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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헤미야 03:01-27/ 하나님 백성들의 사역 원리 [느헤미야]
  • 조회 수: 276, 2018.04.18 15:33:55
  • 공동체 안에 원리원칙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존재합니다. 긍정적인 면은 원칙을 잘 세우고, 그것을 일관성 있게 실천한다면, 맡은 바 일을 집중력 있고 효과적이게 감당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에 부정적인 면은 너무 형식에 얽매여 유연성이 없어지고, 자칫 잘못하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기가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너무 유연하여 이리저리 움직여도 안 되지만, 너무 딱딱하여 부러지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잘 조화시켜 균형 잡힌 원리원칙의 방법을 적용하면, 공동체안에서는 매주 좋은 효과와 영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규형 잡힌 원리중심의 사역을 잘 감당했던 지도자 중 한사람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라는 지도자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면서, 균형잡힌 원리중심 리더십을 발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망이었던 위대한 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느헤미야가 사용했던 리더십의 원리를 배우면서, 저와 여러분의 가정과, 구역과, 기관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중시한 원리 중심의 리더십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느헤미야에게 배울 수 있는 교회와 가정에 합당한 사역의 원리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느헤미야 3장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첫 번째 사역의 원리는 협동의 원리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된 이야기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함께 힘을 모아 성벽과 성문을 건축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홀로 성벽재건 사역을 다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 백성들이 이 성벽재건 사역을 참여할 수 있도록, 협동사역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서 3장을 읽어보면 무려 75명이상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왜 느헤미야는 이런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여기서 열거했을까요? 그것은 느헤미야 혼자 이 사역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여기서 강조된 말은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함께라는 단어와 또 다른 단어가 느헤미야 3장에 제일 자주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 다음은'이라는 단어입니다. 매 구절의 처음은 대부분 '그 다음은'이라는 단어로 시작 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그 다음'이라는 표현은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동시에 나란히 서서 협동하여 이 성벽의 재건을 이루어 낼수 있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누구는 이렇게 사역을 했고, 그 다음 아무개는 저렇게 감당했고, 그 다음 누구는 이렇게 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 함께 사역을 감당했다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협동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민족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 적으로 유명한 과학대회, 수학 대회라던지, 학문평가 시험등에서 보면 우리나라 학생들이 대부분 상위권에 들어 있습니다. 얼마 전 실시했던 청소년들의 학업 평가에서도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등수를 차지 했습니다.' 올림픽을 비롯해 스포츠 부분에서도 우리 나라는 언제나 상위권에 올라와 있습니다. 경제 역시도 10위권에 드는 나라가 아닙니까?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인구 순위가 25위이고 나라의 땅은 109위를 차지합니다. 가지고 있는 천연자원도 부족한 나라입니다. 이렇게 인구면에서도, 영토 면에서도, 가지고 있는 천연자원 면에서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국방에 이르기까지 전세계 적으로 상위 10%안에 들어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저렇게 작은 나라에서, 저렇게 가진 것이 없는 나라가 어떻게 잘 살고 있는가 신기해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진 단점중 하나는 협동정신이 부족하다라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아주 잘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유대 민족 다음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뛰어나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두 명 이상 함께 붙여놓으면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민족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한국교회도 이런 민족적 기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각 교회마다 얼마나 많은 갈등과 불화가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형제 자매로서, 하나님의 일을 다 함께 협동해서 감당하는 동역자로 여기기보다는, 서로를 이기고, 앞서 나가야 하는 경쟁자로 보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성도들 뿐만 아니라 사역자들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상대방 보다 높이 올라가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할 온갖 비방과 흑백 선전이 난무하는 것이 한국교계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또한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가르칩니다. 몸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여러 지체들이 연결되어 협동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왜 주님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야말로 혼자 감당 할 수도 없고, 혼자 해서도 안 될 공동체적인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 혼자만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지체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구원하시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저 형제 자매도 함께 구원하시고 부르셨다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도, 저기 있는 형제 자매들도, 모두 하나님의 귀한 사랑의 대상이자, 예수님께서 피흘리시기까지 소중하게 여겼던 예수님의 지체임을 기억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 혼자 잘나서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온 백성들이 함께 힘을 모아, 협력해서 이루어야 하는 일이다.' 교회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서로 서로를 섬기고 배려를 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사역의 원리는 은사의 원리입니다.



    본문 느헤미야 3장에는 적어도 15가지 이상의 다양한 직종들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직업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성의 재건사역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모두 자기들이 가진 재능에 맡겨, 능력에 맡게, 사역의 자리를 책임지고 건축에 헌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는 제사장들은 양문 건축을 담당하고 있음이 나와 있습니다. 양문은 양의 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양문은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양들을 가지고 출입하는 문이었습니다. 그 문의 용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제사장들이 그 부분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절에는 어문이 나옵니다. 어문은 어문의 뜻은 물고기 문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어문은 바다에서부터 오는 생선들과 어류들을 가지고 들어왔던 문입니다.(두로 쪽에서 무역으로 생선을 가지고 옴) 생선과 어류들은 이 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성으로 가지고 들어와 시장에 가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3절에 등장하는 하스나아의 자손들은 아마도 이 문을 가장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이거나 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로 보여 집니다. 어업에 종사했던 사람이 이일에 가장 합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어문의 건축을 감당했던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집부분의 건축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은 베냐민과 핫숩이 자기 집 맞은편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아나냐의 손자 마아세야의 아들 아사랴가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내가 감당할 사역의 부분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부분이어야 내가 그일을 잘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 가지 집의 뒤편에 있는 성벽을 각 가정이 책임을 지고 공사를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은사배치의 성경적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4장10절 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가장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가 은사와 재능에 따라 섬기는 것입니다.

    은사와 재능에 적합한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내 은사와 재능에 맞는 사역인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즐겁게 자원하여 잘 할 수 있는 일을 능동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객관적 평가를 받아 교회를 섬기고, 성도를 섬기는 일에 앞장 서야 하고, 그때 비로소 우리의 교회의 사역은 아름다운 열매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섬김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섬김의 교회는 각 구역을 정 별로, 집에서 가장 가깝고, 친근한 성도들로 묶지 않았습니까?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자 자기 집 앞과 근처에 있는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감당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역시 각자 자기 집에게 가장 가까운 구역을 나의 사역의 장소로 생각하고, 이것이 나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이다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그 일을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가 각 백성에게 자신들의 집 맞은 편을 그들의 사역의 장으로 맡겨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도 있지만, 책임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랬다고 볼 수있습니다. 내가 사는 집의 맞은 편에 쌓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내가 살 집을 보호한다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벽을 내가 튼튼하고 제대로 잘 쌓아야지, 나중에 적들이 침범할 때 내 집을 안전하게 보호 할 수가 있다.'라는 자각심과 책임감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역에 각자가 최선을 다하여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섬김의 교회는 크지 않는 교회입니다. 서로의 가정들의 속사정까지도 다 아는 가족과도 같은 교회가 아닙니까? 어찌면 구역을 비롯해, 각 기관 속에서 서로를 섬기고,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하고, 나에게 맡겨진 직분과 위치에 맡게 최선을 다하는 것은 상대방의 유익이 아니라, 먼저 나 자신에게도 유익이 오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론 귀찮게 여겨지고, 때론 어려운 일들이 있을 지라도, 저와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각 사람의 사역들, 구역 사역과, 기관 사역들을, 책임감 있게 성실히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목사님 한 사람만으로 이끌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관도 기관장 한 사람만의 힘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역도 구역장 한사람만의 노력으로 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 한사람이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협력하고 합동했던 것처럼, 우리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모든 기관의 기관원들이, 모든 구역의 구역 원들이 다 함께 협력해서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격려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3장에서 느헤미야가 이렇게 세심하도록 여러 지도자들의 이름과 사역의 내용을 상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 된 이유중 하나는 그들의 격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인간이란 존재는 누구나 격려 받지 못한다면 어떤 일에 지속적으로 헌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격려의 반대는 낙심입니다. 격려를 받으면 용기가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낙심은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10:24)고 말합니다.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유교문화의 전통이 뿌리 깊게 남아 있어서 격려보다는 책망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책망과 정죄에는 빠르지만 격려와 칭찬의 인색한 모습이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서로를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기독교 저술가는 (마크 트웨인)"칭찬과 격려보다 공동체를 건강하고 견고하게 세워 갈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칭찬을 모르고 격려가 메마른 가정은 원망과 불평, 낙심이 가득한 가정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기관과 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역원은 구역장을 격려하고 칭찬해야 합니다. 또한 기관장은 기관원들을 격려하고 칭찬해야 합니다. 본문 20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

    여기서 느헤미야는 바룩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은 특별한 수식어를 써서 그를 격려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에 대하여 특별히 '힘써서 중수했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노력한 헌신을 격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바룩과 같이 더욱 특별히 힘썼다라고 칭찬과 격려를 들 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격려가 하나님의 일을 더욱 기쁘고 즐겁게 감당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격려가 단순히 분위기를 띄우려고 하는 가벼운 심정의 격려가 되서는 안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격려는 진지한 격려, 상대방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진심으로 우러러 나오는 사실적인 격려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일시적 효과밖에는 가져오고, 잘못하면 상대방에게 오해나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격려한다는 것이 결코 객관적인 평가를 간과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느헤미야 3장에는 사역을 소홀히 한 사람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평가도 동시에 존재합니다. 예컨대 5절을 보면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하면서 신실하게 사역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을 책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귀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체면을 차리다가 온전한 헌신하지 못했다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도 이러한 귀족(?)들이 있습니다.



    '새로 들어온 성도가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렇게 오래 교회 다닌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하나?'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의 연륜과 직분을 믿고 가만히 앉아 콩나와라 팥나와라 하는 21세기 판 귀족들이 존재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귀족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예외적인 사람들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3장 전체적인 내용은 지극히 긍정적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름이 기록된 헌신자들 뿐만 아니라,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무명의 모든 공동체원들의 헌신으로 이 위대한 역사가 가능할수 있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모습과 자세로 서 있으십니까? 귀족의 신분으로 손에 뒷짐만 지고 있으십니까? 아니면 바룩과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하나님 앞에 맡겨진 일을 묵묵히 잘 감당하고 있으십니까?우리 섬김의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느헤미야가 모범으로 보여준 협동의 원리, 은사의 원리 그리고 격려의 원리를 다시 배워 우리 교회와 기관과 구역, 가정에서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저와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섬김의 자리에서, 또한 직분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실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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