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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스라 09:01-15/ 은혜를 받기 위해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에스라]
  • 조회 수: 487, 2018.04.15 13:05:39
  •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역사는 죄의 역사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최조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이후로부터 인간의 역사 중에 단 한번이라도 죄가 없었던 시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경고하시고, 때로는 징계와 심판을 내려도, 죄는 근절되지 않고 여전히 계속 인간들 사이에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외면하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자신들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교만과 불순종의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죄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인간의 이러한 죄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라가 머나먼 바사제국에서부터 왕의 명령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바사제국에서 출발하여 3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걸어서 마침되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왕의 권한을 위임받아,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여 예루살렘을 정비하였습니다. 그리고 학자이자 선지자였던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일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에스라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 여자들과 결혼했다라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것도 한 두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렇게 했고, 심지어는 백성들의 지도자들까지도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1절에서 나오는 여러 민족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근처에 살았던 이방민족들이 있었습니다. 이 이방민족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우상을 숭배했던 불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백성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이러한 이방사람들과 결혼을 하면 안된다라는 법규가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지 않은 이방 백성들과 결혼을 한다면, 그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11절과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 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우리는 학개서를 공부할 때 죄의 전염성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의로운 것, 선한 것은 전염성이 적은 바년 죄악된 것은 전염성이 매우 강합니다. 의로운 것, 선한 것은 악한 것들을 변화시키기 쉽지 않는 반면, 악한 것은 의로운 것들을 쉽게 변질시킵니다. 이것이 죄의 무서운 전염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백성들과 결혼을 해서 이방 백성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이방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시킬 경우가 훨씬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도,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에는 언제나 이방백성들과의 결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백성들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이방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가증하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런 가증한 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일에 모범을 지도자들이 더욱 앞장섰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에스라는 기가 막혔습니다. 에스라는 그동안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 나라가 망하고,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왔던 이유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리켜서 다시는 이러한 범죄를 하나님 앞에 저지르지 않게 해야 한다라는 거룩한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소망을 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있지 않아 이러한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베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죄의 전염성과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병이 독감(인플루엔자) 입니다. 오래전 조류 독감과 사스 때문에 전 세계가 두려움에 떤적이 있었고,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신종플루가 유행해서 큰 곤욕을 치룬 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독감들이 위험한 것은 한번 걸리면 잘 낫지 않을뿐더러, 자칫 잘못 하면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치명적인 전염병들은 사람들에게 쉽게 옮겨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염병보다 죄라는 것은 훨씬 더 무섭습니다. 전염병은 우리의 육신을 공격하지만 죄는 우리의 영혼을 공격합니다. 죄라는 전염병은 모든 인간들 속에 빠르게 확산시켜 많은 영혼들을 사망에 이르게 만듭니다. 에스라 시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죄에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범죄하여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 온 것을 망각했습니다. 자신들도 얼마 전까지 만해도 포로생활을 했던 것을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에스라가 고백합니다. ‘우리가 얼마전가지 만해도 우리 조상과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고 징계를 받지 않았는가? 그런데 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범죄를 저질렀구나’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깨닫고 회개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잠시 이 모든 것을 잊어먹고,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고, 오늘날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렇게도 하나님 앞에 징계와 심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죄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낙담하게 됩니다.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얼마나 이일이 에스라에게 충격이었는지, 에스라는 속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고 기가 막혀 주저앉아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우리의 지혜와 노력으로는 도저히 이 자리를 뚫고 나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라처럼 우리는 낙심하고 주저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에스라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3절과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에스라는 기가 막혀 낙심하고 있던 하루 종일 주저 앉아있었습니다. 그만큼 죄에 대한 문제가 에스라를 낙심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에스라는 이러한 낙심가운데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오늘 이러한 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면 간구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나아갔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훌륭했고 능력 있었고 힘이 있었던 믿음의 조상들도 모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다윗도, 엘리야도, 베드로도 심지어 예수님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다라면 우리들은 당연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히 하나님만 찾고 그분께 간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간구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어떻게 간구하며 하나님을 붙잡았습니까?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붙잡을 때 가장 중요한 태도는 나의 연약한 모습, 나의 죄된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죄된 모습을 발견할 때 취하는 태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는 화를 내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화를 내며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도 없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죄된 모습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께 도움을 청할 때, 용서를 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오늘 에스라처럼 말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의 죄악된 모습을 보며 낙심하였습니다. 과거 지었던 죄를 반복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기가막혀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하지만 에스라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자신들의 솔직한 모습을 고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히 얼굴을 들 수 없는 악한 죄인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우리 세상 사람을 보면서‘저 사람은 정말 착한 사람인데, 저 사람이 참 괜찮은 사람인데...정말 예수님만 믿으면 참 좋을텐데..라고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전해도 듣지 않고 예수님도 믿지 않습니다. 복음의 중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그 죄 때문에 지옥 가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죄인들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와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착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어야할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볼 때, 자신들이 착하게 살기 때문에, 죄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착하지 못한 사람, 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래도 이 사람들 보다 더 잘 받아들이고 믿습니다. 실제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 신앙인들 중에 세상적으로 착한 사람보다 착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참으로 희한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많다라는 사실을 알고,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하심, 예수님이 필요하다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리새인과 새리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선한 행동이 필요없지만, 그래도 구원받은 사람은 성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 많은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주님을 더 찾는 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앞에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완벽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과 죄 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인정했던 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며,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처음 젊은 시절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교만했습니다. 그도 처음에 자신의 선한 행동, 선한 헌신, 선한 공로를 의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30: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라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밧세바로 인해 죄를 범한 후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중에 그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도망칠 때, 원수들이 자신을 저주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때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삼하16장10절) “하나님께서 나를 저주케 하신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한 범죄 때문임을 알고, 이 고난을 담담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다윗은 이후로도 자신의 죄인 됨을 기억하면서,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죄인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문제는 성도들이 자신이 죄인된 상태를 망각했다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강단과 설교에도 죄인를 깨닫게 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냥 위로와 평안만 전하는 메시지로 변질된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 평안과 위로를 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의 죄 된 자각이 없이 얻는 평안과 위로는 거짓 위로요, 잘못된 평안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지 않았는데, 하나님께 내 죄를 회개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께 우리는 참된 평안과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나의 연약함, 죄된 모습을 깨닫게 하시고, 그 다음 회개를 통해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다라는 사실, 내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자녀였다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에스라도 그랬습니다. 자신들의 죄 된 모습을 발견하고, 솔직히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희가 죄인입니다.

     

    저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가장 악한 사람들입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받아도 할말이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의 참된 자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된 모습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용서의 은혜와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성막에가서 짐승을 잡아야만 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소나 양을 가지고 성막에 있는 제사장을 찾아가서 짐승을 화목제물로 받쳐야만 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구나 심판을 받아 죽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허락하셔서, 죄 많은 인간이 죄를 용서받을 길을 열어두셨습니다.

     

    성막에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짐승을 번제물로 받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짐승을 죽일 때마다, ‘아 원래 내가 이 짐승처럼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 하는데, 내가 죄인인데, 저 짐승이 죽는구나, 다시는 하나님 앞에 내가 죄를 지으면 안되겠구나’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형식적으로만 화목제와 번제물을 받쳤습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그냥 짐승을 죽이면 되는구나 라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성막과 제사는 이처럼 일시적이고, 잠시동안만 죄문제를 해결해주었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워주지 못하고, 죄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초월적인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본질적인 해결하고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해야만 이 초월적인 존재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위해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의 사역으로, 그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우리는 죄의 전염성에서, 죄의 문제에서, 죄가 주는 사망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과거 에스라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낙담한 자신을 다시 일으켜세우기 위해서, 무릎 꿇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붙잡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에스라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힙입어, 그분의 십자가 대속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 예수그리스도를 붙잡으시겠습니까? 죄용서함과 그분의 은혜의 도우심을 구하시겠습니까? 그렇다라면 먼저 에스라처럼 우리의 죄된 모습을 솔직히 고백하시고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에스라처럼 ‘우리는 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멸망할 죄인입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게서는 우리의 죄된 모습을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나의 악한 모습을 받아주시고 나의 연약함을 덮어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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