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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보김이 나옵니다. 이 보김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합니까? 2절에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이 메시지에서는 질책성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크게 두 가지입니다. 내가 너희를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면서 거기에 사는 모든 족속을 다 멸하고 쫓아내라고 했는데 왜 내 말을 거역하고 온전히 내쫓지 않고 그들의 제단을 헐지 않았나,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왜 잊었나? 하는 강한 질책이 있었습니다. 1장을 끝까지 읽어보면 각 지파별로 가나안 족속들을 다 멸하지 않고 살려두고 노예로 부려먹고...하는 모습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질책을 하면서 그들이 행한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면 3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너희들이 나를 신뢰하지 않고 내 말을 의지하지 않았으니까 나도 그들을 쫓아내지 않겠다. 그들이 지금은 너희에게 유익을 주는 존재로 보이지만 앞으로 그 가나안 족속들이 역사 속에 오고 오는 후손들의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다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던지십니다. 이건 기분상의 문제를 넘어서서 어마어마한 재앙인데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백성들이 크게 울었더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가나안 땅에 대하여 하나님이 격려하고, 좋은 말씀을 해 주고, 항상 함께 하겠다, 너희로 이기게 하겠다... 이렇게 했는데 이제 하나님의 입에서 아주 쌀쌀하고도 냉정한 말씀이 쏟아지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이 좋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울었다 그랬습니다. ‘보김’은 히브리음 ‘보킴’과 비슷한데 ‘보김’은 ‘우는 자들’이라는 듯입니다.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었던지 지명이 바뀔 정도로 울었습니다. 원래는 지명이 보킴이 아니었는데 별명이 붙여져서 이름처럼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 행동을 하였는데... 첫째, 그 하나님의 준엄한 메시지를 듣고 많이 울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두 번째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만 딱 놓고 보면 그림이 좋습니다. 회개했나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회개라고 설명하지 않고... 그냥 울었고 또 한 번의 제사를 드린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종교행위만 심화시킨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감성에 기초한 신앙의 위험성이 이런 것입니다. 성도들이 울 수 있지만 마음이 아파서 자책감에 회개차원에서 울 수 있지만 변화가 없는 감정적인 차원에서 그칩니다. 부흥회 때 꼭 회개의 밤이 있어서 한 바탕 시원하게 울고 나면 정서적인 카타르시스가 되고, 내 신앙이 한 차원 높아진 것 같은..... 그러나 이것은 속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바탕 울고 그걸로 끝났습니다. 이후에 3장, 4장, 5장, 20장 연속적으로 넘어지는 실패를 만나고... 그렇게 해서 20장에서도 또 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감정의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 감정이 지성과 의지와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지적인 신앙이어서 좀 메마르다고 할까요? 또 어떤 사람은 지성이 결핍되어 꼭 정신 나간 사람 같기도 해요. 적절한 행동이 따르지 않는 감정은 꼭 사기꾼을 보는 것 같아요. 성령의 감동으로 나타나는 감성은 지성과 행동 간에 적절한 좌화를 이루고 그 결과 삶에 놀라운 결과를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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