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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스라 02:01-02. 64-67/ 믿음의 선택을 하자 [에스라]
  • 조회 수: 451, 2018.04.15 12:52:04
  •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지 선택하는 일상적인 선택이 있는가 하면, 결혼과 배우자의 문제, 직장과 사업의 문제등 특별히 신중을 기해야 하는 중요한 선택들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선택들은 우리들의 인생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지만, 특별한 선택들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특별하고 중요한 선택은 우리들의 인생가운데 오랜 시간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잘못된 선택은 오랜 시간 우리들을 괴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하고,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듯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고향땅으로 돌아오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에스라 2장은 고향 땅에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는지, 그 사람들의 가문과 이름과 숫자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택이,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합당한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선택의 중요성은 무엇이 있는지, 성도로서 어떠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는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1절과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1절에 보니깐 바벨론 왕때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 중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고, 2절에서는 이 귀환자들을 이끌고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중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귀환자들의 가장 높은 지도자였습니다. 스룹바벨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정치적인 지도자였고, 예수아는 대 제사장의 후손으로, 종교적 지도자였습니다.

     

    64절에 보면 그 숫자가 총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라고 나와 있고, 65절에서는 그들의 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도하에 오만여명이 되는 사람들이 1400km가 넘는 머나먼 길을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저번 시간에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중 일부만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에는 100명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바사왕 고레스가 자유를 주고, 그들에게 고향땅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응답에 필요한 것들을 도와줬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귀환한 자는 다수가 아닌 소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다수의 선택이 정당하고 바른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길, 믿음의 길은 좁은 길이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스룹바벨을 비롯하여 5만 여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좁은 길을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자신들에게 익숙하고 편한 삶의 터전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응답하신 거친 땅으로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어쩌면 이 일에 동참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하느냐? 꼭 거기에 가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지금까지 힘들게 일구어낸 삶의 터전을 버리고, 왜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서 힘들게 고생을 하느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은 원래 외롭고 고독한 길입니다. 믿음의 선택은 때론 고난과 환란을 감내해야 하기도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랬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 좁은 믿음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갔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선택을 하시고 있습니까? 세상과 타협하면서, 넓은 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좀 더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을 살다 보면 내 삶의 장에서 믿음 때문에 손해를 볼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린 그 때마다 슬쩍 타협하며 살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 계산적인 선택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택,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음으로 믿음의 선택을 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좁은 길을 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스룹바벨과 백성들의 믿음의 선택은 분명 힘들고 어려운 선택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선택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택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믿음의 선택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되고 선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는 선택을 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보면 귀환자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귀환자들의 숫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가문과 사람의 이름. 그리고 숫자가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포로생활 중에도 하나님의 백성 이라는 신분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머나먼 이방나라에 끌려와 포로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어떻게든 현지인들과 동화되어 살아보려고 노력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할아버지, 자신의 아버지의 조국을 잊어버리고, 나는 이 땅의 백성으로 살아가야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편하게, 조금 더 잘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가장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잠시 잠깐의 편안함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70년이라는 시간동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언젠가는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정체성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휸을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정체성의 혼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오긴 나오는데, 교회에서만 성도이고, 밖에 나가서는 성도가 아닌 삶을 살아갑니다.

     

     

    내가 참 성도인지, 아니면 불신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마치 우리의 소망이 하늘이 아니라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기도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인지, 아니면 불신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고 살아갑니다. 보이는 부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이 이미 세상에 오염되어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그 일을 감당 하기는 커녕, 앞장서서 세상과 동화되어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범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도, 환란 중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님의 제자임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세상적인 영광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5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밝힐 수 없었더라" 여기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중에 자신들의 족보와 가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61절과 62절에도 보면 그들이 원래 제사장인데, 그들이 어떠한 가문에 속해있는지 입증하지 못하는 사례가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히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가문 중요하였습니다.

     

    무엇보다 70년이라는 포로 생활 중에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뿔뿔히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소속과 가문을 모른다는 것은, 그들이 진짜 이스라엘 사람인지, 진짜 제사장인지 증명하고 밝힐 수 없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족보를 위조할 수도 있었고, 이방인인데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 나라에도 천민이나 평민이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성을 바꾸고, 조상을 바꿔 신분 상승의 기회로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문과 족보를 기억하는 것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가 그들의 가문과 족보를 온전히 밝히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이들은 포로생활 중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자각하며 살기보다는,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다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경우에 속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각합니다. 그러다가 10년, 20년, 30년 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점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다가 믿음의 가문과 족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는 삶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나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 그러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믿음의 가정과 가문이 무너지는 나 쁜 일을 경험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당대 신앙인들은 어떻게든 믿음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손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세상과 타협했던 모습 속에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오늘 이들은 처음에는 세상과 타협을 했지만 나중에 돌이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뒤늦게 라도 깨닫고 돌아온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일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가문과 족보가 정확하지 않아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교훈은 비록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 온다라고 할 지라도 하나님을 위한 여러 가지 기회들을 놓치거나 잃어버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 함에 있어서 우리가 많은 제약을 받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을 반드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정체성을 지키고, 끝까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선택을 했던 사람들을 기억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곳곳에 족보와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내용들이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성경은 이렇게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었을 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알고 계시다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족보와 사람이름들은 크게 두 가지 경우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았던 사람, 즉 믿음의 사람에 대한 족보와 이름들을 기록해 놓았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족보와 이름들을 기록해 놓았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삶을 다 알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살았는지, 어떤 사람이 불순종의 삶을 살았는지 모두 다 알고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책에 이들의 삶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그분의 책에 그들이 믿음대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과, 불순종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듯이 편안한 삶의 자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한체,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들처럼 우리의 삶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비록 이 땅에서 힘들고 어려움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책에 믿음의 자녀라고 그 이름이 기록 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도 않고, 세상과 타협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불순종의 사람이라고 그 이름이 기록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가장 크게 소망할 것중 하나는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믿음의 아들, 믿음의 딸, 나의 자녀인 누구누구' 우리의 이름을 이렇게 기억하시는 영광과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55절에서 58절을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이었더라' 느디님 사람들은 구약의 기브온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여호수아 시대 기브온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고, 그들과 화친한 유일한 이방 민족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이 되어서, 평생을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들 중 일부는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을 위해 일하는 종으로 선택하여, 제사장들에게 줍니다. 그래서 이들은 일평생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섬기면서 일하는 종이 되는데 그들이 바로 느디님 사라들 인 것입니다. 55절에 보면 솔로몬 신하의 자손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하는 높은 고위 관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전의 허드렛 일을 하는 종들을 자손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이방 땅에서 사는 것이 더욱 편리하고 좋았을 것입니다. 이 방 땅에서 그들은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면서, 자신의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자유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성전의 재건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로 결심을 합니다. 이들이 돌아와서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성전의 허드렛 일이 아니겠습니까? 종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성전에서 종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좋다라고 여겼습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가난하고 어려운 삶이 더욱 좋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줍니까? 저와 여러분 같으면 이러한 결심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귀하게 보십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선택을 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이름이 기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불순종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생명책이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기를 소망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우리의 삶과 선택이 바로 이 중요하고도 영원한 일을 결정한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의 선택, 희생과 헌신의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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