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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4. 지란지교를 꿈꾸며(사무엘상 18:1-9)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 조회 수: 390, 2017.12.27 16:00:13

  • 수필가 유안진씨가 ‘지란지교를 꿈꾸며...’ 라는 수필집을 내어 크게 히트를 친 적이 있습니다. 진실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를 구하는 내용의 수필입니다. 이 한 권의 책에 현대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사람들이 진실된 친구의 우정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이 책 중에 이런 글이 있어요.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정말 우리가 이런 친구를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과 요나단은 이런 지란지교를 꿈꾸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가 된 것은 그만큼 요나단이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과 다윗, 요나단의 관계를 보면 좀 묘합니다. 사실 보편적으로 보면 사울과 다윗이 더 깊은 사이가 되고, 다윗과 요나단은 정적의 관계가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울은 이미 왕이기 때문에 유능하고 충성을 다하는 신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겸손하고 순수한 청년입니다. 절대로 주인을 배신할 그런 인물이 아니죠.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다윗은 한 번도 사울을 죽일 마음이 없었어요. 만약 사울이 전쟁에서 죽지 않고 자연사 하였다면 그때까지 다윗은 사울을 왕으로 모셨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신하였습니다. 인물을 알아보는 왕이라면 그를 정말 신하로서 아꼈을 것입니다. 아들처럼 대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울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전쟁을 마치고 성으로 돌아오는데 여인들이 왕과 군사들을 환영하는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라는 노래를 들을 때에 그만 사울이 다윗을 향한 질투와 시기심으로 뒤집어졌습니다. 이 순간에 사울 안에 강한 시기심, 경쟁심이 사람 보는 눈을 망쳐버리고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자기의 정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어떻습니까? 요나단은 순서상 그의 아버지를 이어서 왕이 될 세자입니다. 그는 용맹도, 지혜도 있는 왕자죠. 그런데 다윗이 그의 아버지 사울과 비견할만한 인물로 백성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사울이야 이미 왕이니까 죽을 때까지 법적으로 보장되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의 아버지 사후에 다윗의 존재가 요나단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요나단이야말로 정말 다윗을 질투하고 시기해야 정당한 거죠.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요나단의 인물됨을 보면 그는 신앙이 있고, 또 정신적으로 굉장히 순수한 인물입니다. 그는 사람과의 관계를 순수하게 보는 아름다운 영혼이 있어요. 그러니까 원수라도 될 다윗을 그렇게 사랑하여 권위의 상징인 그의 겉옷과 무기까지 우정의 선물로 줍니다. 그리고 마치 연인처럼 다윗을 사랑하였다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못된 사람들은 이걸 두고 요나단이 다윗에게 동성애 감정을 품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보는 것은 그 사람이야말로 그 영혼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진실한 우정을 그렇게 왜곡 되게 보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람 간에 진실된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복은 시기심과 질투... 이런 병적이고, 마귀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결단코 누리지 못할 복입니다. 오늘날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얼마나 시기심과 질투를 뿌려 되는지 몰라요. 그러니 사람을 만나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 갈등과 스트레스의 근원이 되는 거예요. 교회에도 성도들이 그렇게 갈등을 겪는 것은 묘한 경쟁심리, 질투, 갈등.... 이런 마귀적인 성품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해지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요나단처럼 왕자의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주님처럼 죽기까지 낮아지면 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이런 직분 다 벗어버리고 신앙의 자리로 돌아가면 됩니다. 사람들이 그래요.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초신자로서 막 말씀을 알아가고 은혜를 받을 때라고 합니다. 그 때에는 직분도 없어서 교회에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을 때죠. 그러나 직분이 높을수록 교회에서 큰 소리를 내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교회를 잘 섬기라고 받은 직분 때문에 우리가 불행해지는 겁니다. 사울처럼 자기 것을 움켜지려는 사람은 언제나 사람과 갈등을 야기합니다. 그러나 요나단처럼 왕자의 옷마져 벗어버리면 거기서 친구를 얻고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벗어버리고, 버리는 가운데서 복이 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복을 누리는 여러분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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