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시나리오(막 16:1~11)
  • 조회 수: 291, 2013.02.08 20:50:41
  • 여러분은 사람과의 '약속'을 믿습니까?  "틀림없지?"하고 되물으면 "아 글쎄 걱정 말어. 틀림없어." "정확한 거지?" 하고 다시 물으면 "아! 이 사람 속아만 살았나! 틀림없다니까, 글쎄." 이렇게 까지 장담을 해 놓고서 결국엔 그 틀림없다던 일이 잘 안되면 '사람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하면서 슬쩍 발을 뺀다.

     아마 이 자리에도 철썩 같이 믿고 맡겼다가 손해보고 이용당했던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습니까? 사람을 믿습니까? 물질(돈)을 믿습니까?

     절대 불변의 것을 우리는 진리라고 하고 그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절대 불변의 자리에 엉뚱한 내용들이 자리잡고 있으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는다니.. 여러분, 사람을 믿을 수 있습니까?  나 자신도 나를 장담할 수 없는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철석같이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물질을 믿습니까? 지금 내 손 안에 있으면 그것은 틀림없는 내 것입니까?

     지난주 중 미국 나스닥인 주식시장이 폭락을 하니까 우리 나라 주가가 엄청나게 폭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집은 주식변동 상황은 꼭 봐야 하는데 우리 막내가 그 시간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 음악에 온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취미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 주식시장 변화를 보고 기다려 줘야 한다. 7살, 5살된 아이들은 이제 그 시간되면 "오늘은 좀 올랐어?" 하고 묻기까지 되었습니다.

     우리가 뭘 알겠는가? 하지만 지난주 중 주식폭락 때 세계제일의 갑부인 빌게이츠라는 사람은 재산 가치가 하루사이에 엄청나게 떨어져 버렸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나라 소위 벤처 재벌이라는 사람들도 반 이상 재산을 날리는 고난을 맛보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질 줄 저들이 알았으면 가만히 앉아서 손해만 보고 있었겠습니까?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변수들을....'  어디서 무슨 일이 터져도 '손해도 보고' '직장도 위태로워지고' '빚더미에 앉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IMF라는 커다란 돌발 사태를 경험해본 사람들이라 이런 사태들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는가 하면 "확실한 건 하나도 없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뜻밖의(생각지도 못했던) 돌발 상황"으로 더 나빠질 수도 있고 반대로 더 좋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젠 "얼마든지 놀랄 준비가 되어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 틀림없다고 장담할 일이 세상에 있습니까? "이건 된다"거나, "이건 안 된다" 고 단정할 만한 일이 세상에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기정 사실로 알고 있는 일(단정적으로 생각하며 "확실하다"고 하는 일) 바로 그 일을 뛰어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신앙적인 안목"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그 죽음을 확인한 많은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막15장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 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했을 때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예수가 완전히 죽었는지 확인한 후에 그 시체를 내어 주도록 하였습니다. (막15:43∼44)

     이러한 지시는 철저하게 명령받은 대로 지켜졌습니다. 그리하여 아리마대 요셉은 세마포로 예수를 지고 바위를 파낸 무덤에 넣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으며 이대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미니 마리아가 그 무덤을 확인하였습니다. (막15:45∼46)

     바로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내용의 바로 앞 장면입니다. 이 상황들 속에서 여기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고 만지고 듣고 확인한 일들을 토대로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몇 가지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예수는 죽었다.  틀림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저들이 생각한 예수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은 아니었다.

    저들에게 있어서 "죽었다"는 것은 곧 "다 끝났다." "이젠 소망이 없나"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저들이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 현실이었다. 그 다음은 "그 무덤에 예수의 시체가 있다"고 자신 있게 증인이 될 만큼 확실한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죽음"에 대한 믿음이 "부활"에 대한 믿음 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불행"에 대한 믿음이 "소망"에 대한 믿음 보다 훨씬 앞질러 가고 있는게 우리의 현실임을 아십니까?

     어린 두 형제가 꽃을 심으면서 나눈 대화입니다.  형, "나는 꽃씨를 심을 때 기분이 안 좋아! 마치 사람을 무덤에 묻는 것 같거든?" 동생, "형,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는 이 씨앗이 싹을 키우고 꽃을 피우게 될 날을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아"

     여러분, 우린 불행을 먼저 떠올리는 습성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되어지는 상황들 속에서 "기정사실"로 보나마나 확실히 그렇게 되게 되어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까? 지금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고 무덤을 찾는 여인들에게 있어서 "기정사실"은 예수의 죽음이요, 그 시신의 위치가 바로 이 무덤 속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혹시 '안 죽었을지도 몰라'라거나 '혹시 부활하셨을지 모르니 한번 가보자' 하는 정도였다면 향품을 들고 거기가지 가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정사실"로 여기고 찾아온 무덤에 틀림없이 있어야 할 예수의 시신은 보이질 않았다. 한꺼번에 자기들이 확신하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틀림없다'고 믿는 내용 중 실제로 정말 그렇게 된 것과 실제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풀려간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많습니까?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다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생들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수많은 변수(즉, 잘될 수도 있고 더 안될 수도 있는)가운데 "더 안될 수도 있는 쪽으로" 더 마음을 두고 그렇게 될 것을 미리 마음에 각오하고 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여러분, 경제 한파가 닥쳐왔을 때 우리들에게 닥쳐온 증상들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당혹감과 좌절감이었습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사태로 낭패를 당하게 되니 미처 현실을 수용할 만한 마음 준비, 환경 준비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만큼이나 정신적인 충격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보다 못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 인생을 포기해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공허한 상실감 그리고 실망감과 허무함이었습니다. 각자가 세워 놓았던 인생의 목표가 다 구름처럼 사라지고 계획표가 다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 동안 쌓아 올렸던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보며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막연함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처음에 인정 사정없이 차갑기만한 현실 앞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더니 나중엔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은 결국 "틀림없을 줄로만 알았던" 내 시나리오가 '하나님의 시나리오' 앞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릴 때 나타나는 증상인 것입니다. 또한 이 증상은 "예수님이 뭔가 큰일을 내 주실 줄 믿고 따르다가 그분이 십자가 죽음을 보았던 무리들에게 나타났던 증상" 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 지금 이 순간 내가 멋지게 써 내려가던 시나리오가 차근차근 잘 진행되어가다가 뜻밖의 하나님의 시나리오 앞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매우 당황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무덤 앞에 자기들이 예수를 위해 뭔가 해 드릴려고 갔던 여인들의 모습은 (그들의 놀라고 당황하는 모습, 자기들의 전제(기정사실로 여기던)가 무너진 것에 놀란 모습) 지금 우리와 비슷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저들은 죽으신 예수님. 이젠 우릴 위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예수님. 이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신 예수님께 향품을 드리러 갔습니까?

     제 생각에 이젠 예수님이 날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내가 알아서 결정하고 결정을 내렸을 때 바로 그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뭔가 큰일을 행하고 계셨음을 잊지 말았음 하는 것입니다.

     죽으신 예수님을 위하여 뭔가 해 드리기를 작정하고 무덤으로 가던 여인들은 안식 후 첫날 새벽 일찍 부지런히 서둘러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향품을 발라드려야 겠다는 생각만 갖고 가던 저들에게 낭패스런 일이 떠올랐습니다. "가긴 가는데 가서 우리가 무슨 힘으로 그 무겁고 큰 돌을 굴릴까?"하는 걱정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 뜻밖의 사건을 만나고도 그저 '참 다행이야'하는 정도로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열린 그 무덤에 들어가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당연히 죽은 시신은 거기 있어야 했고 당연히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들은 예수의 시신이 이 곳에 장사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생겼습니다.

     "거기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지금 이 일련의 사건들은 이 여인들이 무덤을 향해 출발할 때 '기정사실'로 예견했던 바와 크게 다르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의 대전제, 즉 기정사실로 여겼던 것은 "예수의 죽음"이었다. 즉 "죽음"으로 모든 게 다 끝났다고 단정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현장에서 확인한 진정한 기정사실은 "예수의 부활" 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일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예수께서 부활하신 순간에도 이 여인들은 예수가 여전히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급히 단정하고 먼저 낙심, 좌절, 자포자기하고 있는 그 순간,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결국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틀렸다고 단정하고 있는 '기정사실'(그것이 "이건 된다"든지, "이건 틀렸다"든지)은 지금 하나님이 하시고 계신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감정의 기복으로 모든 걸 내 맡기고 소망을 품었다가 또다시 낙심하고 상황에 따라 "살았다", "죽었다"를 반복하고 있을 그 때에도 우리 주님은 우릴 살릴 길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릴 살릴 길을 찾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사실 예수님은 당대의 최고인기를 한 몸에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뭔가 '놀라운 바람'을 일으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상상치 못했던 "부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놀랍고 신비하고 뜻밖에 벌어진 상황"으로 그려지고 있을까요? 저들이 하나님의 시나리오를  볼 수없고 오로지 내 시나리오 내 판단에 비추어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게 "뜻밖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16:10을 보면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부활"을 기정 사실로 그토록 누차 가르치셨건만 그들 역시 부활신앙보다 절망 신앙, 좌절 신앙, 죽은 신앙이 더욱 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이 "낙심"하고 있었다면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은 그래도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이 현실에 접근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들 역시 "예수님의 죽음"을 기정 사실로 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위해 마지막 헌신을 준비하였다가 그 뜻밖의 부활로 말미암아 크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모든 것의 마지막"(즉, 소망 없는 상태)로 보고 '낙심'과 '놀람'과 '두려움'으로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분들에게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기정사실은 무엇입니까? "완전히 망했다. 다 틀렸다. 이젠 죽음이다."라는 것입니까? 물어 보나마나 뻔할 일입니까?

     '죽음' 이라는 '고정관념', 실패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뜻밖의 부활"을 하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들이 '이젠 다 틀렸다'고 한숨 쉬고 있을 때 나는 이미 다시 살아야 있었다."

     이 여인들의 난관은 두 가지였습니다.

     "돌로 가로막힌 무덤은 누가 열어 주나?"였습니다. 그러나 돌은 굴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빈 무덤, 이건 어찌 된 일인가?"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소식을 행해준 천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지금 이 좌절과 낙심의 현실 앞에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십시오!"

     목욕탕가면 똑같은 온도의 탕 안에 아이는 발을 담구었다가 '앗 뜨거워' 하며 기겁을 하고 어른은 '어! 시원하다'하고 앉아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같은 온도를 놓고 아이는 견딜 각오가 되어 있질 못하고, 어른은 '뜨거운 게 보약이다'하고 들어앉아 있으니까, 견딜 만도 하고 노래도 나오고 '시원하다'고 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지금 계속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나리오를 못 보았지만 그 결론은 알고 있습니다. 결론은 "부활"이며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그걸 알고 있는데 못 견딜게 없고 당황할 것도 없습니다. "시원하다" 하며 이 뜨거움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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