아서 그 어린양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를 밤에 구워 먹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15일날부터 한주일 동안은 그들은 누룩없는 빵, 즉 무교병을 먹고 한주일을 보내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심에 대해서 감사하는 하나의 절기를 이렇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매년 봄철에 부활절을 지키면서 왜 부활절이 앞으로 갔가 뒤로 갔다하는지 아마 상당한 혼란이 있을 줄 압니다.  3월 말이나 4월 초 그 사이에서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이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양력 달력에 의해서 이 부활절 절기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음력달력에 이 부활절을 맞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이 유월절 절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잡혀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 사건들이 유대인들이 지키는 이 유월절 절기 기간동안에 벌여졌던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인구가 18만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대로서는 엄청나게 큰 도시였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인구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시민들이 3백만이 되었다. 이렇게 기록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많은 현대학자들은“요세푸스의 기록은 과장된 것이고 잘못 기록된 것이다.”이렇게 비판을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예루살렘의 상주인구는 18만명정도이지만 이 유월절 절기가 되면 전국 각지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이나 유대교에 입교한 자들이 예루살렘이 모여 들었다는 겁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그 인구가 최고 3백만에 육박할 만큼 이 유월절 축제 기간동안에는 인구가 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접하게 되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이 사람도 먼 곳에서 그러니까 다른 나라에서 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던 사람입니다. 지금의 나라로 보면 아프리카 북부 지방에 있는 리비아에 트리폴리라는 도시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리비아에 트리폴리지역을 그 당시에 구레네라 이렇게 불렀습니다.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엄청나게 먼 거리입니다. 아마 육로로 다니는 사람보다도 요즘으로 치면 비행기로 다니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교통편이 불편했던 그 시대에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예루살렘까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왔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봤을 때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세계곳곳에서 모인 이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대목을 이루는 그런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이 넘치는 이 축제의 분위기 속에 하나의 엄청난 배신과 음모와 모략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청년 예수를 죽이기 위한 많은 사람들이 꾸미는 그런 모략이었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가 배신을 했고 그를 잡아죽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동원이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밤 사이 예수님은 체포되어졌고 서둘러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성급하게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 형이라는 판결이었습니다. 십자가 형은 로마 제국에 반역을 저지른 정치범들이나 또는 그와 유사한 죄인들을 처형할 때 사용하는 사형 틀이었습니다. 이 형벌이 너무나도 지독하고 잔인한, 비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처형하는 처형술이라 해서 그 당시에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십자가 형벌을 취하지 않는 예외 조항이 법률적으로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 형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형장에까지 십자가를 끌고 가는 그런 관형이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밤을 밝히면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형을 언도 받고 자기가 짊어질, 자기가 메달릴 그 십자가 형틀을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거의 탈진상태에 빠진 예수님은 몇걸음을 가다가 쓰러지고 몇걸음을 가다 또 쓰러지고 하는 그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로마 병사가 체직으로 쳐보기도하고 십자가를 다시 등에 지어줘보기도 하지만 기진맥진한 예수님은 자꾸만 그 자리에서 퍽퍽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호송하던 로마 병사 한사람이 그 연도에 나와 서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지목해서 앞으로 나오게 하고 그가 예수님이 지고가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골고다를 향해서 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을 보시면 이 마태복음의 기록과 마가복음의 기록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마가복음 15장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2절을 보시면“나가다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서로 약간의 상반된 그런 기록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 억지로 십자가를 메고간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은 리비아의 트리폴리 지방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이 흑인 이었다고도 하고 어떤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보면 머리가 곱슬머리이고 체격이 건장한 흑인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을 시몬이라고 하는 그런 영화도 볼 수가 있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는 대충 이렀습니다. 이 사람이 유대교에 입교한 흑인중에 한사람이었든지 아니면 본래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을 따질 때 부계중심의 혈통이 아니고 모계중심의 혈통을 따집니다. 아버지가 유대인이지만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유대인이라고 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유대인이고 아버지가 이방인이면 그 사람은 정통 유대인으로 인정을 하는 그런 혈통을 따질 때 아주 묘한 그런 원칙이 있습니다. 이렇게 봤을 때 아마 어머니가 유대인이었고 아버지가 아프리카 흑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름을 보면 이 사람의 이름이 시몬이라는 이름입니다. 이 시몬이라는 이름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흔히 쓰는 이름이 아니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흔히 쓰는 이름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김서방, 이서방, 박서방 만큼이나 흔한 이름이 바로 이 시몬이라는 이름입니다.


       이렇게 봤을 때 이 구레네에서 온 시몬은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유대교를 신봉하는 그런 사람중에 하나였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시몬은 유월절을 맞이해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멀고 먼 길을 걸어서 왔는지 낙타를 타고 왔는지 마차를 타고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유월절 축제를 즐기고 하나님께 나아와서 제물을 바치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시몬이 예루살렘에 머무는 기간 동안에 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잡혀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서 처형을 당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왔던 많은 유대인들에게 나사렛 청년 예수라는 소문이 이리저리 입을 통해서 전달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21절에 보면“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시몬이...”마침이라고 했습니다.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는 길에 서서 아마 많은 사람들 속에 이렇게 섞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으리라고 학자들은 추측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쓰러지고 일어나고 또 쓸어지고 마침 이 구레네 시몬 앞에서 예수님이 쓰러지고 일어나지 못해서 기진 맥진해 있을 때 로마 병사가 그 앞에 있던 한 사람을 지목해서“당신이 나와.”이렇게 하면서 그에게 대신 어깨에 십자가를 지웠다는 겁니다.

     


    1. 억지로 진 십자가,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 입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이 구레네 시몬은 자기가 져야될 십자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이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마태복음에서도 억지로, 마가복음에도 억지로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본이 아니게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졌다는 겁니다. 억지로라는 말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는 겁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나아가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관점으로 봤을때는 구레네 시몬이 진 이 십자가는 억지로 진 십자가고 또한 우연히 예루살렘 어느 거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주님과 마주쳤고 본의 아니게 로마 병사에게 징발을 당해 나와서 십자가를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봤을때는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구레네 시몬을 거기에 등장을 시킨것입니다.


      여러분 연극을 보면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 출현하는 주연과 엑스트라들이 이쪽 저쪽에서 나오면서 극이 전개가 되어집니다. 그러다가 극적인 순간에 한 사람이 딱 등장을 해서 누구와 딱 마주치지 않습니까? 바로 오늘 여기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힘들게 올라가고 쓰러지고 일어나고 또 쓰러지고 하는 그 가운데 극적인 장면이 전개되는데 이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여러분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마지막 벤허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는 예수님에게 표주박에 물을 떠서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막 천둥 번개가 치고 난 뒤에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 동생이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는 그런 장면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어떻든간에 이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과 만나는 이 장면은 어쩌면 3백만이나 되는 예루살렘에 운집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과 구레네 시몬의 만남은 너무나 우연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봤을때는 우연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인 만남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예수님과 시몬의 만남을 계획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요나가 니느웨이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욥바로 갔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마침이라는 말이 아주 극적으로 나옵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딱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딱딱 맞아 떨어질 때 죄를 지을때도 무엇이 딱딱 맞아 떨어지고 우리가 타락을 하고 유혹을 받을때도 무엇이 딱 맞아 떨어지는 그런 경험을 여러분들 많이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봤을때는 우연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놓여져 있는 우리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갔습니다.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형무소살이를 했습니다. 많은 누명을 뒤집어 쓰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왔습니다. 형들과 요셉이 상봉했습니다. 형들은 파랗게 질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형들과 자기의 관계를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형들과 자기의 관계를 해석을 했다는 겁니다.“내가 여기 온 것은 형들이 나를 팔아서 여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나를 여기에 보내셨다.”벌써 관점이 다르지 않습니까?


      여러분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만족할 수도 있고 늘 불평하고 원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들이 깨닫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려는 그런 자세를 회복해야 될 줄로 생각이 듭니다. 그 많은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뽑히지 않고 아프리카에서 온 이 구레네 시몬이 거기에 발탁이 되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봅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는 바로 고통의 십자가 였습니다.

     


    2. 억지로 진 십자가는고통의 삽자가입니다.


      여러분 억지로란 말을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억지로 무슨일을 한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것을 기쁨으로 자원하는 심정으로 자발적으로 솔선수범해서 무엇을 한 것보다 어쩌면 억지로, 억지로... 공부도 억지로 했고, 직장생활도 억지로 했고, 부모님 말씀도 때때로 억지로 들었고, 억지로 억지로 순종했던 그런 때가 많았습니다. 자발적으로 솔선수범해서 기쁨으로 하는것보다 억지로하면 똑같은 짐을 짊어져도 억지로 할 때는 더 무겁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더 힘들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더 짜증스럽습니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주님께서 지고 가던 그 십자가를“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세상죄를 다 짊어지고 가시는데 내가 무언가 도와야 되겠다.”이런 심정으로 십자가를 졌다면 그 십자가는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절 절기가 되면 세계 곳곳, 특별히 카톨릭 국가에서는 이 십자가를 지고 고행을 하는 행사를 합니다. 손에 못을 직접 박기도 하고 필리핀이라든지, 칠레, 브라질 같은 나라들을 보면 부활절 절기가 오면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 모형을 지고가는 흉내를 내지 않습니까? 그 예수역을 서로 하려고 기쁨으로 자원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의 의미도 모르고“내가 왜 이 짊을 짊어져야된단 말이냐. 저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나는 못간다. 나는 질 수 없다.”고 아마 발버둥을 쳤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로마병사가 로마의 강력한 강제적 통치력에 물리적 힘에 의해서“너 져. 안지면 내가 가만 안둘꺼야.”아마 이렇게해서 억지로 지고 갔을 것입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아주 짜증스럽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입에서 터져 나오게 되어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억지로 했던 일들 참 지겹고 고통스러웠던 그런 경험들을 누구나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에가서 공부를 하는것도 기쁨으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억지로 빨리 졸업해서 공부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야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직장생활에 대한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직업에대한 어떤 의식이 빈약한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생활을 억지로 하는 겁니다. 그 직장 생활은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억지로 기도하고 억지로 교회와서 예배드리고 억지로 봉사하고 억지로 성경공부 나오고 억지로 끌려가는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바로 깨닫지 못했을 때 우리는 억지로 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이 십자가는 우리 인류의 구원과 상관되어지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그 말을 우리가 해석하고 적용할때는 어떤 사람은 자기 육신의 가시, 육신의 질병이 내 인생의 가시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떤 문둥병환자의 수기에서는“나의 문둥병은 하나님이 나에게주신 나의 십자가다. 그러니까 나는 문둥병 자체를 사랑하겠다.”그렇게 간증을 한것을 본적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비신앙적이고 말썽많은 자기 아내가 자기 인생의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술 먹고 날마다 가족들을 못살게 구는 자기 남편이 한 여인에게는 한 평생 십자가 일 수도 있습니다. 애먹이고 한평생 자식노릇 제대로 하지 않고 부모에게 근심 걱정거리가 되는 자식이 나에게 십자가 일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 아주 유명했던 훌룡한 신학자 한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아주 고통을 주는 큰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하나님께서 나의 저 장남을 통해서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생각하고 나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나로 더 많이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더 무릎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 아들을 나의 어깨에 십자가로 매어 주셨다.”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을 보기도 했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다양할 수도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모든 사람이 다 기쁨으로 짊어지고 순종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 어쩌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십자가 짊어지기를 싫어합니다. 이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합니다.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지길 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서양 교훈 가운데“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이런 말이 있는데 이것은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는 내 팽개치고 면류관만을 사모하고 면류관만 바라보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 모습들이 어쩌면 우리 현대 신앙인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사인 저조차도 ?때로는 피하고 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억지로 무슨 일에 참여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내 목을 내어놓는 일과 마찬가지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이 그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이 구레네 시몬이 짊어졌던 십자가는 억지로 진 십자가였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는 바로 고통의 십자가였습니다.

     


    3. 억지로 진 십자가는 축복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구레네 시몬이 짊어지고 갔던 십자가는 고통의 십자가인 동시에 축복의 십자가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됩니다. 우리가 때때로 고통스럽게 억지로 무슨일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축복으로 이렇게 주어 질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로마서 16장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문안 인사를 쭉 하였습니다. 로마 교인들에게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억지로 짊어지고 갔습니다. 성경에는 모두가 억지로라고 분명하게 명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이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 사건과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서 아마 이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전도자가 되었던 것으로 이렇게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27장 32절에는“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 시몬.”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었던 본문 마가복음 15장 21절에서만 알렉산더와 루포가 시몬의 아들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이 있고 난 뒤에 마가복음이 쓰여진 것은 상당한 기간이 흐른뒤에 기록이 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시자마자 바로 마가복음이 기록되어지고 사람들에게 공포되어진 것이 아니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2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정확한건 알 수 없지만 최소한도로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 마가라는 사람이 이 책을 기록하면서 그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간 사람이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인데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냥 구레네 사람 시몬 이렇게 하면 그 시몬에 대해서 빨리 머리에 와 닿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소위 말해서 출세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시몬 이렇게 해서 성경을 기록했다는 겁니다. 그래서“그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간 사람이 루포와 알렉산더의 아버지였구나.”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했다는 겁니다. 루포와 알렉산더가 사회적인 지위가 어느정도였는지 우리가 알수 없지만 그당시 세계에 가장 중심이었던 로마에 있는 교인들이 알렉산더와 루포하면 벌써 다 알아 차릴만큼 유명인사가 되어있었습니다. 목사가 되었는지 일반 전도자로서의 활동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사도바울을 도와서 복음 전도에 앞장섰던 다시말해서 저 아프리카 리비아의 한 촌 사람이 그 당시 최고의 정치 문화 경제 시회 모든 영역에 최고의 중심도시인 로마에 가서 명성을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봤을 때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짊어진 이 십자가는 자기에게는 고통의 십자가였고 너무나 힘들고 억지로 진 십자가였지만 그 자녀들에게는 엄청난 축복의 열매가 맺혔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갔던 이 시몬의 아내는 사도바울이 바로 그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다 할 만큼 자기의 친 어머니처럼 존경한, 존경받는 여인으로 여기에 등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이 시몬은 안디옥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이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었지만 그 뒤에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를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하고 그 인생을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열매 맺는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짜증스럽기도 하고 역정이 나기도 하고“어느것을 우리가 해야하느냐, 왜 이 짐을 우리가 져야 하느냐, 난 할 수 없다.”그렇게 마음속으로 불평이 나고 원망이 나올수도 있습니다. 정말 자발적으로 이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억지로 그 분위기 때문에 아니면 어떤 외부적인 강압에 의해서 이 짐을 짊어지고 갈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짐도 지나고보면 그렇게 고통스럽던 그 짐이 자기 인생에 엄청난 축복으로 열매맺히는 그런 장면을 이 구레네 시몬을 통해서 우리는 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진주가 만들어져가는 과정은 고통, 고통, 고통입니다. 그 고통의 결과에 한알의 아름다운 진주가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인생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떤 방법으로라든지 그것을 갚아 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명절을 보내면서 혹시 가족들 사이에 서로 마음이 상하는 일들이 없었습니까?“왜 나는 막내며느린데 이렇게 내가 짐을 다 짊어져야 하느냐. 큰며느리는 도데체 뭐 하고 큰아들은 도데체 뭐하는거냐?”그렇게 하면서 부모님을 내팽개치고 밀치고 하는 그런 일들이 우리 한국의 가정에서 수없이 많이 일어나곤 합니다. 자랄때는 부모님의 품에서 부모님의 사랑가운데서 다 자라난 자식들이 장성하고 나면 부모님을 짐으로 여기고 부모님을 십자가로 여기고 서로 안지려고 싸우고 발버둥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그 짐을 안지려고 하는 그 당사자들은 나중에 자기 자식들을 통해서 또 내팽개쳐지는 하나의 십자가가 되고 말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점을 서로 반성하고 내가 둘짼데, 셋짼데, 막내인데 하는 이런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부모님을 십자가로 생각하지 않고 내가 부둥켜 안고 사랑해야될 대상임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이 짐을 지는 사람은 복받습니다.


      저희 집에는 형제가 열인데 저는 다섯째 아들, 막내아들입니다. 그래서 저희 집사람은 사실 시갓집 짐을 제대로 져 본 일이 없습니다. 질 일이 없었습니다. 위에서 다 져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형제들이 많기 때문에 서로 짐 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희 형님들 가운데 셋째 형님이 부모님에게 그렇게 잘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대소사들을 그 셋째 형님이 대부분 다 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열 형제들 가운데 제일 잘 사는 형제가 있다면 셋째 형님입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살고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내가 짊어져야 될 짐을 내가 짊어지고 내가 감당하면 이세상에서도, 교회 바깥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하물며 우리 믿는 사람들이 내가 짊어져야될 짐을 내가 짊어지고 내가 감당하면 당연하게 그 축복이 때로는 나에게는 고통으로 주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에게 또 내 인생에 다른 어떤 모습으로 놀랍게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개달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 아멘을 잘 안하십니까? 이럴 때 아멘하셔야 되는 겁니다. 뭔가 마음속에 꺼림직한게 있는 며느리들이 있습니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것 때문에 남편에게 바가지 긁은 일이 있는 아내들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셔야 여러분 자녀들을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아무리 잘 되어도 자녀들이 축복받지 못하면 참 불행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알렉산더와 루포를 축복하셨습니다. 왜 축복하셨습니까? 이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갔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예배시간에 우리 대 선배이신 임갑인 목사님께서  참석해 계십니다. 명절을 보내기 위해서 큰 아드님이신 임대욱 집사님댁으로 부산에서 오셨습니다. 요즘 어른들은 자식들을 찾아 오십니다. 얼마나 좋은 모습입니까? 그런데 우리 임갑인 목사님은 아마 우리 고신 교단 목사님들 가운데 자녀들을 가장 잘 키운 그런 목사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임대욱 집사님도 참 건실하고  든든하지만 그 밑에 아드님과 며느님 두 분이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부부판사가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목회 생활의 마무리를 자식의 축복을 통해서 거두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우리 목회자들이 다 부러워하고“임 목사님처럼 자식을 키울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이런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한평생을 살아 오시면서 얼마나 힘든 짐이 있었고 고통과 아픔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채워주시는 그 모습을 우리는 생생히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통해서 공짜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구원을 주셨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 억지로 진 십자가는 우리들도 져야할 십자가 입니다.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억지로 진 이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를 우리도 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아프리카에서 온 그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졌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내 목숨을 걸겠다고 했던 그 제자들이 다 어디로 도망을 갔습니까? 이렇게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한상동 목사님이 저희가 신학교 초학년때 학장을 하셨는데“여러분들 절대 사람 믿지 마십시오. 마누라도 믿지 마십시오. 주님만 믿으십시오.”이렇게 말씀하셨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이해가 안됐습니다. 어떻게 인간관계를 다 끊어 놓을 만큼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하시나 했는데 부모도 믿지 말고, 자식도 믿지 말고, 심지어는 함께 사는 마누라도 믿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철이 들고 보니 이제 이해가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할 때 마지막엔 다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다 뿔뿔히 흩어져서 도망을 갑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도 함께 십자가를 지는 부부가 흔치 않습니다. 헤어집니다. 자식들도 부모를 버리고 부모도 자식을 버리는 것이 세상사 인생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날 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만찬상에서“내게 고난의 때가 올 것이고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하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와서“다 주를 버릴지라도 절대로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우리는 너무 쉽게 장담하고 살지 않습니까?    누가 뭐라고 하면 절대로 나는 그런일 없을 것이다. 그 상황이 되면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사람이 가장 먼저 도망가 버립니다. 가장 먼저 이탈하고 가장 먼저 회피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한상동 목사님이“사람을 믿지 말라.”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를 끊어 놓기 위해서 불신을 조장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그만큼 나약하고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 중심적인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다른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면서 예수님이 대권을 잡으시면 우리 형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그렇게 인사청탁까지 했던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던 그 자리에는 없었습니다.


      3년동안 예수님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신세를 졌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한국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인덕이 없어서 지금 이렇게 됐습니까? 인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배신의 기질들이 우리 내면 세계속에 우리의 잠제 의식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배신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의리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우리 자신들조차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배신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우리는 인정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요즘은 베스트셀러를 내고 있는 서울의 어느 목사님의 고백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 부임을 해서 건축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교회를 부임하기 전에 다른 친구들이 전부다 그 교회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 이제 교회 건축을 하면서 수십 번 “내가 이 교회를 떠나야 되겠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짐을 짊어져야 하느냐.”생각하면서 겉으로는“우리 이 십자가를 지고 가자.”하면서“나도 기회만 있으면 이 교회를 떠나야 되겠다.”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어떤 계기가 되어서 깨닫고 난 뒤에“여러분 내 자신도 이 무거운 짊을 지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럽고 힘든데 하물며 여러분들은 어떻겠습니까? 만약 이게 짐으로 여겨지면 이 짐을 지기가 힘들다면 더 좋은 곳으로 여러분 원하는 곳으로 가십시오.”하면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요즘 서울에 제 친구 목사님 가운데 개척한지 얼마 안됐는데 이상적으로 아주 급성장을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얼마전에 대전에 와서 저하고 사무실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교회 건축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겁니다. 그 친구는 우리 교회 만큼한 빌딩을 임대해서 지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큰 고민이 어떻게 교회를 지을 것이냐 하는 거랍니다. 앞으로 이 일이 자기 인생에서 제일 큰 고민이고 제일 큰 하나의 짐이라고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대해 외부에 알려지기는“교회당을 짓지 않고 이상적인 목회를 통해서 그 교회당 짓는 비용을 선교에 쓰겠다.”이렇게 알려져 있는데 정작 그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사님은“교회를 어떻게 짓나? 다 좋은데 내 이 일이 제일 힘들다.”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하물며 목회자들이 교회를 건축하면 10년 20년을 목회인생에 힘들고 어렵게 살고 고통 속에 사실 살아야 됩니다.


      하물며 일반 교인들이야 그것보다도 훨신더 느끼는 감이 더 크고 무겁게 여겨지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목회자들 가운데 더 좋은 교회 더 대접을 잘 하는 교회 더 나은 교회를 찾아서 도망아닌 도망을 가버리는 그런 경우들도 사실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이것이 내가 피할 수 없는 짐이라면 구레네 시몬처럼 이 짐을 짊어지고 우리가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자세로 나아갈 수 있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자꾸만 여러분 가정에서 내가 둘짼데 난 막내인데 이렇게 따지다 보면 한번도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시고 난 뒤에“내가 왜 그랬을까?”후회해 봐야 사실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때때로 우리 자신들이 인간적인 생각에서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판단하고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일에 있어서 너무나 소극적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지 무거운 짐이 여러분 어깨를 누르고 있지 않습니까?“직장에서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데 월급을 똑같이 받는데 내가 왜 이 짐을 짊어져야 하느냐.”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짐을 한번 피해 보려고 애쓰는 그런 상황에 있는 분이 없습니까? 이렇게 불평하고 마음속으로 원망하면서 내가 지금 고통속에 있는 그런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교회를 섬기면서 왜 중직자들은 목사님 장로님들은 이 짐을 안지는데 내가 왜 이짐을 짊어져야 하느냐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짐에 눌려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런 분들은 없습니까? 여러분 내 자신이 지금 비록 억지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짐을 묵묵히 지고 주님 앞에 서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냥 걸어서 골고다까지 올라가는것도 숨이 차고 땀이 흐르는데 하물며 그 단단한 무거운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올라갈때는“예수님 제자들 큰 소리 치던놈들은 다 어디 갔느냐? 내가 왜 이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하느냐?”그런 원망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마디 말도 없이 그는 골고다에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갔고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의 구원을 이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억지로 진 십자가가 그의 삶에 그 인생에 그의 자녀들에게 그의 가정에 그의 가문에 놀라운 축복의 그루터기가 되었음을 우리 자신들이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 구레네 시몬이 짊어지고 갔던 십자가를 하나님 나도 짊어지고 꿋꿋히 골고다를 향해서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놀라운 축복이 되어서 축복의 그루터기가 되어질 것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들 모두가 함께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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