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촌년은 떠나갑니다.
  • 2012.12.25 13:58:29
  • 여자 홀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며 판사 아들을 키워낸 노모는 밥을 한 끼 굶어도 배가 부른 것 같고 잠을 청하다가도 아들 생각에 가슴 뿌듯함과 오뉴월 폭염의 힘든 농사일에도 흥겨운 콧노래가 나는 등 세상을 다 얻은 듯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이런 노모는 한해동안 지은 농사 걷이를 이고 지고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한복판의 아들 집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재촉해 도착했으나 이날따라 아들만큼이나 귀하고 귀한 며느리가 집을 비우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판사이기도 하지만 부잣집 딸을 며느리로 둔 덕택에 촌로의 눈에 신기하기만 한 살림살이에 눈을 뗄 수 없어 집안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뜻밖의 물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물건은 바로 가계부였습니다.

    부잣집 딸이라 가계부 쓸 것을 생각도 못했는데 며느리가 쓰고 있는 가계부를 보고 감격을 하시며 그 안을 들여다보니 각종 세금이며 부식비, 의류비 등 촘촘히 써내려간 며느리의 살림살이에 또 한 번 감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목조목 나열한 지출 내용 가운데 어디에 썼는지 모를 '촌년10만원'이란 항목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무엇을 샀기에 이렇게 쓰여 있나 궁금증이 생겼으나 1년 12달 한 달도 빼놓지 않고 같은 날짜에 지출한 돈이 바로 물건을 산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용돈을 보내준 날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촌로는 머리속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아들에게 줄려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이고지고 간 한해 걷이를 주섬주섬 다시 싸서 마치 죄인 된 기분으로 도망치듯 아들의 집을 나와 시골길에 올랐습니다. 가슴이 터질듯한 기분과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분통을 속으로 삭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가운데 금지옥엽 판사 아들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어머니 왜 안주무시고 그냥 가셨어요”라는 아들의 말에는 빨리 귀향길에 오른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이 한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노모는 가슴에 품었던 폭탄을 터트리듯 “아니 왜! 촌년이 어디서 자-아”하며 소리를 지르자 아들은 "어머니 무슨 말씀을.."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노모는 “무슨 말, 나보고 묻지 말고 너의 방 책꽂이에 있는 가계부한테 물어봐라 그러면 잘 알것이다”며 수화기를 내팽개치듯 끊어 버렸습니다. 아들은 집에 와서 가계부를 펼쳐 보고 어머니의 역정이 무슨 이유에서 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내와 싸우자니 판사 집에서 큰 소리 난다고 소문이 날거고 때리자니 폭력이라 판사의 체면에 안되고 그렇다고 아이들 때문에 이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태 수습을 위한 대책 마련으로 몇날 며칠을 무척이나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 어느날 바쁘단 핑계로 아내의 친정 나들이를 뒤로 미루던 남편이 처갓집을 다녀오자는 말에 아내는 신바람이나 선물 보따리며 온갖 채비를 다한 가운데 친정 나들이 길 내내 입가에 즐거운 비명이 끊이질 않았고 그럴 때마다 남편의 마음은 더욱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처갓집에 도착해 아내와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모두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마당에 서있자 장모가 “아니 우리 판사 사위 왜 안 들어오는가” 사위가 장모에게 하는 말 “촌년 아들이 왔습니다. 촌년 아들이 감히 이런 부잣집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고는 차를 돌려 집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시어머니 촌년의 집에는 사돈 두 내외와 며느리가 납작 엎드려 죽을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며 빌었습니다. 이러 한 일이 있고 난 다음달부터 '촌년 10만원'은 온데간데 없고 '시어머님 용돈 50만원'이란 항목이 며느리의 가계부에 자리하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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