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 무덤 (막16:1-8)
  • 조회 수: 339, 2013.02.08 20:41:16
  • 지난 성금요일 저는 말할 수 없이 비통한 마음으로 한 장례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의사지망생으로서 인턴과정에 있었단 한 청년의 죽음이었고,
    그는 가까운 교회 목사님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잘 키운 아들이 이제 한 사회인으로 생활할 날이 얼마남지 않은 가운데,
    부모를 두고 먼저 가버렸을 때,
    그 부모가 가질 절망과 비통이란 것이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장례식장으로 가면서,
    함께 가셨던 어느 목사님께서 먼저 간 그 녀석은 아주 못된 놈이라고 까지 표현을 하시더군요.

    화장을 하기 위하여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관을 밀어넣기 전에,
    관위에 엎드리어 흐느끼는 목사님을 보면서,
    우리들은 어떻게 이 절망과 무기력과 아픔을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도무지 인간의 말로는 위로할 수 없는 깊은 절망과 슬픔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우리들에게 지극한 절망과 실망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먼저 보낸 부모들은
    긴 시간동안, 그 아들을 먼저 보낸 것이 믿어지지 않아,
    슬퍼하며, 간혹 엉뚱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고들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난 현상 역시 깊은 절망과 좌절과 한숨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4:21을 보시면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 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라고 제자들이 하는 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라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랐노라라고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들은 주님과 더불어 가졌던 소망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더불어 이미 사라져 버렸으며,
    그것도 이미 사흘이나 지났다고 말함으로 얼마나 깊이 절망하고 있었는지를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앞에서 제자들은 소망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안식일이 지난 날 아침,
    몇 몇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게 됩니다.

    1. 믿음과 소망이 무너질 때에도, 사랑은 필요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날이 밝자마자, 아니 날이 밝기도 전에,
    이들이 주님의 무덤을 찾아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게 만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꾸어던 꿈도 사라지고,
    소망도 사라졌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이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소망과 믿음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실 것이란 예언의 말씀을 믿고 찾아 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하실 것이며, 이제 만날 수 있을 것이란 소망이 있어서 찾아 간 것도 아닙니다.

    믿음도 소망도 다 사라졌건만,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사랑,
    바로 그 사랑이 이들로 하여금,
    향품을 준비하여 주님의 시신이나마 다시 만나보고 위하여 찾아갔던 것입니다.
    새벽 날밝기를 기다려,
    일찍 무덤으로 찾아 갔던 것을 볼 때에,
    이들이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무덤에 있는 주님은 더 이상, 주님을 능력많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권세있는 하늘의 말씀으로 자신들을 위로해 주시던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를 향한 사랑은 이 모든 장애를 뚫고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게 만들어 주었고,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놀라운 소식을 제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들에게 모든 것이 다 끝난 것같은 절망적인 환경이 찾아온다고 해도,
    더 이상 믿고 기댈 곳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된다고 해도,
    우리의 믿음이 흔들이고, 소망이 없게 된다고 해도,
    주님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불씨가 되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게 하여 줍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말씀합니다.
    '믿음,소망,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사랑은 제일이라'
    그렇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믿음을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소망을 다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부활절에 우리들이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일 것입니다.
    이 사랑이 있을 때,
    우리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충만케 될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져 가고 있습니까?
    절망 가운데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주님을 향한 사람을 점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 모두에게 주님을 대한 사랑을 확인하므로,
    부활의 능력으로 믿음과 소망 역시 충만케 되는 은총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2. 빈무덤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요구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찾아간 무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빈무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흰옷입은 한청년은 말합니다.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게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첫 번 부활절 아침에, 여인들이 본 것은 빈무덤이었고,
    그들이 들었던 말씀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빈무덤의 증거와 흰옷입은 청년의 증언은
    보고 들은 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주님이 묻히셨었다고 하는 곳에는 빈무덤이 있습니다.
    세계 모든 종교는 그 종교창시자의 무덤이 있어서,
    그곳에 그의 시신이 묻혀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속은 비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을 찾아가시면 빈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증언을 오늘 본문인 마가에 의하면,
    흰옷입은 천사가 아닌, 흰옷입은 청년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천사라하지 않고, 청년이라고 했을까요?
    물론, 천사라고 능히 상상할 수 있도록 흰옷을 입었다고 하지만,
    역시 천사라기 보다는 인간의 모습이었음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이것은 주님의 부활소식은 천사의 모습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오늘까지도, 인간의 입술을 통해서 증거되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할하셨다는 부활의 좋은 소식은 천사들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입술로, 전도라는 방법을 통해서,
    증거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 부활절날 빈무덤에서, 부활의 소식을 들었던 여인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 빈무덤을 보고, 여러 말씀 증거자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듣는 것이나,
    다를바가 없다는 점입니다.

    빈무덤과 한 청년에 의한 부활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 여인들이나, 혹은 당시의 제자들이나,
    또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나
    모두 다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소식을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 이하를 보시면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들을 찾아 가셨는데,
    예수님에게 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으니라'

    이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현장을 떠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빈무덤에 관한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들은 바에 대한 믿음도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듣는 것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제자들의 믿음을 나무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다음 귀절인 11절에서도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며,
    13절 하반절에서도 '...믿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14절 하반절에도 '...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6절 '믿고 세례를 받는자'
    17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다르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후의 기록들을 살펴 볼 때,
    주님의 부활하심에 관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냐한 것을 새삼 알 수 있게 됩니다.

    부활절의 기쁨과 능력, 주의 은총은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절에는 빈무덤과 부활의 소식을 듣는 모든이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고 해도,
    볼 수 없을 것이며,
    보았다고 해도, 결코 부활의 능력과 기쁨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오늘 부활의 능력과 은총을 능히 체험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3. 빈무덤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줍니다.
    빈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흰옷입은 청년은  주님께서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만날 것이란 소식을 전해 줍니다.

    현재 제자들이 절망에 빠졌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는 사실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활절 아침에 들려온 소식은
    주님과 늘 함께 거닐었던 그 갈릴리에서
    이제 곧 만날 것이란 소망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우리들에게 들여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고,
    이제 곧 만날 수 있으며,
    우리들이 언제나 걷고 함께 이야기하던 바로 그 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만큼 제자들에게 용기와 기쁨을 주는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절 아침에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바로 소망입니다.
    죽음을 이겼다는 소망의 메시지가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절 아침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죽음마져도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즉, 죽음이 우리를 절망케 할 수 없다면,
    그 무엇이 우리를 절망케 하겠습니까?

    저는 서두에서 지난 금요일에 있었던 참으로 참담한 장례식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허무하고 어처구니없게 아들을 먼저 보낸
    목사님 내외분에게 참으로 소망이 있다면,
    이제라도 그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앞에선 인간에게 최고의 소망이 있다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믿음에는 반드시 소망이 따라오게 됩니다.
    절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믿음이 생기면서,
    저들에게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죽음과 고난도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됩니다.
    죽어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과거의 종교가 아니며, 무덤의 종교도 아닙니다.
    현재의 종교요,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을 소망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무덤을 떠나야합니다.
    죽음도 떠나야 합니다.
    절망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며,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시고,
    그 사랑에서 출발된 믿음과 소망으로 풍성한 부활의 신앙생활이 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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