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기독교의 핵심 복음과 가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뺀다면 우리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십자가와 무관한 삶이라면 우리는 명목상의 크리스천은 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실제적인 크리스천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도 저는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데 오늘의 제목은 ‘십자가를 바라보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먼저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여류소설작가 미우라 아야꼬가 쓴 ‘양치는 언덕’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여주인공은 나오미라고 하는 목사의 딸인데 료오이찌라고 하는 바람둥이와 연애를 하게 되어 가출을 하여 몇 년을 동거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점점 생활이 힘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료오이찌가 폐병이 걸려서 나오미를 찾아 옵니다. 나오미는 맞아들일 마음이 없었지만 부모님들의 권유로 료오이찌를 받아드립니다. 처가 집에서 요양생활을 하다가 처가 집 식구들의 믿음의 감동을 받아 료오이찌도 예수를 영접하고 크리스천이 됩니다. 료오이찌는 요양생활을 하면서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크리스마스에 아내 나오미에게 줄 선물이라고 하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그림이 다 완성된 어느 날 크리스마스를 몇 일 앞두고 료오이찌는 죽습니다. 그가 남긴 그림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발 아래 청년 하나가 얼굴도 들지 못한 채 손으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 청년의 손 등으로 예수님의 피가 떨어지고 있는데 그 청년은 바로 료오이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 그림에는 마치 그 청년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예수님이 저의 죄 때문에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군요!’ 라고 하면서 통곡을 하는 듯한데 그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오열하는 청년의 손에 예수님의 피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미우라 아야꼬는 이 그림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합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이 나의 고통으로 다가올 때 우리도 예수님의 발 아래로 흐르는 그 피에 죄씻음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에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고난이 나의 죄와 상관이 있게 된다면 우리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이 차 오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고통인데, 내가 받아야 할 부끄러움인데..... 주님이 다 받으셨군요. 주님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마치 소설 속의 청년처럼 절규하며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그 십자가의 피는 나를 적시고, 나의 죄를 씻고, 나를 치료하는 피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우리는 소망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크게 낙심하여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밤마다 교회 강대상 앞에 엎드려 주님께 기도한다고 하는 말이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한 마디 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계를 보기 위해 핸드폰을 여는데 그 핸드폰에 깔려진 어플에서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는 무엇을 하기 원하느냐? 나는 너를 살리고, 일으키고, 구원할 수는 있지만 너가 죽겠다고 그렇게 앉아있으면 너를 도울 방법이 아무 것도 없구나! 이런 일 때문에 너가 죽고 망할 사람이었다면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지도 않았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후에도 힘든 일들은 계속 있었지만 그 깨달음 이전과 이후는 달랐습니다. 그와 깨달음 이전에는 그와 같은 상황이 저를 포기와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그 이후론 그와 똑같은 상황이 닥쳐와도 그런 절망의 자리에 빠지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다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언제나 소망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고 하는 철학자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면, 소망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주일에 저는 여러분에게 이 소망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외칩니다. 소망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이 소망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에서 일어서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대답을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절망 중에서, 질병 중에서, 죽음에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 너머로 보이는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힘든 상황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 혼자 속으로 ‘저런 인간도 하나님이 사랑하실까?’ 묻습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물론이지!” 힘들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을 내가 내 마음대로 미워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놀라운 일은 이런 깨달음이 일어난 뒤로는 사람 때문에 죽을 만큼 힘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사람 때문에 여전히 힘들어 하기는 해도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을 보니 아무리 미운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도 그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을 보게 되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우리 자신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모든 구체적인 삶에서 십자가가 상관이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번호 | 분류 | 제목 | 조회 |
---|---|---|---|
![]() | 공지사항 | 130097 | |
2098 |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 297 | |
2097 |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 460 | |
2096 |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 750 | |
2095 |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 297 | |
2094 |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 8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