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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헤미야 01:06-11/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느헤미야]
  • 조회 수: 501, 2018.04.18 15:30:08
  • 영국의 마이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일이 있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긴 여행 중에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마이어 목사님은 이 요청을 승낙하고 배에서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는 우연히 무신론자 한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 무신론자는 영국의 유명한 목사라고 하니깐 한번 어떤 설교를 하나 궁금한 마음으로 예배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마이어 목사님은 기도의 응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무신론자는 마이어 목사님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절대로 기도 응답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일이 있은 후 얼마 뒤 이 무신론자는 배위 갑판위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 갑판 위에 중년의 여자 한명이 창백한 안색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무신론자가 무슨 일이 때문인지 궁금해서 중년의 부인에게 찾아가 물었습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중년의 부인이 배 멀미가 너무 심해서 그렇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이 무신론자는 자기 주머니에 있던 오렌지 두 개를 꺼내어 ‘멀미가 날 때 상큼한 과일을 먹으면 좋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이 중년의 부인에게 건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이 중년의 부인이 벌떡 일어나서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놀란 무신론자가 ‘왜 갑자기 하나님을 찾고 난리입니까?’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고, 이 오렌지는 분명 제가 당신에게 준 것이 아닙니까? 감사를 하려면 저한테 해야지 왜 하나님께 감사를 합니까?’그때 이 부인이 한말이 “저는 배 멀미가 너무 심해 배 갑판에 나와 바람을 쐐면서 이렇게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배 멀리 때문에 속이 너무 안 좋습니다. 하나님 오렌지 딱 두 개만 맛보았으면 좀 좋겠습니다.”그리고 부인이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은 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보내주신 기도 응답의 도구였습니다.” 마이어 목사님은 나중에 이이야기를 전해 듣고 말하기를 ‘기도의 응답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서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살았던 시대는 스룹바벨이 처름 포로귀환자들을 이끌로 1차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때로부터 약 90여년 후의 시대입니다. 스룹바벨과 1차 포로귀환자들은 이스라엘로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 재건 사역을 시작하였고, 온갖 방해와 어려움 속에서 약 20여 년만에 성전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일이 있은 후 약 50여년 후 에스라가 사람들을 이끌고 2차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 사역을 감당 하였다면,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부흥의 사역을 감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의 2차 포로 귀환이 있은 후 약 10년 후 다시 느헤미야에 의해서 3차 포로 귀환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느헤미야의 주요 업적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로 3차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한 일과, 무너졌던 예루살렘 외곽 성벽을 재건함으로서 민족의 정체성과 주권을 회복시킨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바사제국, 그러니깐 페르시아 제국은 왕이 바뀌 때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방 민족에 대한 정책이 달라졌습니다. 처음 고레스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아닥사스1세 왕은 그가 통치하던 초기 기간에는 이스라엘 대하여 재건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왕이었습니다. 에스라 4장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벽을 중건하는 일을 아닥사스 1세 왕이 멈추게 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전재건만 자세히 기록되었고 예루살렘 성벽의 건축은 자세히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성전재건을 마친 후 외곽 성벽건축도 함께 완성되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민족의 핍박과 방해로 왕성 되었던 성벽은 다시 무너졌고, 아닥사스왕이 처음에는 성벽재건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라는 것을 짐작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가장 부정적이었던 왕을 기도 응답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 기도 응답의 비밀을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라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기도 응답의 비밀, 최악의 상황 속에서 놀라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 번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기도 응답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장애는 기도하는 사람의 죄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다고 말했습니다. (사59:1-2)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나아올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 응답을 방해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라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 응답을 방해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정답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집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자백이라고 불렀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을 보면(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성도의 신실한 죄의 자백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힘없는 기도의 통로를 열어줍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회개를 먼저 합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는 자신들의 조상의 죄와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라고 여기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과 조상의 죄와 악을 합리화 하거나 미화시키지도 않습니다.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크게 악을 행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래 자백이란 말은 죄를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지한 기도는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이 옮겨지고 기도의 통로가 열릴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두 번째 약속의 말씀이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응답받는 기도의 가장 큰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응답받는 기도에는 성경적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약4:3) 야고보서에 4장에 보면 성경에 보면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구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에는 잘못된 근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기도로서 응답받는 기도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이 근거는 바로 하나님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으나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기에 합당한 기도인지, 아니면 응답 받을 수 없는 기복적인 기도인지에 대한 기준은 성경적 근거에 따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약속의 근거한 기도냐, 아니냐에 응답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책속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가져오는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뜻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바로 알고 이 말씀을 믿고 붙들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바로 이렇게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를 했습니다.

    8절과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8절과 9절에 나온 기도의 내용은 출애굽 당시 모세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으로 신명기4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신11)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고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려 이방 나라에게 포로가 될 것을 하나님은 경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운데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다시 회복케 해주신다라는 약속의 말씀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기도의 가장 분명한 정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방편 혹은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36장 36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겔36: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주님이 약속하셨지만 그럼에도 주의 백성들이 기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겔36:37)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렸다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사실 이상으로 무엇을 기도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기도의 근거이고 내용입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 기도의 근거가 되고 내용이 되어 응답받는 기도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를 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할 때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바라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얼마나 자주 세상을 보고 사람의 눈치를 보는지 모릅니다. 마치 하나님 만으로 충분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곁눈질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 베드로가 시선을 주님께 두고 있을 때는 풍랑 속 파도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선을 파도에 두기 시작하자 주님은 작게 보이고 파도만 크게 보였고, 곧 두려움에 빠져서 물속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즉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느헤미야의 경우 가장 현실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가 모시고 있는 아닥사스다 왕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날마다 그를 만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자기의 문제를 왕에게 바로 아뢰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가장 먼저 그는 하나님께 기도로 자신의 문제를 아뢰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현실적으로 아닥사스다의 왕의 행정적인 결재가 없이는 예루살렘의 성벽의 중건이 불가능하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슶니다.




    그러나 그는 왕의 결재에 앞서서 하나님의 결재가 필요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는 왕이 사람이 이일을 이루는 것 같지만, 왕의 뒤에서 사람의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느헤미야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왕과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하나님의 허락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왕과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잠21:1) 그래서 잠언 2장 1절에서는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신다”라고 증거합니다. 왕의 마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은 바로 창조자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을 움직여 그의 신임과 허락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느헤미야가 이 문제를 위해 먼저 왕에게 말하지 않고 기도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서 자주 아니 더 많이 이 세상이나 사람들의 도움을 먼저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것을 다 해본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지는 않습니까?

    최선을 다한 후 하나님을 찾으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성경적인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같은 말 같지만 순서가 틀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 먼저입니다. 세상의 방법은 나중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마음을 먼저 가지고 기도함으로 세상과 사람을 도구와 통로로 사용하실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편기자인 다윗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시62:1-2)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우리가 다윗의 고백처럼 잠잠히 하나님만 바란다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요, 요새라고 구원이라고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상황가운데, 힘들고 불확실한 미래 가운데 놀라운 기도의 응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라면 무엇보다 기도의 대상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구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과 백성들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권능으로 보호하시는 전지전능한 만왕의 주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죽으신 사흘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전능하고 전지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그의 능력을 신뢰하고 기도할 수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슬프게 했던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자백하며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이제 하나님만을 신뢰하겠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무릎꿇고 엎드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느헤미야의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 삶가운데 하나님께서 들어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고,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느헤미야에게 일어난 이 기도의 응답의 역사가 우리의 삶가운데서 일어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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