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과 계시 (막16:9-16)
  • 조회 수: 240, 2013.02.08 20:51:42
  •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무덤이 없는 종교이다. 더 나아가서 무덤을 정복한 종교이다. 온갖 종교들은 무덤을 장식하고 성역화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무덤과 거리가 먼 종교이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보이신다. 그 말씀은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셨다. 그의 탄생과 그의 역사가 그러하고 그의
    고난과 그의 부활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부활이 주는 계시는 무었인가 알아 보자.

    1. 하나님의 능력의 계시이다. (9)
       아무리 예수가 그리스도여도 죽고 살아나지 못했다면 세속 종교의 범주를 넘지 못하였을 것이다. 모든 종교의 교주는 죽어 다시 살지를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 하여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끝이라고 하였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은 의심 받을수 밖에 없었으리라.
       예수께서 살아나지 않았으면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부활의 소망을 갖지를 못하였을 것이며 영원히 무덤속에 남아 있어야 하는 종말을 고할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예수를 그의 능력으로 살리셨다. 하나님의 능력은 못하시는 것이 없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은 믿고 예수 안에 있는 자들도 사리신다는 확증을 계시하신 것이다. 부활에 동참하는
    성도는 사망의 그늘의 생활을 청산하고 삶에 빛아래서 살아야 한다.
       어거스틴은 인생의 황금기를 어둠의 그늘에서 살았다 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펼때 그의 가슴은 갈라 졌다고 한다."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 는 말
    씀에 회개 하였다 한다.
       그는 사망과 흑암의 인생을 벗고 부활과 생명의 인생을 옷 입게 되었다.
       오늘의 성도는 어느 옷을 입고 살아가는가? 무덤과 스올의 그림자를 벗고 이제 그만 찬란한 부활의 옷을 입자. 그리고 썩어 냄새나는 행위 일랑 그만두자. 해골들의 광란도 그치자. 어차피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할테니까.

    2. 사랑의 계시이다.(9)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에일곱 귀신을 쫓아 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 주셨다.
       인간의 사랑은 사랑할만한 자를 찾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하지 못할 자를 찾아 그 큰 사랑을 베푸신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할 만한 가치를 갖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죄인이요 사람
    에게 불윤자요 육신으로는 일곱 귀신이 점령해 버린 귀신의 합숙소여서 음울하고 혐오감을 자아내게 하는 자였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자를 먼저 찾아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자가 누구냐? 너와 내가 아니냐. 하나님께 죄인인 우리가 아니냐? 성령의 열매는 커녕 오히려 악한 열매를 맺아 독을 풍기기를 일삼는 거룩하여 질것이 없다는 우리가 아니냐. 주
    의 그 큰 사랑이 우리를 찾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할때 그 발아래 엎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야 한다. 사랑은 받기는 쉬우나 베풀기는 쉽지 않고 받으려는 사람은 많으나 받게 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랑하지 아니하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므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니라고 바울도 말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고 나아가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대접을 받기 보다는 대접하는 사람이 되고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하며 사랑으로 종노릇을 하여야 하되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반신불수가 있고 중풍병자가 있는가하면 미워하는 일에는 그림자 처럼 나타나면서 사랑하는 일에는 꼬리를 감추기를 빨리하는 사람이 많으니 탈이다.

    3. 위로의 계시이다.(10)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슬픔과 탄식이 있다. 주께서 세번이나 예고를 하셨으나 못 믿었고 듣고도 믿지를 않았(11)을 뿐 아니라 고하
    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였다(13)
      믿지 못한 자에게 탄식이 있다. 부활을 못믿었던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게 가슴을 찢어내는  단장의 눈물이 있었듯이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비애가 강물되어 앞을 가로 막는다.
      하지만 믿은 자에게는 기쁨과 위로가 넘치게 된다. 그래서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이 변하여 나의 노래가 되어진다.
      사랑하는 식구를 먼저 하나님께로 보내는 아픔 중에도 주 앞에서 다시 만난다는 믿음이 더큰 은혜로 감싸주게 마련이다. 이같은 위로를 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이세상의 삶이 모두일수 밖에 없기에 내
    일이 없는 하루살이 인생을 목표없이 아귀다툼하며 살수 밖에 없다.
      내일에 사는 사람은 오늘이 힘들고 어려워도 내일 아침에 받을 위로를 생각하면서 믿음의 목표를 정하고 경건히 살아가려는 것이다.
      주 안에서 우는 자에게 위로가 있다. 주님의 부할은 모든 석별의 아픔은 아물고 이별의 장벽은 헐리게 될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강림하실때 주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 남은 자도 구름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만나게 될것이므로 서로 위로하라고 바울 사도도 말씀하였다.
      잠시 눈에 보이는 위로를 원함보다 영원한 위로를 사모하자 그럴려면 부활의 주님을 믿자. 위로의 계시를 받아드리자. 그리하여 위로의 축복을 받자.

    4.  사명의 계시이다(15)
       전도 초기에 외치신 복음을 전파하라신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음을 증거하라심이었다. 백성들은 약속된 메시야 왕이 오시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왕되신 주님이 오셨으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온 것이었다.
      하지만 부활후에 부탁하신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라신 말씀이다. 즉 세상의 모든 왕들은 원수를 물리치고 그의 백성들을 평안히 살수 있도록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나 만민의 원수인 죽음 만은 정복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을 정복하여 죽음으로 부터 그의 백성을 해방시키신 만왕의 왕임을 전하라 하심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부활의 복음을 가는 곳마다 전하였다. 역사 이래로 다시 사는 길을 전하는 도는 없었다.
      사망은 아릿다운 아녀자를 과부로 만들어 애끓는 눈물을 자아 내게하고 철어린 아이들에게서 부모를 앗아가므로 고아가 되게 하여 거리를 헤매게 한다. 다정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 넣는 것이 사망이다.
      부활의 도를 전파함은 믿은자의 절대적인 사명이다. 이 복음을 전파하여 우는 자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어야 한다.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여 새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믿는자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귀한 선물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주는 자로 하여금 보람을 가지게 한다.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었일가. 그것은 바로 부활의 도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전하자. 여기 부활의 도가 있다고.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고 부활의 소망중에 잠들게하자.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을 모시고 계시하신 그 의미를 알므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겠다.
       그리고 이복음을 전하여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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